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
회귀자 사용설명서 386화
이기는 자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3)
“확실히 까다롭군요.”
“네, 군사님. 아무래도 성벽 자체가 마력방어에 워낙 특화되어 있다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교국의 무녀가 펼치고 있는 결계도….”
“공략하기 쉽지 않겠죠.”
“네. 순수한 공성전밖에는 답이 없는 상황입니다. 강한 물리적 충격을 줄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드래곤이라도 오지 않는 한 성벽 자체를 무너뜨리기 힘들 겁니다. 캐슬락 안쪽의 보급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면 아마 시간이 더욱더.”
“오래 걸렸겠죠. 아군 병력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몇 차례 문을 두드려 본 것치고는 피해가 적습니다. 저들 역시 최대한 화살을 아끼고 있는 터라….”
“캐슬락은 중요합니다.”
“…….”
“하지만 모든 걸 쏟아 부을 정도는 아닙니다. 린델이나 수도로 가는 길은 동부전선만이 아닙니다. 실리아 전선 쪽은 어제부로 완전히 밀어냈고… 다완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 그대로 캐슬락은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걸 쏟아 부을 정도는 아니다.
말하자면 캐슬락 전선은 누구나가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파이.
이 커다랗고 중요한 전선을 가장 완벽한 미끼로 만들어내기 위해 쌓아올린 시간을 생각하니 감회가 무척 새로웠다.
적, 아니, 심지어 아군조차 눈치챌 수 없게 설계된 이 커다란 그림은 진청 군사님의 수완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스레 느끼게 해주었다.
병력 이동이나 현 전선을 커다란 지도로 한눈에 들여다본다면 그 누구라도 공화국이 캐슬락을 노리고 있다 판단하리라.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던 과거에도 캐슬락은 항상 공화국의 걸림돌이었고 교국에게는 뚫리지 않는 철벽의 요새였다.
타 동부 전선이 모두 공략 됐을 때도 항상 캐슬락을 얻을 수는 없었고 역사적으로도 캐슬락은 곧 일종의 상징처럼 자리 잡혔다.
‘뚫어낸다면….’
반대로.
‘뚫리지만 않는다면….’
그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물론 캐슬락을 단순한 상징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여전히 캐슬락은 교국과 공화국 사이에 있는 가장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고 이곳을 얻음으로써 생기는 이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컸으니까.
동부 전선에 병력을 밀어 넣자 캐슬락을 지키기 위해 네임드들이 자리 잡은 것 역시 그러한 이유.
교국 8좌 중 세 명이 이 작은 성을 지키기 위해 자리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교국이 자랑하는 주요 병력 역시 일치감치 캐슬락에 똬리를 틀었다.
한쪽에 투자한 만큼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투자하는 병력의 질과 양이 주는 건 자연스러운 일.
캐슬락은 단단해졌지만 중요하지 않은 지역들은 그만큼 물렁해졌다.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다.
크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들을 보는 것이 그의 방식.
캐슬락으로 들어가는 보급을 차단하고 타 지역에서 오고 있는 지원군을 자른다.
동부 전선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점수를 따기도 하고 심지어 일부 지역을 내주기도 한다.
한 번, 한 번은 무척 작다고 할 수 있지만 모아놓고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다.
상대 입장에서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은 분명한 일.
하지만 공화국의 의도대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캐슬락이 뚫리면 그 다음은 린델, 그 다음은 수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전체적인 전장의 흐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
아마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이 상태가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변수가 없는 한은.
‘그래. 변수가 없는 한.’
하지만 최근 에베리아의 상태에 대해 떠올리자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는 이후에 따로 날아온 서신이 없었기 때문.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본대에서도 따로 정찰조를 보냈었다.
물론 이것이 과민방응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통신체계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이곳에서 각 상황마다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물론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긴 하지만 거리가 거리인 만큼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통신병이 잡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별일 없을 거야.’
틀림없이 별일 없을 것이다.
속으로 자위하고 있지만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것이 사실.
한 번 더 고개를 흔들고 옆을 바라보자 시야에 비친 것은 자신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 광경을 보고서는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얼룩져 있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거,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군사님. 그자가 에베리아 전선에 있었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카티아.”
“표정이 어둡습니다, 군사님. 작전부는 에베리아 전선이 쉽게 뚫리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고요. 이기영 명예추기경, 그자는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남을 기만하고 선동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인물이라 군사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변수에 따라서 조금 더 달라질 수도 있다고 예상하고 있습니다만 언니는 절대로 어처구니없게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려 하기도 하고요.”
“저도… 걱정이 됩니다. 안 된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죠. 사실 그래서 언니를 말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마! 아마! 언니 역시 군사님의 뜻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이해하기도 했고요. 언니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니까요. 믿고, 결과를 기다리시면 됩니다. 분명히 좋은 소식을 전해주실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겠죠. 카티아, 당신은 괜찮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네…. 아무 문제없습니다. 언니가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요.”
솔직히 초조한 마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버틸 수 있을 거야.’
그 누구보다 자신이 그녀를 가장 잘 알고 있다.
애초 병력의 구조상 단기간에 뚫어낼 수 있다고 하기는 힘들다.
사제 비율이 높았고 비숍 상급 사제가 함께 하고 있는 성벽이다.
마음이 약해 모진 일을 할 수 있는 성격은 못 되지만 언니 역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쉽게 당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린애처럼 동요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 전선에서 전투가 지속되고 있다.
에베리아 전선만 특별취급해서는 안 된다.
힘든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
최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베리아 전선의 역할은 시간을 버는 것 외에는 없어. 지금은 동부 전선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게 맞아.’
서부 전선은 마법사 증원을 요청했고 북부 전선 역시 사제를 필요로 하고 있다.
보급부대가 원활하게 돌아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모든 전선을 컨트롤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루에도 손으로 셀 수조차 없는 숫자의 병력이 죽어난다.
지금껏 조용했던 에베리아 전선도 이제야 막 전투에 합류했을 뿐이다.
그렇게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던 바로 그때였다.
갑작스레 문이 열리며 작전부의 일원 한 명이 들어온 것.
“군사님.”
“말씀하셔도 됩니다.”
“에, 에베리아….”
“네.”
“에베리아 전선이 무너졌습니다. 혀, 현재 정확한 피해 규모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병력이 포로로 붙잡힌 것으로 보이며 현재 캐슬락 쪽을 향해 진군할 준비를 해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
“…….”
“뭐, 뭐라고요?”
“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카티아 님.”
“어, 어떻게….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자세한 정황은 알지 못합니다. 퇴각하던 병력 역시 모조리 발목이 묶인 것으로 보이며… 따, 딱히….”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요!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안 좋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냉정해질 수 있을 리가 없다.
적들의 입장에서 이건 공성전이다.
아무리 마법으로 단기간에 세운 가벽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무너질 만한 성벽이 아니다.
병력의 규모와 질을 생각해 본다면 이토록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일이 진행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 쉽게 전투가 끝났다고요? 말도 안 돼요. 뭔가 착오가 있을 겁니다. 소식을 전해온 이들이 누구죠? 귀환을 마친 정찰 부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현재….”
“그들을 이쪽으로, 아니,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정확히 어떤 걸 봤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카티아 님!”
허겁지겁 문을 열고 뛰어든 것은 당연지사.
깜짝 놀란 병사들의 얼굴이 보였지만 신경 쓸 수 있을 리가 만무.
정찰대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많은 이들이 몰려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레인저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직접 들어야겠습니다.”
“가까이 오시면 안 됩니다, 카티아 님.”
“무슨 소리를!”
“현재 에베리아 전선에서 보내온 물건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는 도중입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비키세요! 지금 당장!”
“저주가 묻어 있는 아티팩트 일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아니,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정신이 없다.
계속해서 머릿속으로는 안 좋은 생각이 들기 시작.
괜스레 손이 덜덜 떨려오는 것은 물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누군가가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그때.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까지 방에 있었던 진청 군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덤.
묘하게 안심되는 목소리에 망치질 하듯이 두근대는 심장이 조금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티팩트라면 제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명령입니다. 물러나도록 하세요.”
“하지만.”
“명령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함정을 해체를 할 수 있는 레인저들과 마법사들이 물러나는 것은 순식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봉투에 담겨져 있는 서신과 긴 막대 모양을 한 정체불명의 장치였다.
“군사님, 이건….”
“해를 끼치는 종류의 아티팩트는 아닙니다. 아마 그들의 말로는 여신의 거울, 마력 홀로그램 장치일 가능성이 큽니다. 1회용으로 보이며… 한 번 실행되면 자동적으로 폐기되는 구조입니다. 다른 함정이나 마법적인 효과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그게 마력 홀로그램이라면 저희 측에서도 활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뇨. 불가능합니다. 영상을 송출하는 컨트롤 타워가 없으니까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히 일방적인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보다 이게 에베리아 전선에서 보내온 물건이 확실합니까?”
“네. 정확히는 저희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정황상 에베리아에서 보내온 서신이라고 판단해서….”
“아마 메시지겠군요. 마력을 조금 집어넣으면 곧바로….”
그렇게 군사가 천천히 장치에 마력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반투명한 막이 막대 위에서 떠오르기 시작. 시야에 비치는 것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언니, 예브 카리나의 모습이다.
곧이어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아아. 지금 시작해도 되려나? 보고 있습니까? 보고 있는 거 맞아요?
천천히 옆으로 자리를 옮긴 채 털썩 주저앉는 모습은 가관.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언니와 장난치듯 그 옆에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녀석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무사히 닿았으면 좋겠는데. 아… 일단은 자기소개부터 드려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간단히 자기소개 좀 해주시겠습니까?
-33살… 예브… 카리나입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