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
회귀자 사용설명서 402화
사기 증진(1)
“생각보다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군요.”
“하지만 몸에 쌓여 있는 피로감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최악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낙관적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여유를 갖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죠.”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지혜가 최대한 신경 써보겠다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하기는 한 모양.
다시 한번 뒤통수가 지끈거리는 증상을 호소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런 말은 꺼내오지 않았다.
만약 둘만 있는 장소였다면 곧바로 입을 열 것 같기는 했지만, 현재 다른 병력과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만무. 김현성을 디스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녀석도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암, 그거다. 현성아.’
“아마 몇 시간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저희가 현재 그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고요.”
“혹시….”
“아뇨. 물론 아까 같은 전투가 다시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부터 목적지까지는 병력이 매복하기 적절한 지형이 아닙니다. 방금 저희가 상대한 적 병력이 각 전선에서 차출한, 말 그대로 시간을 벌기 위한 잉여 병력에 불과합니다. 이외에 타 병력을 따로 저희 쪽에 보낸다는 건 공화국 쪽에서도 쉽지 않은 결정일 겁니다. 방금의 전투로 본인들이 얻고 싶은 건 전부 얻어갔을 테니까요.”
“예를 들면 무엇 무엇이 있는 겁니까?”
“정보, 시간, 컨디션 정도라고 보면 될 겁니다.”
“아….”
“물론 저희 쪽의 부담이 쌓여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유가 없는 것은 저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심적으로도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서부 전선 쪽과 북부 전선을 밀고 있다고는 한들, 캐슬락 쪽에 많은 것을 투자한 걸 회수하고 싶을 겁니다. 운이 좋으면….”
“마지막 전투가 될 수도 있겠군요.”
“예. 만약 전쟁을 지속한다고 해도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흘러가지 않을 겁니다.”
‘용의주도하기는 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다음 전투에 사활을 걸고 있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다. 아마 그 악마소환사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잉여 병력을 이쪽에 보낸 것은 발목을 붙잡아 보겠다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이쪽의 정확한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정확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한 미끼라고 봐도 무방.
이미 이쪽은 쓸 수 있는 패를 모조리 까발린 채로 돌진하고 있다는 거다. 전술 김현성 같은 경우가 가장 큰 예다.
숨기고 싶었지만….
‘숨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김현성을 투입시키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그곳에서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우리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녀석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캐슬락을 미끼로 대놓고 이쪽의 정보를 빼내려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건 알면서도 당해줄 수밖에 없는 종류의 개짓거리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를 최대한 숨긴 채로 이쪽이 가지고 있는 패를 확인하는 것. 세밀한 부분까지 컨트롤하며 사람 신경을 긁는 움직임은 어떻게 보면 변태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이건 그만큼 효과가 있다. 당장 이쪽이 캐슬락에 있는 병력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역시 그 연장선, 전체적인 상황을 자체평가 해보자면 끌고 있는 쪽은 저쪽이고 끌려다니는 쪽은 우리 쪽이라는 말이 된다는 거다.
“아.”
“괜찮으십니까?”
“아…. 네.”
‘슈바…. 쪽팔리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다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그나마 김현성이 잡아줬기에 망정. 만약 땅바닥을 굴렀다면 병력의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무리하셨다고 하셨죠. 혹시….”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넘어졌을 뿐이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가 축적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그 무엇보다 몸도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아직 뒤틀린 연못의 영향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네.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기영 씨 혼자만의 몸이 아닙니다. 조금 더 신경 쓰시는 게 맞습니다.”
단순히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은 당연지사.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스레 분위기가 훈훈해진다.
그가 내 몸을 일으킨 이후에 등을 툭툭 두드리는 행동은 마치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주인공의 모양새. 곧바로 웃으며 이야기를 건네오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김현성 하렘이 그렇게 김현성에게 환장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등 뒤에서 뭔가 따가운 눈초리들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심지어 정체 모를 탄성도 들려왔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왠지 모르게 나와 김현성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병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이 여군으로 구성되어 있는 모습, 심지어 인간들뿐만 아니라 엘프들도 섞여 있었는데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는 반응이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엘레나 같네….’
사실 병력의 컨디션이 그리 좋다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막 전투가 끝난 이후였고 뒷수습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곧바로 행군길에 올라야 했으니까. 하지만 반짝반짝 눈이 빛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래서 명분이 중요하지. 암, 그렇고말고. 평소에 교육시켜놓기를 잘했다니까.’
막 행군길에 올랐을 때는 사실 지금보다도 더 상황이 좋지 않았었다. 나와 김현성의 부대 순회가 효과가 있을 거라는 이지혜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모양.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의아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단순히 피로회복포션을 나누어주고 몇 마디 나누는 것이 전부였지만 주변은 물론 비교적 떨어져 있는 부대까지 좋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물론 저런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뭣 하지만 공식적으로 나는 베니고어 여신과 엘룬의 선택을 받은 신의 사자였으니까. 교국의 병사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 신앙심이 뛰어난 엘프들의 경우에는 더하다.
김현성의 경우는 어떨까?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가진 파급력보다는 조금 덜 하기는 했지만 녀석도 충분히 경외의 시선을 받을 만했다. 앞의 전투에서 김현성이 보여준 모습은 인간들은 물론 이 종족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긴 모양. 조금 관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강한 자에게 경외감을 느끼는 건 인간뿐만이 아니다. 엘룬 나이트를 비롯한 엘프들에게도 그랬고 드워프들의 경우에는 더했다. 말하자면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내가 만약 검을 배우는 입장에 있었다면 김현성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존경의 대상이 직접 함께 행군하고 걸어가는데 기분 나빠할 이들은 없다. 사단장이 갑작스레 부대방문을 한다면 치를 떨기야 하겠지만 이 경우는 그 경우와 예 자체가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나와 김현성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대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 병력과 계속해서 행군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였다. 아까부터 김현성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여성 엘프들을 바라보니 확실히 얼굴이 잘생긴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인 모양인 것 같았다.
녀석이 뭔가 액션을 취할 때마다 작은 탄성들이 들려오니 역시나 이 대륙에도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졌다. 심지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싱긋 웃을 뿐이었지만 또다시 주변 부대를 술렁이게 하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만 좀 해라 이 새끼야. 아니, 쟤는 왜 코피까지 흘리고 그래.’
심지어 코를 막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도 생겨나기 시작. 내가 당황스러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이것저것 쌓인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처음 불안해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 정도는 긴장이 풀린 모양. 심지어 전쟁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도 해오는 것을 보면 김현성 역시 이런 종류의 대화가 그리웠던 것 같았다. 주제도 꽤나 다양했다.
“혹시 검술을 배워볼 생각이 없으십니까?”
“네?”
“기영 씨는 제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눈이 더 좋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공격을 볼 수 있다면 대응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요…. 저는 그다지 몸 쓰는 데는 재능이….”
이런 종류의 대화나.
“빨리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고 싶군요.”
“네.”
“한 삼 일 정도는 푹 잤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네. 그냥 잠만 자고 싶습니다.”
“감당해야 할 업무량이 늘어나겠군요.”
“아….”
“농담입니다. 김미영 팀장이 일을 잘 해주고 있으니 아마 충분히 휴식시간을 즐기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런 종류의 영양가 없는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만 모든 대화가 가지는 공통점은 있다. 그 공통점은 가정이다. 이 전쟁이 끝난 이후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가정.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대화라는 데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새끼도 사람이기는 하네.’
사소한 사건들까지 불안함을 지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잠깐이나마 여유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사실 조금은 재미있고 신기한 모습이라고 하는 게 맞다. 내 머릿속에 그려진 김현성의 이미지와는 얼추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니까. 한참이나 신나게 떠든 녀석이 다시 한번 말을 걸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 기영 씨.”
“네.”
“혹시 덕구 씨에게는 가보셨습니까?”
“아. 아니요. 사실 에베리아를 떠나온 직후부터는 쭉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사람들을 챙길 틈이 없었습니다. 혹시 뭐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딱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한 번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힘들어 하시는 것 같으니까요.”
‘하긴….’
“아무래도 전쟁이라는 것 자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들과 검을 부딪친 것 처음이라…. 마음이 여리시니까요.”
‘여려도 너무 여려서 문제지.’
아마 녀석이 강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인이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 대신 본인이 죽일지도 모르는 공포에 사로잡힌 것. 웬만한 칼이나 화살로는 상처 하나 안 나는 녀석이다 보니 전쟁터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이 있는 게 틀림없다.
물론 선천적으로 녀석이 순한 게 가장 큰 이유가 되기야 하겠지만 버프를 받기 전 박덕구였다면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이다음 전투 역시 마찬가지고….’
지금까지는 나와 이지혜가 최소한의 케어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마지막 전투에서도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차라리 나오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
차라리.
‘편성에서 빼버릴까.’
후방 지휘통제실을 틀어막는 임무라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파고들며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녀석 말고 다른 길드원들 역시 신경 써볼 만한 여지가 있다.
“길드의 상태는 조금 어떻습니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는 다들 잘 적응해주고 있고…. 심지어는….”
“아…. 네. 그랬었죠.”
“네. 혜진 씨 같은 경우에는 정말로 유명해졌으니까요. 안 그래도 보기 힘든 유니콘 위에서 전장을 휘젓는 모습이 엘프들에게 큰 감명을 준 모양입니다. 순결한 창. 어떻게 생각해도 혜진 씨에게 어울리는 별명인 것 같습니다.”
“네…. 네.”
‘아마 본인은 질색했겠지만….’
단순히 질색한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기영 씨. 한 번 길드원들이 있는 곳으로….”
“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덕구와는 한 번 이야기를 해봐야 될 것 같아서….”
“아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 그리고.”
“네.”
“아직 피로회복포션을 드시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 병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마음만으로도 고맙다. 새끼야.’
“괜찮습….”
이미 남몰래 두 병이나 비우기는 했다. 더 이상 먹으면 오히려 배가 부를 것 같은 느낌. 막 포션을 거절하려던 찰나 시야에 비친 것은 이 상황을 바라보는 갤러리들이다.
‘뭐야….’
나와 김현성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 부대 전체가 저 포션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착각이 아니다. 여기서 저 포션을 받지 않는다면 부대 사기가 크게 꺾일 것 같다는 기분마저 들기 시작했다. 살짝 손을 빼니 크게 실망했다는 표정과 함께 정체 모를 탄식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뭐야. 시불….’
선택의 여지가 없다. 결국에는 손을 뻗어 포션을 받아들자 짝짝거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작은 응원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뭔데….’
박덕구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