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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383화 (382/1,590)

# 383

회귀자 사용설명서 383화

성전(3)

대부분의 인간은 유약하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일수록 약해진다.

서로 죽이고 죽는 상황을 평범한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거야.’

그렇기 때문에 대의와 명분은 더욱더 중요해진다.

신을 위해서 싸운다.

나라를 위해서 싸운다.

가족을 위해서 싸운다.

따위의 생각을 하게끔 교육하는 게 바로 그러한 이유.

‘우리가 옳다’라는 명분 역시 마찬가지다.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와 침략하기 위해 싸운다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저들의 경우에는 대의와 명분을 잃었다.

중간 지휘관들은 나름대로의 사명감에 불타 열심히 소리치지만 저런 외침이 일반 병사들의 귀에 들어갈 리 없다.

전쟁의 시작부터 그 목적까지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

혹여나 자신들이 악마 소환사에게 속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미 뇌에 마구니가 낀 것이나 다름없다.

단지 공포에 질려 화살을 쏘아 보내는 것이 최선.

소리를 지르며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들은 오히려 양반이다.

싸우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부기지수.

수세에 몰릴수록 상황은 더욱더 악화된다.

눈에 보이는 효과와 팩트라는 건 이만큼 강력하다.

아마 현재 여신의 거울로 비치는 장면은 녀석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하리라.

-죽어!

-…….

-죽어! 이 변절자!

-……

-죽어어어!!!

예브카리나가 공화국의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비숍 사제를 바리안 님의 조각상으로 후려치는 장면은 이번 선전에서 백미 중 백미다.

한참이나 아군 병력이 들어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공화국 병사들이 보인다.

물론 앞 상황이 삭제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인간은 과정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어째서 악마 하수인 예브카리나가 비숍 사제들을 죽였을까.

그러 이유보다는 그녀가 그의 머리통을 후려친 상황 자체에 집중한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이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자극적인 기사나 뉴스, 찌라시에 낚여 불타오르는 현대인들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하물며 공화국민들은 찌라시 정보에 익숙하지 않다.

효과가 더욱더 클 수밖에 없다는 건 굳이 언급할 가치도 없으리라.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전장.

쉴 새 없이 명령을 하달하는 이지혜를 뒤로하고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자 열심히 활약하고 있는 파란의 길드원들이 보였다.

꽤나 무난하게 움직여주는 모습들을 보니 내가 다 자랑스러울 지경.

그중 조금 눈에 띄는 것은 박덕구였다.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뭔가 움직임이 평소와 같지 않은 느낌이다.

방패를 들고 앞으로 성벽의 위로 올라가기는 했지만 능력치답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간혹 토끼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고 전투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 가관.

오히려 옆에 있는 유아영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선배님. 앞! 앞!

-거, 알고 있다니까!

-살려…. 살려줘….

-…….

-움직여야 해요. 선배님! 선배님! 어디 상태 안 좋으신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지만….

-명령 떨어졌어요. 4부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고…. 지금 움직여도 되는 거죠?

-으… 응.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

확실히 우물쭈물거리고 있다.

전쟁의 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살려달라거나 어머니를 부르짖는 적군 병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 이 새끼.’

입술을 꽉 깨물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저렇게 어처구니없는 꼴을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완전히 적응할 거라고는 기대도 않았지만 그래도 중간은 해줄 거라고 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지경.

지금 당장 귀환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정도였다.

저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눈 먼 화살에 맞기 딱 좋으니까.

옥이야 금이야 키워놨더니 밥값도 못 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방구석에서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아들내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삼스럽게 왜 저래?’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다.

혹시나 정말 몸이 안 좋은 것이 아닌가 중얼거리다 문득 뭔가를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그동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이 새끼가… 경험이 있었나?’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녀석이 경험을 했던 장면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다.

간접적으로는 많이 봐왔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직접 손을 쓴 적은 없다.

내가 처음 손을 썼던 유석우 때도 눈을 꼭 감고 있었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자리를 슬그머니 피하기도 했다.

물론 같은 인간과 몸을 부딪친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직접적으로 마무리를 한 적은 없다.

‘진짜 없는 것 같은데?’

솔직히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륙에 들어온 이상, 누구라도 한 번쯤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운이 나쁘면 튜토리얼 때부터.

그게 아니라면 대륙에 들어온 이후가 될 수도 있다.

같은 인간이 아니더라도 인간형의 몬스터가 될 수도 있고 범죄자나 도적이 상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기억상 박덕구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없다.

그동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게 바보같이 느껴질 지경.

확실히 마음이 여리기는 여린 모양이다.

조금 더 앞으로 밀고 들어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쭈뼛대는 모습이 눈에 띈다.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는 모습.

속으로는 욕이 튀어나왔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센 척하는 돼지의 멘탈이 얼마나 약한지 대충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배님! 선배님!

-지, 지금 간다니까.

-지원이에요!

-으… 응.

그 정신없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멍청한 짓을 보고 있자니 속이 탄다.

결국에는 천천히 이지혜를 향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박덕구 외 유아영은….”

뭐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다.

“7부대는 전선에서 이탈해 항복한 이들과 사제 보호에 집중합니다. 최우선 사항입니다. 7부대는 전선에서 이탈해 항복한 이들과 사제들에 대한 보호에 집중합니다.”

“명령 전달 받았습니다.”

통제실에서 내려진 명령이 닿았는지 다시금 입을 여는 박덕구와 유아영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선배님!

-으응?

-명령 다시 떨어졌어요. 아까와는 내용이 다르고요. 전장에서 이탈해 항복한 이들과 사제를 보호하래요. 최우선 사항이에요.

-아. 그렇구만. 빠, 빨리….

-네. 위치 전송되고 있어요. 제가 앞장설까요?

-아니. 내가 앞장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럼 그렇게 해요.

-조심!

-아,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나마 조금 얼굴이 밝아진 것은 분명 내 착각이 아니리라.

하지만 조금 밝아진 그 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한 얼굴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어째서 갑작스레 저런 종류의 명령이 떨어져 내렸는지 대충 눈치챈 것이다.

박덕구와 유아영이 포함된 7부대의 본래 목적은 사제들에 대한 보호조치 따위가 아니다.

엄연히 관련 임무를 맡은 부대가 따로 존재했고 이미 사전 브리핑을 통해 공지한 내용.

7부대의 목적은 다른 부대가 성벽 위로 올라오는 것을 지원하는 일이다.

여신의 거울을 통해 상황에 맞춰 명령을 하달하겠다고 이야기를 해 놨으니 내가 자신의 꼴사나운 모습을 봤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전선이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면 녀석을 따로 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상황이 좋으니 할 수 있는 행동.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구니가 끼어 있는 악마의 군세는 점점 더 그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사제들이 전장에서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너무 쉽게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고민이 들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건가.’

애초에 에베리아 전선 쪽을 막고 있는 병력과 성벽은 속빈 강정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단순히 시간벌기 용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지만 버티기에 중점을 둔 전력이지 승리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다른 쪽에서 지원이 오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아니,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다.

전 대륙에 넓게 펼쳐져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는 전선, 많은 수의 유동 병력을 둘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가면쓰레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새끼들도 여유 있지는 않아.’

녀석들의 입장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캐슬락 공략.

가면쓰레기가 에베리아 전선을 버린 건지 버리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에베리아 전선보다 캐슬락 전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병력을 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 뭐,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쪽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만약 적 지휘관과 사제라인이 탄탄했다면 적들이 캐슬락을 공략하는 걸 두고 봐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

에베리아 전선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적 지휘관은 후퇴를 외치고 있고 실제로 철수하는 이들이 눈에 띄기 시작.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이들도 보인다. 죽음을 무릅쓰고 싸움에 가담조차 하지 않았던 사제들은 덤.

전투가 시작되고 나고 불과 8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전투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전선 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지혜 씨.”

“네. 그렇게 하세요, 명예추기경님. 저는 상황실에서 일을 마저 마무리….”

“그럼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전투의 승리를 발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귀가 울릴 정도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다.

전체적인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지휘부뿐만이 아니다.

일반 병사들 역시 승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점령되지 않은 지역보다 점령한 지역이 더욱더 많다는 게 대충 봐도 느껴질 정도.

이후 병력을 다시금 점검해 봐야겠지만 대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피해가 적은 것처럼 보였다.

‘이걸 어떻게 올라갔데?’

발걸음을 옮기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성벽.

생각보다 높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목도하니 감히 올라갈 엄두도 낼 수 없을 것 같다.

주변 병사들을 챙기며 계속해서 걸어가자 어느덧 덕구 녀석이 있는 곳까지 당도했다.

포로들, 사제들을 데리고 있던 녀석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지만 한 번 슬쩍 쳐다보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큰 의미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녀석에게는 질책의 뜻으로 받아들여진 모양.

기가 죽은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사실 한마디 해주고 싶기는 하지만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녀석이 아니다.

몇 가지 조언이나 나무라는 것 정도는 이후에도 할 수 있는 일.

지금은 그녀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본래는 비숍 사제 역할이었지만 그분이 죽어 버렸으니 할 수 없이 대리인을 세울 수밖에 없다.

교화된 악마 하수인이라면 선전효과도 충분할 것 같고 모르는 사람한테 맞는 것보다는 아는 사람에게 통수를 맞는 게 가면쓰레기의 입장에서도 조금 더 얼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퍽거리는 소리와 감각이 기분 나쁘기는 했지만 내 쪽으로 조용히 다가온 김창렬을 보니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살아 있습니까?”

“네. 부길드마스터. 살아 있습니다.”

“그거 참 다행이군요. 혹시 상태는 조금 어떻습니까?”

“아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응급처치가 잘 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안정을 취한 이후에는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좋네요. 아. 지금 한번 봅시다. 방 안에 있습니까?”

“네.”

김창렬이 방으로 안내하였다.

언제 봐도 실력은 혜자스럽다.

특히나 본인이 응급처치를 했다는 건 박수를 쳐줄 만한 부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세심하게 챙겨주는 부분이 마음에 든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머리가 깨진 채 죽어 있는 비숍추기경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침대에 보인 것은 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예브카리나.

뺨을 툭툭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군… 사님…?”

“아쉽지만 명예추기경입니다, 예브카리나 님. 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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