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
회귀자 사용설명서 385화
이기는 자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2)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예브 카리나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미 그녀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다.
심지어 저기 저쪽에 누워 있는 바젤 추기경도 알고 있는 이야기.
그저 다시 한번 머릿속에 박아 넣어준 것뿐이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이기는 사람은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진리.
이 얼마나 심플한 법칙인가.
‘아암 그렇고말고. 무조건 그렇지.’
이 말보다 더 깔끔한 문장도 없다.
온갖 말로 권선징악에 대해 포장해 봐야 어차피 우리 삶은 저런 식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거다.
눈앞에 있는 예브 카리나 역시 내 말에 공감하고 있는 모습.
그저 입술을 꽉 깨물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저런 반응은 공감한다는 것과 진배없다.
한 번 더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대화를 지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
“대답하기 싫은 것 같다만…. 뭐, 긍정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조금 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우리 같은 이들은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이라고요. 만약 예브 카리나 님이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셨다면 대가를 치르는 건 제가 됐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아쉬우시겠습니다. 푸핫.”
“나는 당신이랑 달라. 넌…. 넌 쓰레기야.”
“동족혐오?”
“나는 너 같은 쓰레기가 아니야! 비열한 사기꾼 자식.”
“자꾸만 사기꾼이라고 하시니 기분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만, 제가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카리나 님. 신성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요. 하핫. 진청 그자가 악마소환사라는 것도 정황상 맞는 이야기고 말이죠. 도대체 당신과 내가 한 거짓말에 어떤 차이가 있길래 이렇게 열을 올리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해 선동과 날조를 일삼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전쟁터로 끌고 오는 것에 동조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보면 당신을 비롯한 공화국의 수뇌부들이 더 악질적입니다. 저야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변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신들은 본인들을 합리화할 수단조차 부족합니다. 먼저 시비를 건 것도 그쪽,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도 그쪽, 선전포고를 먼저 한 것 역시 그쪽입니다. 누가 쓰레기고 누가 사기꾼이라는 겁니까?”
“개소리 같은 궤변은 집어 치워! 이 쓰레기 같은 인간. 나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게 아니야. 네, 네 수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야. 당신은 최소한의 윤리의식이라는 게 결여되어 있어. 대륙법과 전쟁규정이라는 게 괜히 생겨난 게 아니야. 비, 비숍 상급 사제님은 그럴 만한 사람이….”
“화려한 둔기술에 뚝배기가 깨져나간 비숍 사제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나 참. 혹시나 오해하실까 봐 하는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전쟁 규정법을 어기면서 활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괜찮은 포도주를 한 병 선물했을 뿐이에요.”
“내가 하는 말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
“너도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알고 있잖아, 예브 카리나. 나는 전쟁 규정법 같은 걸 어긴 적이 없어. 설사 내가 비숍 상급 사제를 뒤에서 조종했다고 한들 규정법에 어긋난 것도 아니라는 걸 알잖아. 합리화하고 있는 건 너야. 내가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 속으로 자위해 봐야 네 처지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으니까. 그러니 나를 매도하고 있는 거야, 너는.”
“퉤!”
“그렇게 해야 네 기분이 조금 더 풀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애초에 네가 정말 나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면 이 전쟁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야. 깊은 숲속에 처박혀 윤리 공부에나 열을 올리고 있겠지. 결국엔 너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거야.”
“나는 공화국 병사들과 군사님을 위해서!”
“아….”
“…….”
“…….”
“아하. 역시 그랬군요. 하하하.”
“뭐? 너 지금….”
“혹시나 했는데 정말인가 봅니다. 방금 말은 거짓말이 아니지요. 그렇지요?”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
“뭐, 방금 제가 드렸던 말은 전부 농담이라는 겁니다. 굳이 혼란스러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당신은 저랑 확실히 다른 인간입니다. 인정하겠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에요.”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얼굴이다.
예브 카리나는 나나 이지혜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고유기벽과 성향이 항상 정답을 이야기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예브카리나는 확실하게 나와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너는 책임감이 강한 프렌즈구나.’
말 그대로.
갑작스레 달라진 내 태도에 얼굴이 구겨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
초조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니 방금 본인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예컨대 조금 전 궤변은 그녀를 흥분시키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약점을 잡기 위한 대화. 그녀를 다룰 수 있는 수단을 얻기 위한 재료였다.
“정말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음. 확실히 그렇겠군요. 왜 악마소환사 진청이 당신을 이 자리에서 기용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황이 흘러가지 않았다면 제법 귀찮게 됐겠네요. 병력 피해를 최소화하고 야금야금 이득을 보고 버티셨을 테니까. 당신의 목적은 전장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에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뭐, 뭐?”
“당신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악마소환사는 당신에게 승리하는 걸 기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버티면서 엘프들을 붙잡아 두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거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투를 피하고 싶어 하는 성향도 보이시는 것 같고. 말 그대로 캐슬락 공선전이 끝날 때까지 이 전선을 유지하고 버텨주는 것밖에 바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그 임무를 완전히 망쳐 버리셨네요. 뭐, 제가 에베리아 왕국에 체류 중이라는 걸 모르고 계셨을 테니 대충 이해는 가지만 악마소환사의 입장에서는 제법 아쉽게 느껴졌을 겁니다. 어?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그러십니까. 악마가 당신에게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건 당신도 대충 눈치채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지원군이 오지 않았던 거예요.”
사실은 조금 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아마 예브카리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야. 현재 전선….”
“전선에 여유가 없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굳이 이곳까지 올 상황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고요. 당신이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큼, 그 사람은 당신을 생각하지 않나 봅니다. 슬프죠. 일방적인 사랑만큼 가슴 아픈 것도 없어요.”
“네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네. 물론 배신하지 않으시겠죠. 하하하.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 저는 지금 무슨 저급한 이간질 같은 걸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방금은 성격 나쁜 저의 장난으로 생각해 주세요. 뭐, 당신과 이 병력이 버림받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디까지 팩트긴 하지만! 그런 걸로 사람 멘탈을 흔드는 저급한 술수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빛의 선택을 받은 사자로서 적절한 행동이 아니죠. 암. 그렇고말고요.”
“…….”
“조금 더 합리적인 방법이 있는데 제가 왜 괜히 생고생을 하겠습니까.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만, 사실은 저기 누워계시는 비숍 상급 사제님이 해주셔야 했을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자리 하나를 미리 마련해 놓기도 했고요. 무척 중요한 자린데… 누군가가 소중한 사제님의 뚝배기를 박살내 버린 탓에 마련해 놓은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렸지 뭡니까. 버림받아 슬픈 마음은 이해를 합니다만 그래도 일은 해줘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죽여.”
“이야기도 듣지 않으시는 겁니까?”
“네가 어떤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아. 그냥 죽여.”
“왜 자꾸 죽이라고만 말씀하십니까.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결정하셔야죠.”
“죽여! 차라리 죽!”
“포로가 상당히 많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 항복하신 분들이 제법 많아요. 함께해 주시는 우리 바리안 님의 사제님들도 마찬가지고.”
“당신….”
“이거 참. 처치 곤란입니다. 포로가 많다는 건 저희 쪽에서도 꼭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유사시에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적 병력이기도 하고, 많은 포로를 책임질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도 일입니다.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같은 사제답지 못한 생각을 해버렸지 뭡니까. 잘은 모르지만 중국 역사 중에서도 장평대전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항복한 30만의 병력을 그대로 생매장해 버린 사건 말입니다. 이건 우리 악마소환사님이 더 잘 알고 있겠군요.”
“개자식….”
“물론 저는 그런 일을 벌일 정도로 쓰레기는 아닙니다만,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혹시라도 일이 잘못 됐을 경우에는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할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개자식! 네가 인간이야?!”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건 예브 카리나 님이 더욱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정치적으로 잃는 게 많을 겁니다.”
“개자식! 쓰레기 같은 새끼!”
“아무리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고는 해도 회개하려하는 이들을 저버리는 건… 가슴이 아프겠죠. 정말로 그런 짓을 해버린다면 후의 역사서에서도 저를 좋게 평가하지는 않을 거고요. 무엇보다 제 양심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예브 카리나 님. 저는 양보하지 않아요.”
“…….”
“저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피하는 건 상대방이 해야 할 일이지 제 일이 아닙니다. 저는 결정을 내렸으니 양보하는 건 당신이 되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제 눈을 보세요.”
은근 슬쩍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혐오감이 깃들어 있는 표정은 아주 천천히 공포로 물든다.
“제가 못할 것 같습니까?”
“…….”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 분명히요. 당신이 만약 제 제안을 거절한다면 저는 포로의 반을 버릴 겁니다. 당신은 악마의 하수인으로 처형될 거고 적당한 사람을 찾은 이후 똑같은 제안을 한 번 더 할 거예요. 물론 후임분도 거절한다면 남은 포로의 반을 버릴 거고요.”
“당신…. 당신이라는 사람은….”
“억지로 끌려온 이들이 아닙니까. 예브 카리나 님. 웃으면서 고향에 돌려 보내줘야죠. 어쩌다가 전쟁터에 끌려오기는 했지만 저 사람들도 전부 남의 집 귀한 자식들입니다.”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빤히 얼굴을 바라보자 흔들리고 있는 동공이 눈에 보인 것은 당연.
속으로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따로 일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본인의 역할이 무엇일지는 이미 예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선택을 조금 편하게 해드려야 하나…. 일단 포로 중에 악마의 하수인이 있는지 색출부터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삼분의 일 정도는 악마에게 오염 당했을 확률이 높아서… 이런 분들은 빨리 정화작업을 거쳐야지요. 네. 그렇고말고요.”
“자, 잠깐.”
“결정하셨습니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
하지만 이미 반쯤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여러 가지로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
흔들리고 있는 눈이 그렇고 달짝 거리는 입술이 그렇다.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그렇고 거칠어지는 호흡이 그렇다.
“저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결정타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용히 말하자 효과가 있는 모양.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악마 같은 인간.”
“어허. 그거 신성모독입니다. 예브 카리나 님.”
반쯤은 혼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