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3
회귀자 사용설명서 403화
사기 증진(2)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길드원들의 얼굴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정하얀과 한소라는 안개의 숲으로 가 있어 정확히 상태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최근에 보내온 통신에서 보인 모습을 떠올려 보면 예상 외로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한소라는 정하얀과 계속해서 붙어 있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만 꼭 필요한 일을 해줘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안하긴 한데….’
그녀 같은 경우에는 정하얀과 함께 있을 때 능률이 오르기도 하고 심지어 조합도 좋다.
본인이 무척 불편해하기는 하지만 케미가 좋으니 감독의 입장에서는 둘을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 리 만무.
이번 전쟁만 끝나면 저 멀리 떨어뜨려 놓을 거라는 희망을 주고는 있지만 솔직히 그러기가 쉽지 않다.
한소라와 같이 들어온 유아영과 김창렬 역시 무척 잘 적응했다고 할 수 있는 예.
체력 스탯에 전설 등급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유아영은 이런 종류의 장기전에 특화되어 있었고 김창렬은 눈에는 잘 띄지 않아도 항상 1인분을 해준다.
함께 전장에 선 것은 아니었지만 마력 홀로그램으로 본 그들의 모습은 제법 인상적이었다.
오매불망 김현성만 바라보는 김예리와 조혜진은 굳이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을 정도였고 그건 선희영 역시 마찬가지.
앞서 말한 셋은 다른 중소 클랜의 마스터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안기모도 마찬가지고.’
굳이 등급을 매기자고 한다면….
김예리, 조혜진, 선희영.
이 셋은 명실상부 파란의 1티어.
본래 붉은 용병 소속이었던 안기모와 박덕구의 그녀, 마도학자 황정연이 1.5에서 2티어 정도고….
한소라를 포함한 병아리 3명이 2에서 3티어 정도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건 파란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대륙 전체를 7개 정도의 단계로 분류했을 때가 이 정도.
당연히 대륙 8좌나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같은 이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규격 외의 존재들은 사실 이런 종류의 수치로 강함의 정도를 구분하는 게 별 의미가 없으니까.
‘박덕구는….’
정확히 말하면 1.5정도.
많이 쳐주면 1티어 나쁘게 쳐주면 2티어다.
선희영, 조혜진, 김예리 같이 애초 초월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는 다르게 순수하게 노력으로 만들어진 케이스.
공격력이 없는 게 흠이지만 단순한 고기방패로써는 규격 외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이번 전쟁에서 그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공격력이 거의 없다고는 해도 그건 비슷한 등급에서의 이야기다.
상대적으로 등급이 낮은 이들이 박덕구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리 만무.
칼에 맞으면 아픈 척이라도 하는 조혜진이나 김예리와는 다르게 이 돼지는 웬만한 공격에는 눈 하나 깜빡 하지 않는다.
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전장에서 폭군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발 물러서는 모습은 가관.
물론 이해는 간다.
녀석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이런 환경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처음에는 조금 짜증도 나고 답답하기는 했지만.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해준다고 한들, 본인이 마음먹지 않는다면 억지로 떠미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이전 전투는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준이라 두고 볼 수 있었지만 다음에 일어날 전투는 높은 확률로 사고가 날 확률이 크다.
차라리.
‘너는 그냥 집에 있어라.’
언젠가는 등을 떠밀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박덕구 하나 뺀다고 전선이 무너질 일은 없을 뿐더러 지휘부가 적의 습격을 받아도 방패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니 어떻게 봐도 합리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맞다, 덕구야. 이번 전투에서는 딱히 나갈 필요 없어. 따로 분대를 구성해서 적의 기습에 대비할 수 있는 후방부대로 갈 거다. 아영 씨나 창렬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사실은 안 되지만.
‘권력 좋다는 게 뭐겠어.’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드는 게 현재의 내 위치다.
물론 형편성에 어긋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애초에 나는 그런 걸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닐뿐더러, 우리 길드원 몇 명 빼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유아영이나 김창렬도 혹시나 죽을 수 있으니 열외.
김예리와 조혜진도 합리적인 선택인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몰래 병아리들을 걱정하고 있었던 병아리 책임자 안기모야 언급할 필요도 없다.
기쁜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잘 됐군요. 안 그래도 조금 걱정하고 있었던 차였는데. 덕구 씨에게 맡기면 안심이기도 하고… 네. 여러모로 잘 된 것 같습니다. 아마 이후에 일어날 전투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를 테니까요.”
“응. 그게. 맞아. 그리고 이건 현성 오빠 판단?”
“아니. 지휘부의 판단. 아무래도 후방 지휘통제실이 위험에 노출될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고 가정했고 이건 그에 대한 대응책이야.”
“음. 그렇군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아! 예리나 혜진 씨는 아마 처음에는 현성 씨와 함께 움직이게 될 겁니다. 이후에는 떨어질 수도 있지만….”
“정말?”
“네. 희영 씨는 평소대로….”
“엘레나 님과 함께 있으면 되는 건가요?”
“네. 아마 안전하실 겁니다.”
고위 사제의 안전은 병력 전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아마 선희영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뭔가 침울한 얼굴의 박덕구가 눈에 띄었다.
은근히 눈치가 빠른 만큼 후방 편성의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뭔가 자괴감에 휩싸인 얼굴.
하지만 딱히 내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음…. 뭐, 뭐. 따로 할 일은 없는 거요?”
“딱히 없다. 너 하나 빠진다고 달라질 전황도 아니고.”
“거, 그렇다면… 지휘부의 판단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진짜 어지간히 나가기 싫은 모양이네.’
입술을 꽉 깨물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을 해오지 않는다.
차라리 겁을 먹거나 무서워서였다면 조금 짜증이 났겠지만 녀석다운 이유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거….”
“별일 아니다, 덕구야. 네가 맡은 임무만 확실히 해주면 돼.”
“그건 걱정 마쇼. 그리고… 미, 미안….”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나도 네가 옆에 있어주는 게 더 안심되니까.”
“그거라면 맡겨주쇼. 형님 몸은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하게 할 거니까. 음. 꼭 그렇게 할 거라니까.”
“그래. 고맙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모습은 귀엽게까지 느껴진다.
뭔가 안심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무언가 나무라기라도 한 줄 알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
기운 내라는 듯 어깨를 툭툭 치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잡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이후로는 아까 김현성과 나눴던 이야기의 연속.
길드원들과도 통 이야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적당한 소재를 찾아 화두를 던지자 여기저기에서 입을 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선희영은 조용히 내 옆쪽에 자리 잡았고 박덕구는 조금 기운을 차렸는지 슬슬 농담을 던지고 있다.
꼬맹이는 그다지 관심 없는 척하고 있었지만 나오고 있는 이야기를 그 누구보다 귀담아 들으려고 하는 듯한 느낌.
과장해서 말하면 뭔가 가족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집에서 개고생 하고 있을 율하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거다.
“전쟁이 끝나면… 피크닉이라도 가는 게 어떨까요?”
“나는 찬성. 그런데 어디로?”
“글쎄요. 나보트 의원의 영지에 있는 거울 호수가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던데 뱃놀이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어때요? 부길드 마스터.”
“나쁘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 정연 씨.”
“사실 저도 교국에서 오래 몸담고 있었지만 그쪽은 통 가보지 못했거든요. 분명히 무척 예쁘겠죠? 로맨틱해라.”
사실 주제도 뭔가 비슷하다.
많은 종류의 이야기가 오가기는 했지만 그 뿌리는 같다.
‘전쟁이 끝나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 무엇을 할까.
이 전쟁이 그렇게 오랜 시간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파란 길드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아마 병력 전체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행군하는 일반 병사, 조금은 떠들썩한 드워프들, 심지어 엘프들까지.
모두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도 계속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은 당연지사.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니 이런 종류의 대화가 그리웠다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딱딱한 이야기 외에 다른 잡담을 한 지 오래 됐다는 것 역시도 깨닫게 됐으니까.
‘만나러 오길 잘했네.’
뭔가 성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길드원들을 격려하는 것도 성과라 하면 성과라 할 수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종류는 아니다.
시간이 아깝지 않을까 하고 떠올려 봤지만 김현성의 말을 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피곤했던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느낌.
복잡한 생각으로 꽉 차 있던 머릿속을 한 번 리프레시 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아마 길드원들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슬쩍슬쩍 대화에 참가하자 어느덧 천천히 해가 저물기 시작.
부대 전체에 무언가 차분한 긴장감이 맴돈다.
‘거의 다 왔나보네.’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지휘통제실에서 각 부대의 야전지휘관들에게 싸움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를 준 것이 분명.
곳곳에서 병사들이 분주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열을 정비하거나 보급품과 장비를 확인한다.
기도를 드리는 이들도 곳곳에 눈에 띄는 상황.
비슷한 입장에 처한 건 파란 길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모두, 다치지 마세요.”
“네, 희영 씨.”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네.”
후방지원조에 포함된 선희영과 황정연도, 전방에 위치한 조혜진과 김예리와 안기모는 앞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서로를 꽉 끌어안거나 악수를 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의외로 선희영과 조혜진의 사이가 가깝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점점 부대에 무거운 침묵이 드리울수록 반대로 멀리서는 커다란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
마법으로 만들어진 폭음과 많은 숫자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함성, 지형자체도 굉장히 익숙하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분명히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장소다.
캐슬락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각 부대는 모두 전투 준비!!”
지휘부는 굳이 연설을 하기 위해 시간을 끌지 않았다.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는 정확히 봐야 알겠지만 곧바로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린 이지혜의 판단을 보니 상황이 급하기는 한 모양.
병사들과는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모두의 얼굴에 약간의 긴장감과 고양감이 깃들어 있는 게 느껴졌다.
내가 하는 일은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이 전부.
“전투 준비! 깃발을 올려라! 각 부대는 곧바로 적 부대를 향해 진격할 준비를!!”
지금껏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가운데 있으니 이들이 느끼는 압박감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진다.
투구를 고쳐 쓰고 깃발을 들어 올리며 창을 앞으로 내민다.
여러 가지 종류의 버프가 쏟아지고 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느껴진다.
부대는 진군할 준비를 마쳤다.
지금쯤 지휘통제실에서 어떤 명령이 떨어졌는지는 뻔할 뻔 자.
나도 모르게 중얼 거린 소리에.
“전군 진격.”
커다란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군! 돌격하라!!!”
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