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
회귀자 사용설명서 387화
이기는 자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4)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은 물론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다. 마력 홀로그램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면 속의 사람은 틀림없이 언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은 물론 바들바들 떨고 있다. 심지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
어떻게 저렇게 된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에베리아 전선이 완전히 망가졌고 저 빌어먹을 개자식은 언니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있다.
의문점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리라.
‘조작된 거야.’
조작된 내용인 거야.
어쩌면 현실을 마주하기 싫을 수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다른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장면이 거짓말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화면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기소개 잘 들었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 그래도 조금 부족할 것 같은데… 본인이라는 걸 조금 더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몇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가시간에는 보통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십니까?
-독서… 입니다.
-조금 의외네요. 이곳에 온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7년 전입니다.
-좋아하는 음식은?
-스튜.
-으음.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녀의 모습이 조작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아실 겁니다. 의심이 많은 여러분을 위해 조금 더 이런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어서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저는 26살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직업은 신의 사자. 취미는 신학 공부. 특기는 기도 드리기입니다. 아마 제 얼굴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그렇지요? 예브카리나?
-네. 그렇습니다.
-아아. 몇 명이서 이걸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부터 여러분이 여신의 거울로 보실 장면은 조금은 자극적일 수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자리를 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악마소환사 진청에게 보내는 메시지지 다른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본 영상을 불법복제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저희가 가지고 있는 컨트롤 타워에서 송출 허가를 내줘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아실 겁니다. 마력 홀로그램에 장난을 치려는 시도도 의미가 없을 거고요. 어차피 아티팩트는 1회용입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10초를 센 이후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지금부터 보시게 될 장면은 자극적인 장면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 예브 카리나 님은 일어나셔서 준비하셔야죠.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안 좋은 생각이 스쳤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기도 전에 진청 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십! 구! 팔! 칠!
“다른 분들은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역시 명령입니다.”
“알겠습니다.”
“저, 저도 봐야겠어요, 군사님. 아니 제 눈으로… 직접 봐야 해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남아 있게 해주세요. 제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불안하기는 하지만 목도할 수밖에 없다.
직접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고 내가 감내해야 할 일 이었으니까.
-일. 자! 그럼 본격적으로 대화를 해 봅시다.
“어?”
-예브 카리나 님도 다시 앉아주시고요. 하핫. 방금 깜짝 놀란 거 맞으십니까? 어허 참. 혹시 제가 예브 카리나 님께 이상한 짓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저한테 낚이신 겁니다. 이렇게 보여도 저는 명색이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비도덕적인 일은 최대한 지향, 아니, 지양하고 있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을 해코지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
-하지만 이 마력 홀로그램은 진청 군사님께서만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봐서 굳이 좋을 건 없으니까요. 남몰래 보낸 연애편지 같은 걸 다른 이들이랑 함께 본다면 편지를 보낸 제 입장이 뭐가 되겠습니까? 뭐, 사실 공화국 친구들과 함께 봐도 전혀 상관은 없지만 가급적이면 혼자 보시는 걸 추천드린다는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네. 지금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조금이지만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게 맞아요.
-…….
-제가 쓸데없는 구설수에 휘말리는 걸 싫어해서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해놓았습니다만… 만에 하나 이 영상이 전 대륙에 퍼져나가도 저는 별로 손해 볼 게 없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미친 자식….”
“…….”
분하지만 그의 말이 맞다.
만약 이 영상을 전 대륙으로 뿌린다고 해도 현재 흘러가고 있는 여론 전체를 뒤흔들 수는 없으리라.
-자. 그럼 제가 왜 갑자기 이런 영상을 찍어 우리 악마소환사님께 보낸 걸까요. 크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조금 더 나오는 게 있겠지만 일단은 두 가지만. 첫 번째는 예브 카리나 님이 제 손에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
-아주 감사하게도. 예브 카리나 님은 저희 신성연합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해 주셨습니다. 악마의 하수인으로 살았던 지난날을 참회하고 빛을 위해 싸워주시기로 아주 단호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아무래도 예브 카리나 님이 그동안 당신을 꽤나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진청 군사님 같은 건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 같지만 그와는 별개로 제가 군사님의 여자친구를 빼앗은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기는 합니다. 물론 이건 농담입니다. 너무 심각하게 신경 쓰지는 마세요. 중요한 것은 현재 그녀가 저와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니 그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 예브 카리나 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의 포부라도 밝혀주도록 해주세요.
-…….
-뭐 하고 계십니까. 앞으로의 포부를 밝혀주셔야죠.
-저, 저는….
-네네.
-저는 지, 지난 악마의 하수인으로 살았던 지난 과오를 회개하고 이,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성은을 입어 다… 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이제는 다시는 어둠의 진영에 서지 않을 것이며 빛의 진영에 앞장서 악마의 권세를 몰아내는 것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조금 더 단호하게!
-저, 저는 빛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베니고어 여신님의 편에서 공화국의 악마 무리들을 구원하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진심이 아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만으로도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군사님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잘했습니다. 우리 예브 카리나. 아주 잘했어요. 뭐,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린 건지 아주 잘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자, 그럼 하나는 끝났고… 나머지 하나가 더 남았군요. 사실은 앞전에 말씀드린 이유는 구색 맞추기에 불과합니다. 개인적으로 제 수완에 대해 자랑하고 싶기도 했고… 이런 종류의 메시지를 보낼 때 이유가 겨우 하나라면 조금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코너를 만들게 됐습니다. 겸사겸사 속도 뒤집어 놓을 겸.
-…….
-물론 본격적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건 일종의 선전포고입니다. 공화국도 교국 쪽에 선전포고를 했으니 저 역시 그에 대한 대답을 들려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사실은 경고의 의미가 더 큽니다. 저희 연합군은 지금부터 공화국의 심장으로 들어갈 겁니다. 네. 그 말 그대로예요. 현재 이곳에 있는 이종족들과 함께 곧바로 공화국의 수도로 진격할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로서는 가장 전쟁을 빨리 끝날 수 있는 쪽이 그쪽이라 판단하고 있는데. 쓸데없는 희생은 최대한 배제하고 싶거든요. 모두 신과 나라를 위해 일해주신 일꾼들인데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는다니 어떻게 생각해도 아깝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요. 우리 군이 공화국의 심장을 찌르는 건 불과 20일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네. 정확히 20일입니다. 그동안 캐슬락에서는 불가피한 희생이 생기기야 하겠지만 더 큰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거겠죠.
교국은 캐슬락을 버릴 수 없다.
이건 조금이라도 병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깨달을 수밖에 없는 사안.
-물론 믿기지 않으실 겁니다. 당연히 믿기지 않으실 거예요. 미친 생각이고 말도 안 되는 시도라고 생각하시고 계시겠죠. 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는 공화국의 심장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지금부터 군을 돌려 곧바로 동부 전선을 넘을 겁니다. 아마 당신들이 이 영상을 보고 있을 즈음이면 출발 준비가 끝나 있을 겁니다.
“허세야.”
-허세 같은 게 아닙니다.
“기만이고 개소리지. 나는 널 알고 있어, 이기영.”
-기만도 아니고 개소리 같은 것도 아닙니다.
“넌 지금 무서운 거야. 그래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거야. 그때 우리가 뒀던 체스 때처럼 본인이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겁먹은 개 마냥 짖어대는 거야. 정공법으로 행동한다면 밀릴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딴 유치한 심리전에 내가 말릴 것 같아? 이 전쟁이 장난처럼 느껴져? 이건 가위바위보가 아니야. 네가 주먹을 내겠다고 엄포를 내놓는다고 해서 흔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사기꾼 자식.”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물론 믿기 힘드시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악마소환사님. 하지만 저는 절대 이런 부분에서는 굽히고 들어가지 않아요. 저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서로 마주쳤을 때 길을 비켜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되어야 해요. 저는 분명히 공화국의 수도로 들어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신은 이곳으로 오게 될 겁니다. 저를 막으러 병력을 보내오실 거예요. 캐슬락을 조이고 있는 병력을 물릴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피하는 건 네가 될 거다.”
-피하는 건 당신이 할 일입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아.”
-저는 움직일 겁니다.
“개소리라는 걸 알고 있어.”
-초조해하시는 건 압니다. 당하신 게 있으니까요.
“그건 네가 빌어먹을 사기꾼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야!”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뒤통수를 맞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똑똑한 사람일수록 후두부가 더 먹음직스럽거든요. 제가 많이 쳐 봐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기영 이 개자식! 이죽거리지 마! 이 쓰레기 같은 더러운 사기꾼 자식!”
-바로 지금 이 상황처럼 말입니다.
“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끝났습니다. 기왕이면 제법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겁니다. 정확히 5초 후에 이 작은 물건이 폭발할 예정입니다. 디텍팅 마법이 가능하다고 해서 방심하시면 쓰나요. 디텍팅 마법에 걸리지 않는 마법도 있다는 걸 눈치채셨어야죠.
“군사님!”
“제길!”
-오!
“지금 바로!”
-사!
“방어 마법을 캐스팅하겠습니다!”
-삼!
“……!!!”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일!
“카티아!”
-콰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이고! 아이고오! 방금 움찔하신 거 다 봤습니다. 군사님! 아이구. 우리 군사님은 순진도 하셔라! 푸흐하하하핫! 또 속으셨네요. 푸흐하하하하핫!
“이….”
-또 속으셨습니다! 푸흐하하하하핫! 디텍팅 마법에 걸리지 않는 마법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정말로 마법사 맞습니까? 푸흐. 하하핫!
“이….”
-그리고 이렇게 작은 촉매에 마법이나 다른 수단이 부여해 봤자 화력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기껏해야 파직 하면서 부서지는 게 고작입니다. 푸흐하하하핫. 이러면 안 되는데 움찔했을 군사님 얼굴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이! 쓰레기 같은 사기꾼 자식!”
-그럼 안녕히! 수도에서 뵙겠습니다, 군사님.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어…. 개자식.”
-원하시는 게 전부 이루어지길 기도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아!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으음…. 또 속으셨습니다, 군사님.
콰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