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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384화 (383/1,590)

# 384

회귀자 사용설명서 384화

이기는 자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1)

“군… 사님…?”

“아쉽지만 명예추기경입니다, 예브카리나 님. 하하핫.”

다채로운 표정이 제법 재미있었다.

아직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았는지 천천히 손을 뻗는 모습은 가관.

하지만 의식을 찾으면서 진청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닮기는 닮은 건가.’

생김새는 확연이 다르지만 체형이 비슷하다 보니 그렇게 느낄 만하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몽롱했을 테고, 김현성이 나를 가면쓰레기로 오해할 뻔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확실히 실루엣 자체는 닮은 모양.

녀석의 모습을 떠올려 봐도 가면을 씌워 놓으면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항상 진청쓰레기와 함께 다녔던 그녀도 저런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무튼 간에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당연지사.

보고 싶었던 군사님 대신 이죽거리는 나를 보았으니 저런 표정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아주 오랜만에 보는 얼굴.

이 대륙에 들어온 이후에 저런 얼굴을 보는 건 꽤나 오랜만이다.

엘레나의 경우에는 구역질을 해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얼굴 한편에는 존경심과 함께 알 수 없는 동경심이 묻어나 있었다.

하지만 예브카리나의 얼굴은 전혀 다르다.

호의적인 감정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봐도 적의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상대하기 싫은 쓰레기를 바라보는 것 같다. 길거리에서 개똥을 밟아도 저런 표정을 하지는 않는다.

조금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패배자의 입장이었다면 제법 열이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승자는 관대해지는 법이다.

‘암. 나는 관대하지. 그렇고말고.’

“하하하. 재밌는 표정이군요. 그렇게 죽을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오히려 당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입니다. 조금은 감사하셔도 됩니다. 물론 여기 있는 우리 창렬 씨에게 인사하는 게 먼저겠죠.”

“…….”

“뭘 그렇게 죽일 것처럼 보고 그러십니까.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 아닙니까. 이렇게 편히 있을 수 있게 도와주고… 다른 포로들과는 다르게 당신은 특별취급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하는 게 예의 아닙니까, 카리나 님. 그렇지 않습니까? 창렬 씨?”

“예. 부길드마스터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까.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세요. 아니면 음… 몸이 아직도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포션이라도 한 병 챙겨드려야 했나?”

실실 미소를 띄우며 이죽거린 것은 당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없다.

심지어 최대한 이쪽을 경계하며 노려본다. 그다지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퉤!”

끈적거리는 뭔가가 얼굴에 묻은 것은 바로 그때.

“…….”

“…….”

순간적으로 김창렬이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내 손짓에 멈춰 섰다.

얼굴을 천천히 매만지니 그녀의 침이 맞는 모양.

사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더러운 인간.”

“하하. 한국 속담 중에서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는데…. 뭐, 러시아까지 통용되는 말은 아닌가 봅니다. 물론 지구에서의 이야기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는 나라에서 태어난 저로서는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이토록 포로를 신사적으로 대우하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 신사적인 행동에 대한 보답이 겨우 타액이라니 이거 조금 슬퍼지려고 합니다, 예브 카리나 님.”

“쓰레기 같은 놈.”

“어떻게. 우리 악마 소환사 진청께서는 안녕하십니까? 라이오스 때 이후로 한 번도 뵙지 못했는데. 사실 그분 때문에 그동안 제가 제법 힘들었습니다. 자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에베리아 왕국에 있었던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요. 몸이 부서질 정도로 악마를 막았지만… 아, 창렬 씨는 이제 나가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사태가 대충 정리될 때까지는 이곳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대로 전파하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감사합니다, 창렬 씨.”

뭔가 조금 걱정하는 얼굴이었지만 현재 그녀의 상태를 보고서는 안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런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김창렬을 내보낸 것이다.

아무리 내 능력치가 높지 않다고 한들, 이제 막 깨어난 마법사를 제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괜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김창렬이 살짝 방문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잠깐이었지만 밖에서 들린 잡음들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빛의 승리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것은 모두가 함께 이룬 승리입니다. 공존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고 미래를 향한 도약입니다. 베니고어 여신님과 엘룬 님의 승리이며 이종족 연합의 승리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무래도 밖에서도 선전 활동에 힘을 쓰고 있었던 모양.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지혜의 것이다.

그사이에 전투가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이리라.

슬쩍 앞을 바라보니 씁쓸해하는 예브 카리나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보고 예상은 했겠지만 막상 저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은 가관이었다.

내가 하기는 싫지만 남이 짓는 것은 매번 봐도 즐거운 표정이다.

“네. 뭐, 전투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무의미한 피가 더 많이 흘렀을 겁니다. 공화국의 사제님. 아, 저기 머리가 으깨진 채로 누워 있는 비숍 상급 사제님이 아니었다면 일이 조금 더 어렵게 진행됐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신을 위해 순교하신 분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좋으신 분이었는데 말입니다. 너무 아쉽게 가신 것 같아 저도 마음이 아프기만 합니다.”

“…….”

“바리안 님의 석상으로 머리를 후려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정말 대단했습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보고 있는 제가 오금이 다 저릴 정도였는데 말이죠. 공화국의 마법사들은 근접 전투훈련을 따로 받는다는 소문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도 했고요. 어떻게, 둔기술이라도 따로 배우신 겁니까?”

“…….”

“사람이 질문을 던졌으면 대답하는 게 예의가 아닙니까, 예브 카리나님. 아! 혹시나 해서 말씀입니다만 당신의 둔기술을 다시 한번 펼칠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방금 뜨끔 하신 겁니까? 하하.”

“죽여.”

“뭘 또 죽이라고 하고 그러십니까. 신에게 선택받은 사제가 살인 같은 일을 쉽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아무리 악마의 하수인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같은 생명이 아닙니까. 베니고어 여신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너그러운 편입니다. 물론 바리안 님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내가 입을 열 것 같아?”

“당신이 알고 있는 싸구려 정보도 물론 탐이 나기는 하지만 정말로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잠깐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게 전부입니다. 네. 정말로 그게 전부예요. 어떻습니까? 예브 카리나 님. 이번 전쟁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

“말하기 싫으시면 듣고만 있고 계셔도 됩니다.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터뷰를 따서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사용하는 치졸한 짓거리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사기꾼 자식. 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베니고어 여신님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혼란스러운 건 이해하지만 제가 정말로 사기꾼이었다면 엘룬 님과 베니고어 님께서 저를 사자로 선택하셨겠습니까? 가장 마지막에 거짓말을 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사람을 사기꾼이라 칭하시다니요. 신벌이 무섭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아! 신벌이 무서웠으면 애초에 악마 소환사의 밑에 있지도 않았겠군요.”

“네가 꾸민 이야기라는 건 다 알고 있다. 더러운 놈. 군사님께는 죄가 없어. 이제는 네가 어떤 인간인 줄 알아. 너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고 구제 불능이야. 너를 조금이라도 믿은 게 내 최고의 실수야. 재밌어? 사람들을 속이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면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이 느껴져?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사기꾼이지. 지금은 네가 이렇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네 거짓에 대한 대가를 꼭 치를 거다. 역겨운 쓰레기 자식. 내 말을 잘 기억해. 너는 분명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서늘한 팩트가 날아 들어와 꽂힌다.

가슴속에 날아 들어온 묵직한 한 방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당황스러울 정도.

조금이지만 가슴이 뜨끔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금 섭섭하군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말을 해줄까? 내가 네깟 놈한테 목숨을 구걸하며 벌벌 길기라도 할 줄 알았어? 죽이든 고문하든….”

“아, 그런 야만스러운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혹시나 육체적 고통에 대한 걸 걱정하시고 계신다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당신은 죽지도 않을 거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지도 않을 겁니다.”

“회유가 통할 거라면 사람 잘못 짚었어. 빌어먹을 사기꾼 새끼. 나는 짐승이랑은 같이 일하지 않거든.”

“계속 그렇게 아픈 곳을 쿡쿡 찌르시는군요. 안 그래도 방금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팩트로 후려치는 솜씨가 제법이십니다, 이거. 하하.”

“퉤!”

“어이쿠! 두 번째는 맞아드리지 않습니다, 카리나 님. 조금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원하는 건 대화라고요. 적어도 여섯 시간 안에는 이야기가 잘 끝났으면 좋겠는데… 음…. 내키지는 않지만 서로 조금 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 앞전에 말씀하신대로 저는 빌어먹을 사기꾼자식입니다.”

“네 입으로 들어봤자 놀랍지도 않아. 너는!”

“전부 다 맞습니다. 네. 개새끼도 맞고 빌어먹을 쓰레기도 맞습니다. 저도 그다지 합리화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충분히 그렇게 느끼실 수 있다는 것도 일부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대가를 치르지는 않을 겁니다. 예브 카리나 님.”

“뭐?”

“대가를 치르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린 나이도 아니신데 아직도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으면 쓰나요. 하하. 대가는 패배자들이 치르는 거지 승자의 몫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여기에 있고 당신은 지금 숨을 헐떡거리며 침대에 앉아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승자는 누구고 패자는 누구일까요? 누가 봐도 각이 나오지 않습니까?”

“…….”

“권선징악이라는 건 소설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예요. 아! 물론 제가 징벌당하는 쪽이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브 카리나 님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시니 이해하시기 편하게 예를 든 것뿐입니다. 애초에 이런 종류의 전쟁에 선과 악이 있기는 합니까? 나쁜 놈, 착한 놈이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이념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를 뿐이지요.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 전쟁은 공화국이 먼저 일으켰다는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닙니다.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어요. 분명히.”

“…….”

“그걸 알면서도 교국이 먼저 침략을 어쩌고저쩌고 선전활동을 한 것은 그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사기꾼이라면 당신도 사기꾼입니다. 물론 제가 조금 더 악질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같은 부류라는 말입니다.”

“개, 개소리 집어 치워! 미친 자식!”

“대가는 저 같은 사람이 치르는 게 아니라 제 말에 휘둘리는 사람들이나 하는 겁니다, 카리나 님. 이미 알 거 다 아시는 분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네요. 대…대가를 반드시 치를 거야! 반드시는 개뿔.”

“…….”

“다시 한번 머릿속에 저장해 놓으세요. 이기는 사람은 대가를 치르지 않습니다. 저희가 살던 곳이나 대륙이나 그건 똑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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