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
회귀자 사용설명서 377화
언제나 팩트는 승리하는 법이다(3)
-교국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각 왕국이나 대륙 각지에 악마의 하수인들이 숨어 있습니다. 교국의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 공화국의 악마소환사 진청처럼 그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둠의 세력은 계속해서 빛을, 대륙을 좀먹고 있습니다.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그림입니다. 여러분, 부디 눈을 뜨십시오. 악마의 목소리에 현혹되지 마시고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라봐 주십시오.
제법 진지한 눈으로 성벽 위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이미 촉촉하게 젖은 눈가.
내가 생각해도 제법 그럴 듯하다.
은은하게 몸을 휘감고 있는 빛은 내가 하는 말에 신뢰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래서 빛기영 빛기영 하는 거 아니겠어.’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빛의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얻은 것은 신의 한수라 말하고 싶다.
이런 말을 지껄이고 있는 와중에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 흉측한 어둠이었다면 설득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대륙의 멸망이며 몰락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이 살아가는 터전, 여러분이 지켜야 하는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겁니다. 여러분의 적은 인류가 아니라 지금 당신들을 그 자리에 있게 만든 악마와 그 하수인입니다. 악마소환사 진청에 의해 뿌리까지 썩어버린 현 공화국 정권이야말로 여러분이 검을 겨눠야 할 대상입니다.
거짓 하나 없는 팩트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부디 무기를 버려주십시오. 함께 손을 잡고 더 큰 위협에 대항해야 합니다. 악마소환사 진청을 비롯한 악마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한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국가 간의 갈등이나 종족 간의 갈등을 버리고 모두가 한발 내디뎌야 합니다. 빛을 향해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어째서 그 자리에 계십니까. 무엇을 지키기 위해 전장으로 나오셨습니까. 무엇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자리해 있습니까? 삼국동맹은 여러분의 적이 아니라 함께 발을 맞출 동료입니다. 빛의 이름 아래 대륙에 살아가는 모든 이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내려야 하고말고.
-일어나십시오. 어둠에 삼켜지지 마시고 빛과 함께 하십시오. 빛의 이름 아래 대륙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엘프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제법 감명이라도 받은 듯한 모양새.
적 진영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이미 여신의 거울이 튀어 나왔을 때부터 동요하고 있던 공화국 병사들은 이쪽이 뿜어내고 있는 은은한 빛에 감화되어 있다.
최대한 대응하려는 지휘부의 모습이 보였지만 한발 늦었다.
본격적인 설전에 들어가기 전에 한마디 정도는 더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둠의 힘은 너무 강대합니다. 삼국동맹의 힘만으로는 이 대륙을 구할 수 없습니다. 작은 촛불은 어둠을 밝힐 수 없지만 여럿이 모이면 어둠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라이오스 사태를 경험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촛불입니다.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이도, 갑작스러운 전쟁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이도, 모두가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빛입니다.
반대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진청 군사가 악마 소환사라는 것은 날조된 증거입니다. 대륙을 농락하고 교국의 꼭두각시를 내세우는 이기영 명예추기경이야말로 대륙의 공적입니다. 라이오스 사태 역시 그의 자작극이며 그가 여신의 거울이라 선전하는 것 또한….
-날조라는 것은 그대들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 없이 실체가 없는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야말로 날조입니다.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믿으십시오. 들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을 믿으십시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대한 악마가 계약자라고 부르는 것이 누구입니까. 라이오스에 커다란 절망과 위험을 주었던 이가 누구입니까. 대륙법으로 시행되는 재판을 거부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가 누구입니까. 아마 여러분은 삼국동맹이 정식으로 재판을 회부되었다는 사실 역시 모르고 계실 겁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 모든 혼란을 초래한 이후 가장 안전한 곳에서 숨죽이고 있는 이가 누구입니까! 저는 현재 여러분의 앞에 서 있습니다. 악마소환사 진청과는 다르게 여러분과 대화하기 위해 지금 이곳에 서 있습니다!
-현혹되지 마십시오. 여신의 거울로 보이는 것은 모두 진실이 아닙니다.
-지금 그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대 역시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준 신호에 곧바로 카메라를 돌리는 정하얀에게는 엄지손가락을 보내고 싶다.
현재 마력 홀로그램이 비추고 있는 것은 공화국의 대변인.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러시아 사람인가?’
이방인인지 러시아 사람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마음의 눈으로 확인하자 곧바로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플레이어 예브카리나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예브카리나]
[나이-34]
‘러시아 사람 맞구만.’
굳이 다른 쪽은 볼 필요도 없다고 느껴진다.
애초에 비전투형처럼 보이기도 했고 실제로 능력치도 초월적이라고 말하기에는 힘들다.
이지혜처럼 처참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자체 음성 증폭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 아마 진청 쪽 라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초조한 얼굴은 조금 귀엽게 느껴질 정도.
하지만 본분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어떻게든 이쪽을 물어뜯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이후에 어떤 말을 해올지도 예상이 간다.
‘빛과 어둠이라는 프레임을 부정하든가.’
혹은.
‘반대로 뒤집어씌우려고 하든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저분도 곧 악마 관계자로 다시 태어나게 될 테니까.
* * *
-지금 그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현재 그대의 모습 역시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 거지.’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건 익히 들었지만 교국의 수도나 린델에 자리해 있을 거라는 지휘부의 판단이 무너진 것이다.
‘아니.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현재 모든 병력이 에베리아를 틀어막고 있었으니까.
캐슬락 공성전이 시작된 이후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다면 전체적인 전황은 더욱더 유리해진다.
린델, 그다음은 수도.
이 전쟁은 승리를 향한 물살을 타게 된다.
문제는 현재의 상황에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이가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정하는 수밖에 없어.’
모두는 아니지만 병사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
특히나 공화국민들의 모습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물들어 있다.
몇몇 이방인 역시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마찬가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앞선 영상은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까.
보통 흑마법사라고 해봐야 하급 악마나 중급 악마를 부르는 것이 끝이다.
감히 마주하기조차 두려운, 악의로 가득 찬 초월적인 괴물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직접 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덜덜 떨려올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저런 게… 대륙에 존재한다고?’
여신의 거울에 비친 악마군주의 모습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울부짖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다.
대륙을 노리는 어둠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하지만 이 장소를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딱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다.
대륙 곳곳에 숨어 있는 악의적인 존재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모험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들이라면 전부 알고 있을 테니까.
하물며 악마라면….
물론 나는 진청 군사님을 믿는다.
하지만.
‘만약 저 영상이 조작된 것이라고 해도.’
파괴적인 것은 마찬가지.
자세한 상황을 전해 들은 나 역시도 의심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는 걸 피할 수가 없다.
혹시나 진청 군사가 정말로 악마의 하수인이라면?
정말로 대부분의 공화국민들이 진청군사의 말에 속고 있는 것이라면?
눈앞에 있는 저 명예추기경이 빛의 선택을 받은 자라면?
군사의 목적이 공화국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악마숭배자 이토소우타, 악마소환사 진청.
그리고 정말로 대륙에 뿌리내리고 있는 집단이 존재한다면….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한 시점.
이미 말려들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야. 분명히… 날조된 내용일 거야.’
의문을 품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꾸만 머릿속에서는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을 비롯한 공화국은 거대한 물살을 탔고 평범한 이들이 이 물살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야.’
병사들을 다독이고 명예추기경의 말에 대응한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것뿐이다.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하는 것은 찰나. 숨을 내쉰 뒤 곧바로 입을 열자, 곧이어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신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직접 봐도 불안하게 비춰진다.
하지만 이게 최선.
‘선전이고 전술이야. 절대로 의문을 가지지 말자.’
-모든 것은 적의 선전이고 전술입니다. 아군의 사기를 꺾기 위한 기만전술입니다. 아, 악마를 소환한 것은 진청 군사님이 아닙니다. 교국의 명예추기경이야말로 라이오스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이번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치밀한 각본이며 공화국을 빼앗기 위한 수작입니다! 저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진짜 악마는 저들입니다. 민중을 속이고 선동하며 기만하는 저들이야말로 대륙에 자리 잡아서는 안 되는 악마들입니다. 신성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일으킨 폭동 때문에 얼마만큼의 피가 흘렀는지 우리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맞아.’
-중립국 라이오스를 자신들에게 끌어 들이기 위해 라이오스 국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펼친 자작극입니다. 악마소환사는 진청 군사님이 아니라 교국의 명예추기경과 그와 함께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정말일까. 목숨을 걸고 라이오스를 지킨 저들이 정말로 악마를 소환한 장본인이라고 해도 괜찮은 걸까.’
연기가 아니었다.
덩치 큰 전사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저항하고 있었고 이기영 명예추기경과 마법사는 계속해서 울컥 울컥 피를 토하며 초월적인 힘에 저항하고 있었다.
‘정말 연기였던 걸까.’
-모… 든 것이 함정입니다. 판단력을 흐리려는 자작극입니다. 어째서 교국이 중립국인 라이오스를 끌어들이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째서 이종족을 끌어들이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노리고 원하는 것이 바로 이 전쟁입니다. 우리의 것을 빼앗기 위해 검을 들고 공화국을 부정하며,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삼국동맹입니다. 이 모든 상황이야말로 악마소환사 이기영이 원하는 바입니다! 그가 바로 악마를 소환한 장본인이다! 진청 군사님께서 그럴 리가 없어!
커다란 일갈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디 거짓부렁을 입에 담는 것이냐! 나는 베니고어 여신님과 엘룬의 선택을 받은 성직자이며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다! 이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아!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신성한 빛이 터져 나온 것은 순식간.
제대로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