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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380화 (379/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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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 380화

언제나 팩트는 승리하는 법이다(6)

“아마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게야.”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찜찜한 기분이 든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해야 했으니까.

현재 공화국 진영이 가지고 있는 단점은 적군의 정보가 무지하다는 데 있다. 에베리아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세계수의 영향. 이기영 명예 추기경이 에베리아에 체류하고 있는지도 최근 알았으니 다른 표현은 필요 없으리라. 숨기고 있는 카드가 그것뿐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멍청한 일. 여러 가지 카드를 숨기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뭔가 정보가 있을 수도 있어.’

아주 작은 대화에서도 여러 가지를 추측할 수 있기 마련이다. 이 수성전 아닌 수성전을 효과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꼭 수비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야.’

그 말 그대로, 쟁점은 얼마나 시간을 끄느냐에 있다. 시간상으로 생각하면 빠르면 내일, 조금 느리면 그다음 날부터 전쟁이 시작될 확률이 높다.

적 병력이 캐슬락으로 도착하지 못하게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하니 최소 5일은 붙잡아 놔야 한다. 적들이 도착하더라도 캐슬락을 점령한 이후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상황은 유리해.”

성벽은 견고하고 병력은 우위다. 공성전의 입장이 아닌 수성전에 입장에 서 있다. 마법사들의 체력 분배와 사제들을 중심으로 긴 장기전을 유도한다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야.’

결단코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윽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직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지는 뻔할 뻔 자. 조금 복잡한 표정을 한 채로 방 안으로 들어오는 비숍 사제님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어떻게 봐도 어두운 얼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싸우고 싶지 않으신 거야.’

아마 틀림없으리라. 사제의 입장에서는 어떨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 뭡니까, 비숍 상급 사제님.”

“별건 아닐세. 아마 나보다는 예브카리나 자네가 더욱더 듣고 싶은 게 많을 것 같다만….”

“그 말이… 맞습니다, 상급 사제님. 현재 정보가 부족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교국 측에서 어떤 카드를 가지고 있는지. 또 안에서 어떤 대화들이 오갔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단순한 사제들끼리의 대담이었어. 아마 듣는다고 해도 뭘 캘 수는 없을 걸세. 애초에 나눈 것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고…. 평화와 공존, 그리고 새로운 발걸음에 대해서였네. 여신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또 우리 사제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도 했지. 모시는 신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뿌리는 같으니…. 하하. 이기영 명예 추기경. 그 사람은 원래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무신론자였다고 하더구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라니… 이 대륙에서 무신론자라니!”

“실제로 저희가 온 곳에서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신성력 같은 게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다고 들었네. 이방인들이 온 지구라는 곳에서는 말이야. 재미있었던 것은 종교 때문에 일어난 전쟁도 그 중 상당수를 차지했다는 게야. 물론 이곳도 성전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지구라는 곳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겠지.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가 가지고 있는 신앙심을 위해 싸웠다고 들었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신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신성력도 내리지 않는 신을 위해 싸운다고….”

“분명히 그랬었습니다. 아니, 아마 지금도… 싸우고 있을 겁니다.”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현재는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네. 물론 왜곡된 싸움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가치로 내걸고 싸우는 그 신앙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어. 어째서 베니고어 여신님과 엘룬 님이 그자를 자신들의 사자로 내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네. 이기영 명예 추기경, 그자의 신앙은 순수해. 너무나도 하얀 사람일세.”

“네?”

“그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진짜 사제야. 자신이 가려고 하는 길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아. 신의 이름으로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말일세. 심지어는 그가 바리안 님의 교리까지 공부하고 있었다더군…. 하하하. 다시 한번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됐어. 나는 과연 신의 이름을 내걸고 싸운 적이 있었나. 내가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나는 지금껏 바리안 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 말일세.”

“여러 가지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비숍 상급 사제님은 앞으로도 많은 것을 함께해 주실 겁니다.”

“아니, 내가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네. 신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그렇지 않습니다, 사제님.”

“길을 열어주게나.”

“네?”

“길을 열어야 하네. 그들에게는 대의가 있고 우리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어. 싸움을 피해야 하네. 공화국민들이 쓸데없는 피를 흘릴 이유가 없어. 그가 원하는 것은 빛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는 것이 전부일세. 악마 소환사 진청을 잡아 이 혼란을 종식시키는 것이 그거 원하는 전부야. 길을 열고 함께 캐슬락으로 향해야 하네.”

“네?”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네. 예브카리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비숍 상급 사제님. 지금은 전시입니다. 길을 열다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그리고 진청 군사님께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비숍 사제님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네. 정말로 본인이 떳떳하다면 어째서 대륙재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인가. 어째서 교국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것으로 일관했던 것인가. 그자는 악마 소환사가 맞아.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네.”

“취하신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내일 마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돌아가 주십시오.”

“나는 지금 허투루 하는 이야기가 아닐세, 예브카리나. 내가 똑똑히 봤다고!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자는 악마 소환사가 맞아…. 제대로 된 종교 재판을 받아야만 하네.”

“취하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비숍 사제!”

“진청 그자는 악마 소환사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예브카리나!”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면 군법으로 다스리겠습니다!”

“…….”

“…….”

“미안하네…. 내가 잠깐 흥분한 것 같으니….”

“후우…. 아닙니다. 사제님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같이 한잔 마셔 주겠는가.”

“저는 괜찮습니다, 사제님. 머리가 아프니 돌아가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오늘의 일은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알겠네…. 알겠어.”

“말씀을 많이 드리지는 못했지만 저는 사제님을 많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웃으면서 뵙고 싶습니다.”

“…….”

천천히 밖으로 나가는 사제님의 뒷모습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축 처진 어깨가 괜스레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을 지경.

입술이 꽉 깨물어진다. 테이블 위에 따라져 있는 포도주가 괜스레 시야에 들어온다. 저도 모르게 녀석을 들어 올린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내 인상을 구기며 비숍 사제가 따라준 그 술잔을 바닥으로 던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선택이 실수였다는 걸 인지한 탓이다.

“빌어먹을.”

그리고.

“자네는 그 술을 마셨어야 했네, 예브카리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순식간, 어두운 방문의 틈 사이로 보이고 있는 것은 백발을 하고 있는 노인이다. 눈은 광기로 가득 차 있고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적의가 감돈다. 주문을 외우는 것은 당연.

하지만 갑작스럽게 달려든 노인의 손에 들린 단검을 보는 순간, 갑작스러운 공포와 당황스러움이 머릿속을 덮쳤다.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비숍 사제의 모습은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자네는 그 술을 마셨어야 했어! 내가 건넨 그 신성한 포도주를!”

“이…. 이 미친 늙은이가!”

“내가 미쳤다고? 내가 미친 것 같아! 미친 것은 네년이지. 이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 년이!”

“무슨… 소리를!”

“네놈들 악마 숭배자 놈들의 계획을 우리가 모를 것 같으냐! 캐슬락에 다시 한번 그 악마를 소환하려고 하는 계획을! 그곳에 있는 모든 이를 제물로 삼아 다시 한번 완전한 악마의 소환을 꾀하려고 하는 걸 모를 것 같아? 바리안 님에게 계시를 받은 내가 뻔히 보이는 그 수에 속을 줄 알았단 말이냐!”

“이 미친!!!”

“나는 보았다! 미래를 보았고 실제로 체험했단 말이다! 나 역시 계시를 받았다! 바리안 님의 계시로 공화국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보았어! 네놈들이 캐슬락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전부 깨달았다 이 아둔한 것아! 이 전쟁을 어째서 일으키려고 했는지 전부 깨달았단 말이다!”

“이거… 놔!”

“감히 이기영 명예 추기경을 해하려고 들어? 그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해하려고 들어?! 그는 바리안 님의 아들이며 선택을 받은 사자다! 네깟 악마 하수인 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미친… 늙은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 느낌. 발버둥을 쳐보지만 다시 한번 배에 틀어박힌 금속 때문에 말을 내뱉기가 힘들었다.

“나도 싸울 것이다. 공화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바리안 님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이기영 명예 추기경과 뜻을 함께할 것이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하지만 정신을 제대로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더듬더듬 팔을 뻗자 무언가 알 수 없는 형태의 물건이 손에 잡혔다. 그대로 머리로 내려친 것은 당연.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비숍 사제가 땅바닥으로 쓰러지자 구속이 풀린 몸에서는 절로 켁켁 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확실한 것은 비숍 사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전방을 다시금 바라보자 깨진 머리가 신성력으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아.”

“아니…. 나는 그런 게….”

“이 더러운 년!”

“나는 그런 게 아니야!!!”

다시 한번 칼을 내뻗는 사제를 향해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내려친 것은 순식간. 순간적으로 둔탁한 감촉이 느껴졌지만 이미 공포에 휘둘린 몸은 통제를 벗어난다.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이성을 던진다.

“나는!”

“으헉!”

“악마의!”

“크허어억….”

“하수인 같은 게 아니야!”

“커헉!”

“단지 지키고 싶을 뿐이야!”

“아아악!!”

“공화국을! 군사님을 지키고 싶을 뿐이야!”

“이… 더… 운… 하….”

“죽어!”

“…….”

“죽어! 이 변절자!”

“…….”

“죽어어어!!!”

얼굴에 끈적끈적한 뭔가가 튄 것은 당연.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니 손에 들려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리안 님의 조각상.

검과 방패를 든 채로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바리안 님의 조각상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조각상을 보니 왠지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온다. 거대한 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미처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 보고를 위해 들이닥친 병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게 눈에 보였다.

“예브카리나 님! 이종족 연합이 성벽으로 몰려들고 있습니… 다…. 무, 무슨 짓을….”

“…….”

“무슨 짓을!!!”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온몸에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으니까.

‘역시…. 군사님이… 옳았어. 군사님이…. 옳았던 거야.’

괜스레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자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브카리나. 절대로요.’

“역시… 군사님은…. 틀리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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