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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390화 (389/1,590)

# 390

회귀자 사용설명서 390화

우정과 사랑, 믿음의 힘(1)

“어떻게 여행길은 좀 편안하십니까?”

“개새끼….”

“너무 그렇게 매도하시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제 입장에서도 여러 가지 양보해 드린 겁니다. 배신당했는데도 포로들이 멀쩡하지 않습니까? 제가 정말 사이코패스 같은 쓰레기였다면 현재 아군이 붙들고 있는 포로들을 전부 생매장했을 겁니다. 이렇게 함께 전쟁터로 끌고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

“예브 카리나 님께서는 빛의 진영 쪽에서도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될 거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 물론 당신에게 맡겨진 역할은 겨우 이정도가 끝이 아닙니다. 기왕 빛을 위해 일해주시기로 마음먹었는데 겨우 이 정도로 끝나면 쓰나요. 앞으로도 열심히 일해주시게 될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합니다.”

“군사님이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흔들리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그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하물며 신도 뒤통수를 맞는데 제까짓 게 뭐라고 버티겠습니까. 머리 좋은 사람도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는 아주 많아요. 당신처럼요.”

“알고 싶지 않습니다.”

“타인을 믿을 때 그런 경우가 종종 일어나죠. 성공한 사업가가 가까운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아 파산한다거나, 보증 잘못 서서 한 방에 훅 간다거나. 사기 같은 거 절대로 당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간혹 무너지는 경우가 그거예요. 타인을 너무 많이 믿는 거.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멍청해서 뒤통수를 맞는 게 아닙니다.”

“군사님은….”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런 저라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 세 명 정도는 있습니다. 아니, 네 명이지요. 이런 제가 멍청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언컨대 제가 진청 군사의 입장이고 제가 믿는 이가 포로로 잡혔다면 저 역시 그들을 믿을 겁니다. 물론 여러 가지 합리적 의심은 따라 오겠지만 그런 부분을 제쳐두고서라도… 믿고 싶을 겁니다.”

“…….”

“진청 군사가 믿는 것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예브 카리나. 물론 제가 어떻게 움직일 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믿고 있는 건 당신이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전은 굉장히 의미 있고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겁니다. 만약….”

“…….”

“만약 우리가 수도로 향하지 않고 캐슬락으로 향한다면 공화국이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신의를 지킬 줄 모르는 개새끼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믿었던 예브 카리나 님이 빛으로 교화되어 저와 함께했다고 생각하게 될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만약 당신이 준 힌트를 믿고 있다면 후두부에 크게 충격을 받을 텐데. 아마 이만저만한 게 아닐 겁니다. 어쩌면 공화국 역사상 가장 커다란 통수를 친 위인으로 추앙받으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

“압니다. 공화국의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결코 예브 카리나 님을 탓할 리가 없다는 거. 감히 누가 예브 카리나 님 같은 분을 탓하겠습니까? 어디까지나 불안하고 걱정되어서 드리는 말입니다. 뭐, 결과는 시간이 알려주겠지요. 자! 일단 갑시다! 편성도 어느 정도 마무리 된 것 같고, 이제는 움직이는 것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

“재미있으실 겁니다. 우정과 믿음의 힘을 이용해 빛이 승리하는 스토리는 굉장히 흔한 클리셰 아닙니까? 하지만 그만큼 먹어주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푸흣!”

* * *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아주 고마운 메시지를요.’

‘메시지 말씀이십니까? 그건….’

‘예브 카리나에게서 받은 메시지입니다. 카티아, 당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언, 언니가 언제….’

‘마력 홀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내내 입니다.’

‘그, 그랬군요. 그랬어요. 그랬던 거군요.’

‘네. 아직 그녀 역시 저희와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방금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자 괜스레 주먹이 꽉 쥐어졌다.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현재 언니가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백 번 걱정해도 부족함이 없다.

에베리아 전선은 완전히 무너졌고 언니도 이기영 명예추기경에게 붙잡혔으니까.

하지만 이쪽도 계속해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거야.’

그 말대로.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활로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에도 메시지를 보낸 언니와 그걸 캐치해낸 군사님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해석된 메시지의 내용 자체는 대단하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전해 들은 것은 고작 전체적인 병력의 규모.

현재 에베리아 전선의 상황,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수도로 갈 확률이 높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간단한 수화로 전할 수 있는 정보량에는 한계가 있기에 이 정도를 받아들이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그전까지 정보가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눈에 띄는 성과다.

수도로 병력을 얼마나 보낼지에 대해서도 언니의 메시지가 있었기에 정할 수 있었다.

에베리아 전선의 병력을 고려하고 그걸 바탕으로 편성한 부대.

떠나는 병력뿐만이 아니라 남아 있는 병력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변수가 생기더라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병력을 캐슬락에 남겨둔 것은 군사님다운 행동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재정리된 부대는 누가 봐도 입을 벌리기에 충분.

심지어 현재 동부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공화국 병력의 일부도 차출했으니 그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정리하자면 혹시 모를 적의 습격을 대비할 수 있는 병력을 유지한 채 에베리아군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부대를 정리한 것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편성에는 위험 부담이 존재한다.

전선을 유지하는 병력을 조금씩 줄여야 했고 가장 중요한 캐슬락 역시 주요 병력을 수도로 보내야 하는 도박을 감행해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수를 감행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군사님의 판단이니까.’

그 말대로 아마 모두가 믿고 있는 것이리라.

군사님이 남은 병력만으로도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판단했다면 따르면 된다.

지금까지 공화국은 그렇게 움직여왔고 실제로도 커다란 성과를 내왔다.

이곳에 있는 지휘부가 모두 군사님의 판단을 믿고 있다.

당연히 그 판단에 대한 의심은 없었고 실제로도 편성 자체는 완벽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잡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군사님에 대한 불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불신이었다.

“편성 자체는 저희가 뭐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을 정도로군요. 적 병력에 정령사의 비율이 높은 것이 걱정됐었는데 아마 충분히 그들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있을 겁니다. 보급의 문제도 완벽해 보이고. 흠, 다완 전선 쪽이 조금 힘을 잃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만….”

“다행이로군요.”

“물론 조금 걱정이 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놓치신 게 있다는 말이 아니오라…. 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제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라 사료되옵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

“…….”

“일단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 에베리아 전선이 그렇게 쉽게 무너진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예브 카리나 님이 전해오신 에베리아 병력 규모를 고려하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라이엇 님.”

“물론 카티아 님께서 계신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드리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는 혹시나 예브 카리나 님께서….”

“…….”

“예브 카리나 님께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이엇 님, 언니가 배신이라도 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능성 자체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에베리아 전선에 있는 사제들의 숫자, 병력 규모, 성벽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하루 만에 공략되었다는 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까? 예브 카리나 님께서는 보, 본인의 입으로 이제는 교국의 편에 서겠다 말씀하시기도 했고…. 저, 저는 마력 홀로그램을 보지는 못했지만 단순한 포로라고 하기엔 상태 역시 무척 좋아보였습니다.”

“마치 언, 아니, 예브 카리나 님이 고생이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이로군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충분히 생각할 여지는 있습니다. 에베리아 전선이 공략된 일에 예브 카리나 님의 입김이 들어가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어째서 그토록 빨리 공략되었는지 설명이 됩니다. 계속된 적들의 선전활동에 혹여나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 결과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것이 아닌지 걱정됩니다.”

“말도 안 되는 모함입니다. 군사님, 들을 가치도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한 번쯤은 생각하셔야 합니다, 군사님. 저도 이런 생각을 하기는 싫습니다만 그녀가 변절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주셔야 합니다.”

“당신… 정말로 언니가 나를 두고 교국 쪽으로 넘어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언성을 높일 상황이 아닙니다, 카티아님! 저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패전의 책임은 에베리아 전선의 총지휘관인 예브 카리나 님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번 일은 감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말해봐.”

“그만.”

“…….”

“…….”

갑작스럽게 장내가 조용해졌다.

눈앞에 있는 늙은이의 발언에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저 발언에 정치적 의도가 없을 거라고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우 같은 늙은이.’

언니가 군사님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건 여기에 있는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공화국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죽었으면 죽었지 정말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암호로 알려온 정보가 거짓 정보라는 말부터 어처구니가 없다.

하물며 에베리아 전선 때부터 배신을 하고 있었다는 의혹을 굳이 지금 들이미는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내가 있는데도 배신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야?’

조용히 군사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카티아의 말도 라이엇 님의 말씀도 옳습니다.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일입니다.”

저도 모르게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당연지사.

“군사님!”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면 생각해 봐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브 카리나의 변절 역시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고려해 따로 대비하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가능성 자체는 낮습니다. 제가 그녀와 함께 지낸 시간이 길기 때문이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판단해도 그녀가 등을 돌렸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아….”

“그녀는 교국과의 접점이 없습니다. 공화국을 배신할 동기도 시간도 없었을 겁니다. 어째서 에베리아 전선이 그렇게 빠르게 함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지만 단언컨대 그 이유가 그녀의 변절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이엇 님. 저 역시 모든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으니까요.”

“쓰, 쓸데없는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조용히 말을 끝냈고 무조건적으로 언니를 믿는다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고개를 돌리자 어떤 확신에 가득 차 있는 군사님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믿고 계신거야.’

전에 했던 말처럼 아마 틀림없이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군사님이 언니를 믿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현재 보여주고 있는 표정이 그걸 설명해 주고 있다.

괜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계셔.’

아마 언니는 틀림없이 저 믿음에 보답해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군사님, 적 병력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느 곳입니까.”

“저, 정말로 수도로 향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좋아.’

“지금 곧바로 움직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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