# 369
회귀자 사용설명서 369화
쉬어가는 유니콘(2)
점점 더 구겨지는 얼굴.
살짝살짝 뒷걸음질치고 있지만 엘리오스에겐 엘레나의 묘한 행동이 보이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표정이다.
저 유니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가 자신의 여동생이라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저, 저는….”
엘레나가 머뭇거리는 와중에도 유니콘은 이쪽으로 다가왔다.
처음에 신기하게만 쳐다봤던 박덕구 역시 점점 더 유니콘이 가까이 다가서자 당황했는데 괜스레 입을 한 번 더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크으. 거 정말로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거 안전한 거요? 갑자기 공격하거나 막 그러는 거 아니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슬쩍 김현성을 바라보는 박덕구의 모습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엘리오스의 말을 듣고 판단하겠다기보다는 김현성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네. 괜찮을 것 같습니다.”
김현성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보기에도 적의가 없는 만큼 원정대는 녀석을 굳이 제지하거나 막지 않았다.
하지만 김현아 같은 경우에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대비는 하고 싶은 모양.
슬쩍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니 내가 자신의 안정거리 안에 있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파란의 길드원들은 뭔가 반응들을 보여주고 있다.
왠지 모르게 정하얀은 그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왜 저래?’
내가 알기로 정하얀은 남자친구를 사귄 적은 물론 관련된 적조차 없다.
물론 내가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정하얀의 행동을 유추해 봤을 때, 굳이 유니콘을 통해 순수를 증명할 필요조차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걸 증명한다고 해도 그 어떤 메리트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현재는 현재, 정하얀이 과거 연애사에 대해서는 지금의 내가 굳이 신경 쓸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근데 이거….’
하지만 문득 한 생각이 뇌리에 꽂히기 시작.
내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의 정하얀의 행동이 괜스레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혹시….’
그동안 내가 자고 있을 때마다 엄한 짓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같은 망상을 한 적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망상에 불과.
정말로 정하얀이 뭔가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정하얀이 권한 술을 많이 먹고 잔 날이면 기가 빨리는 듯했지만 그렇게까지 막장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나를 힐끔 힐끔 보는 정하얀을 보니 그 가정이 사실이 아닐까에 대한 의혹이 들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순간적으로 내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바로 옆에 있던 정하얀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다시 한번 순수를 증명해야 한다고 날뛰지 않을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쪽에서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본인이 먼저 위풍당당하게 첫 걸음을 떼기 시작.
본인의 입장에선 순수를 증명하기 위한 행동, 당연히 얼굴은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유, 유, 유니콘이네요.”
말투도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생각 없이 이쪽에 다가온 유니콘이 더 놀란 것 같다.
조용히 정하얀을 살피는 모습은 뭐라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말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녀석은 지금 틀림없이….
‘고민하고 있어.’
이걸 세이프로 쳐야 될지 말아야 할지 무척이나 고민하는 듯하다.
순수를 증명하는 데 무슨 고민의 여지가 있는 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유니콘 라리사는 틀림없이 일생일대의 고민을 펼치고 있었다.
그럴수록 정하얀은 더욱더 당당한 표정.
자신은 아무 거리낌 없다는 듯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몇 번이나 정하얀의 근처를 살피며 그녀를 유심히 살핀 유니콘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하얀의 앞에 자신의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마치 쓰다듬어 달라는 느낌.
정하얀의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귀, 귀여워라…. 귀여워라. 이거 봐요. 오빠! 이거 봐요!”
“아아… 응. 보여.”
보고는 있지만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본인은 본인의 순수를 증명해 기쁘기만 한 모양.
물론 나도 괜스레 안심이 되긴 한다.
내 망상이 망상에 불과했다는 게 밝혀진 셈.
어째서 유니콘이 일생일대의 고민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직접적인 사랑 나눔은 없었다.
‘그래. 그렇게 막장일 리가 없지.’
물론 상상하기 싫은 선택지가 하나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렇게 막장일 리는 없어.’
우리 정하얀이 그렇게까지 막장일리는 없다.
괜스레 고개를 저으며 전방을 바라보자 내친김에 녀석의 등을 타려 하는 정하얀이 보였지만 그건 내키지 않는지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긴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착하지. 착하지이.”
“…….”
“유니콘 차, 착하지? 이리 와야지.”
조금 당황했는지 유니콘을 부르기는 했지만 한 번 등을 돌린 녀석은 다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하얀의 얼굴에 언뜻 아쉬움이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생각했는지 한껏 미소 지으며 돌아왔다.
마치 개선장군 같은 모양새.
순수 증명 퀘스트를 완료했다고 느끼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유, 유니콘이 많이 힘든가 봐요. 헤헤.”
“응. 그래 보이더라.”
본인이 만족하는 만큼 정하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것으로 마무리.
하지만 내 눈은 다음 유니콘의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녀석이 정말 이 원정대에 호의적이라는 걸 확인한 만큼 녀석이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박덕구와 황정연을 지나치고 엘룬 나이트들을 지난 녀석이 자리한 곳은 다름 아닌 조혜진의 앞.
‘…….’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어진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쟤도 연애 잘할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지.’
“이건 다릅니다. 저는… 그….”
방금 전 정하얀보다 수백 배는 당황한다.
“저, 저는 연애 경험도 풍부하고…아니 풍부하지는 않은데… 그러니까 이건….”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가관.
손사래를 쳐야 할지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야 조혜진의 나이를 생각하면 연애 한 번 못 해봤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만도 하다.
하지만 본인이 부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김현성에게는 가볍게 보이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뭔가 적당한 합의점을 찾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 따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고자에 가까운 조혜진은 오히려 입을 열면 열수록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여, 연애 같은 건 많이 해봤습니다. 하지만 제가 혼전순결주의자라… 네! 혼전순결주의자라! 그, 그렇다고는 해도 경험이 없었던 건 아니고… 아니 경험이 있기는 있는데 없다고 해야 할지….”
‘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유니콘은 순수한 사람도 굉장히 좋아한다고 들었으니까요.”
“네. 그, 그렇습니다. 제가 좀 순수해서… 그러니까 이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자폭하지 마….’
심지어 더 불쌍했던 것은 김현성이 조혜진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내 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 이것저것 변명만 선보이고 있건만 막상 내님은 관심도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조혜진만큼 슬픈 상황도 흔치 않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조혜진이 당황하든 말든 유니콘은 친근한 기색을 내보이며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목을 부비는 중, 그녀의 얼굴이 다시 한번 붉어졌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심지어 저러다 치욕사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차라리 확 잡아버려라.’
마침 조혜진은 창잡이이니 기마술을 배워두면 써먹을 때가 있으리라.
물론 빛의 성자 이기영은 언제든지 유니콘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오, 그래 그거야.’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하얀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은 아까와는 차이가 있다.
누가 보기에도 기회라고 할 만하건만 조혜진은 아직도 붉어진 얼굴을 가다듬기에 여념이 없다.
만약 내가 그녀였다면 무작정 유니콘의 등 위로 올라가고 봤을 것이다.
다시 한번 유니콘이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은 그때.
제법 다급한 표정으로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몸을 옮긴다.
혹시나 유니콘에게마저 선택받는 것은 아닌가, 기분이 좋아진 것은 당연.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때 마침 근처에 있는 엘리오스는 괜스레 엘레나의 등을 떠민다.
올라타기에 실패했던 정하얀 역시 혹시나 다시 자신에게 오는 것이 아닌가, 기대하는 표정을 선보였다.
하지만 먼저 시동을 건 것은 엘프 남매.
“엘레나, 한번 쓰다듬어 보려무나.”
“아… 네… 네.”
반신반의 하는 표정으로 손을 뻗어 보건만 엘레나를 가볍게 지나친 녀석의 모습은 가관.
“풉.”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하얀의 입에서 승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 생각보다 가벼운 사람이었나 봐요, 오빠. 그, 그렇죠?”
“아… 응….”
“오, 오빠도 조심하셔야 돼요. 치료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 모르니까….”
심지어 작게 귓속말을 해온다.
가볍게 엘레나를 모함하고 있었지만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내 쪽에서 뭔가 액션을 보일 수 있을 리 만무.
무언가 충격 받은 것 같은 엘리오스의 표정을 뒤로한 채 정하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녀석은 선희영과 김예리에게도 작은 호의를 보였고 유아영과 한소라는 가볍게 지나쳤다.
김창렬을 비롯한 파란의 남자 단원들이나 엘룬 나이트들에게도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걸 보니 이곳에 있는 남자들 중 순수한 놈은 없는 모양.
혹시 정말 나에게도 기회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뜻 마주친 녀석의 눈빛을 읽은 뒤로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가까이 안 간다, 이 새끼야. 더러워서 안 가.’
한참을 배회하던 녀석이 자리한 곳은.
“아….”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앞.
“…….”
김현성은 당황하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천천히 웃음 지으며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 걸로 끝.
“귀여운 녀석이군요. 하하.”
심지어 등을 툭툭 치기까지 한다.
정하얀의 얼굴에는 묘한 패배감이 감돌고 애초에 비교 대상조차도 아니었던 엘레나는 아직까지도 당황스러운 표정.
엘리오스와 함께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나는 저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원정대원들은 어느새 김현성의 앞에 있는 유니콘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녀석은 기분 좋은 듯 가볍게 몸을 털기 시작했다.
“올라타도 된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거, 형님이 한번 올라타 보쇼. 아니면 혜진 누님이 올라타시든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만 저 위에 타면 좋은 거 아니요?”
“글쎄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혜진씨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만… 혜진 씨는 기마술에도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아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기연이라고 할 수도 있건만 조혜진은 무척이나 난감하다는 표정.
그야 저런 걸 타고 전장에 등장한다면 틀림없이 수치사 할 것이 분명하다. 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반면 놀림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등에 탄다고 해서 유니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도라도 해보는 게 좋을 겁니다. 혜진 씨, 어서요.”
“아니 저는… 그러니까.”
계속해서 미소 지으며 조혜진의 등을 떠미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
심지어 그 한마디에 그녀의 등을 떠미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된다.
박덕구는 계속해서 올라타기를 종용하고 있었고 안기모와 다른 여성길드원, 심지어는 엘룬나이트들도 어서 올라가보라는 듯 그녀를 재촉한다.
점점 더 얼굴이 붉어지는 조혜진의 모습에 내가 다 눈물이 나올 지경.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런 게… 분명히 거절 당할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도 한번 시도해 보는 게 좋은 거 아니요?”
“분명히 거, 거절 당할 겁니다.”
아쉽지만 그럴 확률은 제로에 수렴.
시간이 조금 지나자 박덕구는 대놓고 그녀의 등을 떠밀었고 결국 조혜진은 울상을 지은 채 유니콘의 위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뭔가 거부반응을 보일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유니콘은 오히려 기쁘다는 듯 투레질을 하고 있다.
둘의 몸이 잠깐 동안 밝게 빛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바로 그때.
“오오오오오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박수를 보내는 원정대원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플레이어 조혜진이 새로운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칭호-완전무결의 순결한 처녀]
[칭호-유니콘의 주인]
조혜진 나이 어느덧 26세.
기연이라면 기연이었지만 본인은 전혀 기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