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9
회귀자 사용설명서 389화
싸구려 심리전(2)
“아마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수도로 향할 겁니다. 틀림없이요.”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십니까?”
“그는 사기꾼이지만 담이 큰 사람입니다. 주사위를 던져야 할 타이밍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아마 다완 전선을 옆으로 지나 라이오스에 체류하고 있는 붉은 용병과 합류. 운이 좋으면 용병여왕과 함께 공화국의 심장으로 들어가려는 계획이겠죠. 라이오스에 남아 있는 보급품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수도까지 닿을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슬아슬하겠지만요.”
“확실히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본인이 먼저 들어가겠다고 알린다는 게 저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캐슬락을 미끼로 다른 전선에서 이득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캐슬락에 있는 병력을 빼주기를 바라는 거죠. 아무 의미 없이 보였던 퍼포먼스의 목적은 바로 그겁니다. 조금이라도 캐슬락이 숨을 쉬게 만드는 것. 이건 기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벌일 정도로 캐슬락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진청 군사님께서는….”
“본대는 캐슬락에 남길 겁니다. 적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보다는 조금 더 확실하게 숨구멍을 틀어막도록 하지요. 물론 최소한의 병력을 편성해 적의 진군을 지연시킨 이후 보급품을 최대한 소모시켜 퇴로가 없는 병력을 쳐낼 겁니다. 조금 돌아가게 되겠지만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정석이야.’
말 그대로 정석에 가까운 편성이다.
캐슬락에 대한 압박을 유지하면서 곧바로 공략전에 들어가는 것.
적 병력은 수도로 향하게 되겠지만 이곳에 있는 병력의 일부를 뺄 수 있다면 진군을 지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발목이 잡힌 적은 보급품을 소모하게 될 것이고 결국엔 천천히 고립되며 말라 죽게 될 것이다.
몇 가지 변수를 더 생각해도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선택.
하지만 전혀 위험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적들이 수도로 향하지 않는다면?’
만약 이기영 명예추기경과 그의 군대가 수도로 향하지 않는다면 캐슬락 전선의 입장이 조금 당황스러워 질 수도 있다.
어느 정도의 비율로 병력을 나눌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지만 1/5, 아니, 1/7을 다른 곳으로 투자하는 것도 위험부담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바위를 낸다고 말하고 가위를 내는 싸구려 심리전에 당할 수도 있다는 거다.
고작 말 몇 마디에 병력 전체가 흔들릴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군사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어떻게 봐도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확신하는 듯한 얼굴.
단순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다.
분명히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수도로 향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마음속 한구석에서 피어나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군사님.”
“말씀하셔도 됩니다.”
“혹시 수도로 보낼 병력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신 건지.”
“총병력의 1/6입니다.”
“그건….”
“보급물자 역시 적지 않은 물량을 지원하게 될 겁니다. 캐슬락에서 일어날 싸움보다는 수도에서 일어날 싸움이 더욱 장기전이 될 테니까요.”
“그… 군사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저들이 수도로 향하지 않는다면….”
“않다고 하더라도 캐슬락 공략은 가능합니다. 만약 그들이 수도로 향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현재 캐슬락에 모여 있는 전력이라면 분명히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실 수 있는 겁니까.’
하는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째서 제가 이렇게까지 확신하는지 궁금하신 표정이군요.”
“죄, 죄송합니다. 군사님.”
“해답은 아주 간단하니까요.”
“그게 무슨….”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아주 고마운 메시지를요.”
* * *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또 물어보고 그러십니까, 예브 카리나 님. 저희는 수도로 향할 겁니다. 캐슬락은 버릴 거예요.”
“당신… 진심인가요?”
“그을쎄요. 진심일까요. 거짓말일까요?”
누가 봐도 놀리는 표정이다.
이죽거리는 얼굴에 마법을 박아 넣을 수 있다면 수백 번이라도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다혈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쪽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저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
살살 속을 긁어 놓으며 도발하는 표정은 어째서인지 화를 불러일으킨다.
아마 자기 자신도 인지하고 있으리라.
괜스레 고개를 돌리며 다른 곳을 바라보자 보기 싫은 얼굴을 더 들이미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으음. 사실 아직 답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카리나 님.”
“네?”
“정확히 말하면 영상이 나가기 전까지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싸구려 심리전이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져본 게 전부입니다. 현재의 군대가 약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저는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며 이기고 싶거든요. 무의미한 피해가 일어나는 건 당연히 지양해야지요. 모두가 저희를 위해 일어서 준 일꾼 아닙니까.”
“방금 그 영상이 고작 그걸 위해서였다는 겁니까?”
“정확히 말한다면 그렇습니다. 반응을 떠보고 싶었거든요.”
“그건….”
“말 그대로 반응을 떠보고 싶었습니다.”
“멍청한 생각입니다. 반응을 보고 난 이후에 움직이는 건….”
“압니다. 알아요. 캐슬락 전선에 있는 공화국이 먼저 움직인 이후에 저희 병력을 움직이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거. 저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소규모 별동대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덩치가 큰 병력을 움직이는 일입니다. 상대보다 두세 걸음이나 늦게 움직인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죠.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반응을 보고 싶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혹시 그 아티팩트에….”
“도청장치 같은 것도 없습니다. 우리 둘의 사이좋은 모습은 그 시점 이후로 완벽하게 폐기됩니다. 애초에 이곳에서 저곳을 훔쳐 볼 수 있었다면 이런 귀찮은 짓거리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끄응. 그런 장치가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그렇다면….”
“조금 예상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브 카리나 님. 제가 떠보고 싶은 건 악마소환사의 반응이 아닙니다. 네. 바로 당신의 반응이었습니다.”
“…….”
“사실 저도 확신하기는 힘들지만 뭐, 원래 똑똑하신 분들은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습니까.”
“…….”
“저는 당신이 틀림없이 어떤 메시지를 보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들어맞았어요. 자, 그럼 우리 한번 영상을 돌려 봅시다. 당신과 제가 찍은 찐한 영상을 천천히 다시 돌려보는 게 좋겠네요. 손가락. 그리고 눈동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손가락. 그리고 눈동자 그리고 다리.”
-33살… 예브… 카리나입니다.
“여기서 손가락.”
-조금 의외네요. 이곳에 온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7년 전입니다.
“여기서도 새끼손가락.”
-첫 번째는 예브 카리나 님이 제 손에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눈동자. 솔직히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모스부호 같은 것도 아니고 무슨 암호인지도 모르겠는데…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겠죠. 어차피 공화국에서만 사용하는 암호이자 신호 같은 걸 테니. 아니면 악마소환사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악마의 대화일 수도 있고요. 빛의 선택을 받은 저로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신이 악마 소환사에게 메시지를 주려고 한다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망상입니다. 떠보려는 생각이라면… 잘못 짚으셨습니다. 저는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어요.”
“음.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확실히 평소 행동과도 별 차이 없고 그냥 흘려 넘긴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근데, 예브 카리나 님. 저는 눈이 조금 좋아요. 남들보다 아주 조금 뛰어난 정도지만 관찰력이라는 게 조금 뛰어난 건가 봅니다. 계속해서 예브 카리나 님이 악마의 메시지를 전하는 게 보입니다. 아직 정화가 덜 된 모양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글쎄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확인을 해보면 되는 문제고…. 물론 당신이 보낸 암호들을 해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솔직히 해석할 필요조차 없게 느껴지네요. 아! 이 부분은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깐 빨리 감기.”
-저는 사기꾼 같은 게 아닙니다. 물론 믿기 힘드시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악마소환사님. 하지만 저는 절대 이런 부분에서는 굽히고 들어가지 않아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서로 마주쳤을 때 비켜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되어야 해요. 저는 분명히 공화국의 수도로 들어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이곳으로 오게 될 겁니다. 저를 막으러 병력을 보내오실 거예요. 캐슬락을 조이고 있는 병력을 물릴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여기서도 손가락. 다시 한번 되돌려서 볼까요?”
-저는 절대 이런 부분에서는 굽히고 들어가지 않아요. 저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조금 움찔 하시는 것 같네요. 예브 카리나 님. 다시 한번 봅시다.”
-저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이네요. 당신에게도 분명히 똑같은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실제로 이 문장은 지금의 저를 있게 만들어준 제 가치관의 일부입니다. 한 다섯 번 정도는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
“누군가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작업입니다, 예브 카리나 님. 쓸데없는 쇼도 해야 하고. 그에 맞는 행동도 보여야 하지요. 자, 여기서 문제 한번 내봅시다, 예브 카리나 님. 당신이 생각하는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라건대 양보하지 않는 사람으로 비쳐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머릿속에 집어넣었는데도… 콜록! 아, 실례. 다시 말하겠습니다.”
“…….”
“그렇게까지 반복해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줬는데도 악마소환사에게 보낸 지금의 메시지가 부정의 뜻이라면 제가 조금 슬퍼지지 않습니까?”
-저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손가락 한 번, 이건 분명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있다. 혹은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수도로 향할 것이다. 혹은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다. 제 망상이 어떻습니까. 제법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틀립니다. 당신의 생각은 틀립니다. 헛짚고 있습니다.”
“아뇨. 틀릴 리가 없습니다. 해석은 잘 못하겠지만 아마 틀림없이 제 생각이 맞을 거예요. 아마 지금까지 열심히 회의를 하고 있을 진청 쓰레기도 당신이 보낸 메시지 덕분에 제가 수도로 향할 거라고 믿고 있을 겁니다. 크으. 동료애라는 건 좋습니다. 그렇지요?”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이기영 명예추기경. 당신은 지금 쓸데없는 트집을 잡고 있습니다. 겨우 손가락을 움직였다고 캐슬락에 있는 본대가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머, 멍청한 생각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을뿐더러…. 당신도 말도 안 되는 추측으로 병력을 움직이는 건 좋지 않을 겁니다. 도박이예요.”
“크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만 저는 당신만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브 카리나 님. 저는 악마소환사 진청을 믿습니다. 짧은 영상 중에 그가 당신이 보낸 신호를 캐치할 거라고 믿는 거고 또 그가 당신을 신뢰한다는 걸 믿습니다. 꺼지지 않는 동료애! 저는 그런 걸 믿고 있어요. 크으….”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해요, 예브 카리나 님. 자, 그럼 여기서 다시 한번 문제 나가겠습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예브 카리나 님께 제가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고 또 어필했는데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제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이 가십니까? 양보하지 않고 수도로 진격할까요? 아니면 그 반대일까요.”
“…….”
“저는 제가 한 말을 끝까지 지키는 신의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내 뱉은 말과 신념을 아무렇지도 않게 뒤바꾸고 태세전환을 일삼는 개새끼일까요.”
“…….”
“정답은… 후자였습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태세전환을 일삼는 개새끼가 맞습니다. 제가 아주 또 양보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해낸답니다, 예브 카리나 님. 멍! 멍멍! 멍! 푸흐하하하핫! 갑시다! 캐슬락으로!”
“…….”
“캐슬락으로 가즈아!! 멍!멍!멍!”
“개… 개새끼.”
“저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본래 사람이라는 건 어쩔 수없이 신념을 저버릴 때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예브 카리나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