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2
회귀자 사용설명서 382화
성전(2)
안 그래도 장관인 모습을 더 장관으로 만들어줄 VFX(Visual FX)가 없으니 뭔가 섭섭하게 느껴진다.
정말로 빛의 군대가 돌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 사실.
하지만 위에서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런 전투에서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주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았다.
‘빛만 뿌려주면 되는데 그걸 안 해주네. 섭섭하다! 베니고어야!’
섭섭한 마음이 솟아오르기는 했지만 하늘 위의 초월적인 존재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지지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물론 체험한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없어도 나쁜 건 아니니까.’
현재 보이는 장면만 해도 충분히 이상적이라는 거다.
이쪽은 빛의 군대고 저쪽은 악마의 군세.
누가 정의고 누가 악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싸움이나 다름없다.
만족스럽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들려온 것은 옆에 있는 엘레나의 목소리.
“……!”
주문을 외우는 순간 신성력이 아군 병력을 뒤덮는다.
‘키야!’
내 눈이 정확하다면 버프 종류의 신성 마법이 들어간 것이 틀림없으리라.
엘룬쓰레기가 힘을 내려주지는 않았는지 발현된 신성력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구색은 맞췄다는 데 의의가 있다.
‘진짜 너무 쩨쩨한데. 엘룬쓰레기….’
자신의 딸을 팔아넘길 때부터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도움 하나 주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녀석다웠다.
아무튼 간에 빛의 군대는 엘레나가 내뿜은 신성력에 영향을 받기 시작.
정작 주문을 발현한 엘레나는 귀가 추욱 늘어졌다.
가지고 있는 신성력의 대부분을 소진한 것처럼 보였다.
거의 모든 병력을 휘감았으니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물론 전장에 함께 서려는 것은 아니다.
이지혜가 있는 상황실로 위치로 옮길 뿐이다.
언제 어디서 눈먼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는 곳에서 드잡이를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가자, 하얀아. 엘레나 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아. 하아. 저는 이곳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싶습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요.”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엘레나 님. 이번이 마지막 전투는 아닙니다.”
“네, 명예추기경님. 가슴속에 새겨듣겠습니다.”
‘새겨들을 필요는 없는데….’
혹시라도 리타이어해서 회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 이후 전투에서 그녀의 능력을 써먹기 힘들어 진다.
안 그래도 뒤틀린 연못에서 소모한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타이밍.
이후를 바라봐야 하는 이쪽으로서는 전력을 최대한 숨기고 아껴야 한다.
정하얀에게,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도 이번 전투에서 다른 미션을 주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
정하얀의 임무는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여신의 거울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고 김현성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는 역할이 끝이다.
몇 번이나 날뛰지 말라고 말을 해 놨으니 커다란 반전이 없는 이상 내 말에 따라 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김현성이 힘을 써준다면 더 손쉽게 승리를 가져갈 수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전력을 노출하는 것 자체가 꺼림칙하다.
현재는 적당히 전장을 누벼주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물론 파란 길드원을 케어하는 것은 김현성의 역할이다.
‘아암 그렇고말고.’
엘프나 드워프 몇몇 죽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확실히 속물 같은 생각이지만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눈에 마력을 집어넣으니 검을 검 집에 넣은 채 주변을 살피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다른 길드원들이 있는 위치를 눈에 담아두려 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고.’
적어도 걱정 하나는 덜 수 있다는 데 의의를 두는 게 맞으리라.
아무튼 제대로 된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에 빨리 상황실로 가야 했기에 발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간이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설치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마력 홀로그램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지혜.
그 외 검은 백조의 몇몇 사람과 엘프, 드워프 측 지휘관까지 함께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좋은 환경이고요.’
실시간으로 전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이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커다란 메인 화면에서는 병력 전체의 모습이 눈에 보이고 다른 거울에서는 각 부대가 따로 보인다.
물론 네임드들 같은 경우에도 따로 화면을 빼둔 것은 당연지사.
김현성을 비롯한 파란 길드원, 엘리오스와 드워프의 영웅들처럼 전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웅들은 따로 관리해 주는 것이 맞다.
이곳이 현대의 전장이라면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겠지만 대륙의 전쟁은 현대전과는 차이가 있다.
체스로 비유하면 편하다.
일반 병사들은 폰, 다른 영웅들은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는 비숍이며 나이트며 퀸이며 룩이다.
폰들 역시 잘 사용한다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른 말의 중요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영웅급 이상의 모험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히 몇 칸을 더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병력을 통솔하며 병사들의 앞에 앞장서고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폰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마치 지금처럼.
“이리스, 이리야. 정령마법 준비. 격돌 전 방어 마법 구현합니다. 휘하 정령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령사 엘프 자매였었나?’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략적인 스펙은 알 수 있다. 교국 팔좌급이라 보기에는 애매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네임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가진 이들.
순식간에 그들의 등 뒤에 튀어나온 이형의 존재는 엘프들이 정령이라 부르는 이들이 확실하리라.
-아아아아!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 뱉기 시작하자 곧바로 병사들을 감싸고 있던 방어 마법이 확실히 기존과 달라졌다.
정하얀도 신기한지 오랜만에 눈을 빛내며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
이지혜가 다시금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적 궁수와 마법사의 마법이 다시 떨어질 예정. 다시 한번 방어 마법 구현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상황실에 울려 퍼진다.
아마 저 목소리는 여신의 거울을 통해 그대로 전파될 것이다.
‘통신병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각 지휘관과 네임드 영웅들에게 신호를 내보낼 테고.’
적들의 화살과 마법이 떨어지기 전 상황을 전달 받은 이들은 곧바로 방어 마법을 구현할 것이다.
‘전술의 천재 좋아하네.’
가면쓰레기 진청은 물론 이 자리에 없다.
하지만 녀석이 지휘봉을 잡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전술의 천재고 나발이고 그 이전에 갖추고 있는 인프라의 수준이 다르다.
말하자면 녀석은 전술 전략은 아무리 노력해 봐야 보드 게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우리가 갖추고 있는 체계와의 차이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병력 전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또 세부적인 사항을 파악할 수 있는지.
녀석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상황실에서 전장으로 전달되는 명령의 하달 속도 역시 두말하면 입 아프다.
‘이건 템빨이거든.’
여신의 거울로 갖춘 부대 지휘 시스템의 인프라는 후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
무제한에 가까운 시야.
개인에게 전달이 가능한 통신체계.
심지어 적들의 마법이 날아오는 타이밍까지 계산할 수 있다.
이딴 걸 가지고도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이지혜의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한차례 위기가 넘어간 이후, 이지혜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보인다.
“파란 부길드마스터. 그리고 하얀씨도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지혜 씨.”
“네. 그렇네요.”
“현재 상황은….”
“좋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 병력은 확실히 혼란스러워 보이고 저희 쪽은 그렇지 않거든요.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울 뿐이죠 뭐. 덕분에 조금은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조심해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혹시 뭔가 전달할 사항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아직은 없습니다. 굳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고요.”
“연설은 감명 깊게 들었답니다, 명예추기경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제가 더 영광이죠. 뭐.”
“어떻게. 이번 전투는 자신 있으십니까?”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물으시는 건가요?”
“…….”
“아니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을지에 대해 걱정하시는 건가요. 단언컨대 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오… 아니, 명예 추기경님.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줬는데도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거든요.”
‘좋은 자세야. 좋은 자세.’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다.
가면 쓰레기 정도라고 하기에는 힘들지만 그녀 역시 병법에 재능이 있다고 하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지한 나는 뭐가 뭔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확실히 빛의 군세가 악마의 군세를 몰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3부대 지원. 엘리오스 님이 갑니다.”
‘좋고요.’
“선봉은 엘룬 나이트들이 섭니다. 사제들과 마법사들은 엘룬 나이트를 원호.”
‘아주 좋아요.’
“4부대는 성벽을 오르지 않습니다. 대기합니다. 대기.”
‘그거야, 지혜 누나. 바로 그거야.’
“7부대 휘하 마법사들은 성벽의 위를 공략, 성벽 위로 올라간 전사들은 저항하지 않는 바리안의 사제들은 보호조치합니다.”
‘욜로!’
점점 성벽이 아군의 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 보인다.
성벽의 외곽 쪽은 이미 정령들에 의해 무너져 내린 지 오래.
꾸역꾸역 밀고 들어가는 방패를 든 드워프들은 적들의 입장에서도 상대하기 까다롭게 보였다.
병과 자체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는 느낌.
적은 제대로 대응하고 대응하지 못했고 준비가 된 연합군은 무척 유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장관인데.’
함께 상황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작전부의 다른 인원들 역시 제법 놀랐다는 표정이다.
이렇게 원활하게 일이 진행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 어느 한쪽을 기점으로 저항하고 있는 이들이 있기는 하다.
-막아!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 최대한 밀어내다 보면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녀석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에 화살이 꽂혔다.
-아아아아아악!
녀석뿐만이 아니라 일반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
-커허어어억. 살려줘. 살려줘….
-어머니. 어머… 니….
-지휘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사제들은 도대체 뭘… 커헉!
-살려주세요. 살려….
-지원! 지원! 사제! 사제들은 어디있… 쿨럭.
혼란스러워 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지휘관의 부재.
물론 예브카리나 이후, 곧바로 인계가 되기야 했겠지만 그럼에도 혼란스러운 것은 변함이 없다.
사제들이 들고 일어났으니 유지력 자체도 문제가 있을 것이 분명.
여러 불안요소 중에서도 녀석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 멘탈일 터.
괜히 앞전에 대의와 명분을 가지고 있는 군대가 강하다 말한 것이 아니다.
머릿속에 의심을 품은 채로.
혹시나 자신들이 악마의 개수작에 놀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채로 검을 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녀석들 중 대부분은 단순히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뿐이리라.
뇌 속에 마구니가 든 채 싸우는 군대만큼 상대하기 쉬운 이들도 없다는 말이다.
“역시 명분이 있는 군대는 강하다니까.”
빛의 군세가 악마의 군세를 때려잡는 광경은 무척이나 흐뭇하게 느껴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