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6
회귀자 사용설명서 406화
마지막 전투(3)
전투에 임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현장을 떠나 있기는 했지만 파란의 초창기부터 김현성을 따라다니느라 온갖 위험을 마주했고 실제로 근접 전투 역시 심심치 않게 치러왔다.
하지만 그건 소규모나 던전의 경우.
이렇게 인간들 틈 사이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치르는 것은 처음이다.
화면으로 상황을 바라볼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온갖 인간이 만들어내는 열기.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소음과 비명. 땀 냄새와 섞인 피 냄새.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괜히 내려왔나.’
굳이 안전한 후방 자리를 내팽개치고 전장 한가운데에 들어서니 심기가 불편했지만 이미 기차는 떠났다.
지금 와서 후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부대의 전열이 느낀 충격이 그대로 뒤에도 전달되는 느낌.
적 병사들 사이로 꾸역꾸역 섞이기 시작하는 전위들이 시야에 비친다.
쾅!
콰득!
“아아아아아악!”
“제기랄!”
“밀집해! 밀집!”
“개새끼!”
“아아아아아악!”
콰직!
물론 그마저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내게 허락된 시야는 갑옷과 방패로 둘러싸인 채 고군분투하는 아군 전위들의 뒷모습이 전부였으니까.
아마 내가 눈깔 사용자가 아니었다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었으리라.
혼란스러운 머릿속과는 다르게 내 눈은 계속해서 주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
쓰러진 이들 덕분에 발걸음을 옮기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적 병력을 뚫고 나가는 아군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
다시 한번 상황을 차분히 살펴보자 박덕구가 인상을 구기며 방패를 휘두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적군을 방패로 밀치는 녀석을 보니 정말로 튜토리얼이 때가 떠오른다.
녀석이 막고 이쪽이 찌른다.
물론 현재는 그렇게 하진 않지만 당시 든든했던 놈의 모습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튜토리얼 몬스터에게나 먹혔던 방법이기는 했지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제한된 이곳에서도 꽤나 적절한 방법이리라.
나를 대신해 창을 든 병사들이 방패를 든 전위의 뒤에서 공격하고 있다.
“형님,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 거요?”
“너는 앞만 봐라.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거, 아, 알겠다니까. 그보다 어느 쪽으로 가는 거요?”
“서쪽. 일단은 가장 가까운 부대에 합류하는 게 먼저.”
“알겠으니까. 제대로 따라오는 거요? 다른 건 몰라도 꼭 저기까지는 데려갈 테니까.”
“알겠으니 집중해, 덕구야.”
“형! 님이나! 잘 따라오쇼!”
최대한 서둘러 이동한다지만 움직임이 더디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용 숨결 물약이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군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무기를 마음껏 쓸 수도 없는 법.
연금소환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이쪽의 위치가 발각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비대로 급하게 편성한 병력.
적 병력을 뚫어낼 정도는 되지만 집중적인 공세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만약 현재 이 병력에 내가 섞여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적 마법사들이 우리가 있는 위치로 마법을 쏟아부으리라.
안쪽에 있는 본대와 합류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우선 사항이다.
예비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리라.
“뚫어내!”
“밀리지 마! 밀리지 마! 어떻게든 본대로 보낸다. 어떻게든!”
“커헉!”
저들의 임무는 나를 본대로 보내는 것.
한 명, 한 명 쓰러지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짧게 신성력을 보내주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손을 잡아주거나 끌어주고 싶지만 리타이어한 이들에게 신경이 끌린다면 이곳에 고립될 것이다.
아무리 양심이 없는 개새끼라도 이쪽을 위해 목숨을 걸어주는 이들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제기랄. 제기랄.’
콰득!
콰지지직!
“막아! 막아!”
“앞에 막으쇼! 마법 떨어지니까 방패 들어! 방패 들으라니까! 뭐 해! 방패 들어!”
“화살! 화살! 아군 마법사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사제! 사제!”
바로 옆에서 사제를 부르짖던 병사의 가슴에 화살이 박힌다.
그사이 한 놈이 창을 들고 달려왔지만 커다란 방패가 앞을 가로막는다.
잠깐 틈이 생긴 곳을 다시금 아군 병사가 메꾼 것이다.
슬쩍 아래를 바라보니 가슴에 화살이 꽂힌 병사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군 전투사제가 급하게 녀석의 상태를 살피기는 했지만 이미 가망이 없는 상황.
물론 최대한 신성력을 밀어 넣어 생을 연장시키려고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가망이 없는 이에게 자원을 소비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래서 시발 전쟁 전쟁 하는 거네. 시발….’
개인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다수의 죽음은 통계라고 누군가 이야기했다.
딱 그 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군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조차 없다.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았는지 생사를 확인하는 것부터 불가능하다.
죽어간 이 모두 각자의 사연이 있겠지만 전쟁이라는 큰 배경으로 봤을 때는 그저 사망자 1에 불과하다.
그 누구도 죽어가는 이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하겠습니다.”
“가, 쿨럭. 감… 사 합니다.”
울컥울컥 피를 토하며 조용히 눈을 감는 병사의 모습에는 괜스레 숙연해진다.
물론 나 역시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말 한마디 건네는 것 정도는 쉽다.
비교적 편하게 눈을 감은 병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안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리타이어한 병사들을 내버려 두고 현 예비대는 계속해서 나아가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전장의 소음에도 익숙해진다.
죽어나가는 이들에게도 무감각해진다.
“죽어!”
“아아아아아악!”
“개자식들! 개자식들! 개자식들!”
“조금만 더 힘내자! 이 새끼들아! 조금만 더!지지 마! 조금만 더 뚫어내면 돼!”
“안쪽에는 손끝 하나 못 대게 하라니까!”
“화살! 화살! 방패 들어! 방패 들어! 사제랑 마법사 보호! 보호!”
쏟아지는 화살 비.
커다란 방패가 시야를 가린다.
방패를 뚫고 들어오는 화살도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적군에 많은 마력을 활용할 수 있는 궁수가 섞여 있는 모양.
하지만 그 피해가 그리 크지는 않다.
박덕구를 포함한 아군은 다시 한 번 방패를 들고 주변 이들을 쳐내거나 베며 앞으로 나아간다.
고지가 그리 멀지 않은 느낌.
옆쪽에서 커다란 굉음과 비명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제기랄.’
아군 병력이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며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다.
자세한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뻔했다.
‘적 네임드?’
콰드드드드득!
콰지지지지지지직!
“아아아아아악!”
“막아! 막… 아. 오지… 켁!”
‘어떤 놈이야.’
저 멀리서 무식하게 달려오는 개자식의 얼굴은 꽤나 익숙하다.
박덕구 만큼이나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인.
발렌틴 알렉산드로.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로나프의 학살자, 로나프의 싸움꾼.
라이오스 사태 때 정하얀의 마법에 오른팔을 다치면서까지 악마 소환사 진청을 구해낸 개자식.
마치 전차처럼 아군을 밀고 들어오는 녀석의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당연지사.
‘위치가 발각된 건가?’
아마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집중적으로 마법 포격이 떨어지지는 않았으니까.
아마 이 예비대를 본대와 합류시키기 싫기 때문에 녀석을 이쪽으로 투입시킨 모양이다.
너무나도 쉽게 중갑을 입은 전사들을 날려 버리는 모습은 어째서 저 정도의 힘을 지닌 이들을 규격 외라 부르는지 잘 알려주고 있었다.
굉음을 내며 피를 뒤집어쓴 녀석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중형 몬스터.
‘아군 지원은 없는 건가.’
이지혜도 이쪽을 신경 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군 병력에게 완전히 감싸진 아군의 상황상 시간 안에 지원해 주지 못할 확률이 클 것이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틀림없이 아군 병력이 길을 뚫고 있을 것이다.
사국동맹의 깃발이 눈으로 확인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저게 시간 안에 올까?’
물론 와주면 좋겠지만 와준다고 해도 문제.
저 미친 고릴라를 막아야 한다는 건 이쪽에게도 커다란 부담이다.
‘아니. 막을 수는 있어.’
지금 있는 병력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연금소환과 용 숨결 물약으로 시간을 버는 건 가능하다.
만일을 대비해 빛 폭탄 물약도 가지고 있으니 어쩌면 저 무식한 새끼와 잠깐이라도 비빌 수 있을지 모른다.
내 옆에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방패가 함께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 이후, 내 위치를 확인한다면 본대와 합류하기도 전에 예비대는 적 병력의 견제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당장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막고 최대한 빠르게 마중 나온 병력과 합류.
불안한 감은 있었지만 그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에 가깝다.
입을 여는 것은 순식간.
박덕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덕구야, 전투 준비해라.”
“이길 수 있는 거요?”
“가능할 거다. 준비나 해. 저거 마중 나가야 하니까.”
“…….”
“…….”
“형님.”
“왜.”
“나도 바보는 아니요.”
“뭔 개소리야. 갑자기.”
“대충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 이 말이요. 지금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도 알고 형님이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도 알고 있다니까. 아니, 형님이 여기 있다는 걸 적이 알면 안 되는 거… 뭐, 그거나 이거나 똑같긴 하지만.”
“닥치고 준비나 해, 돼지새끼야. 정말 급하니까. 농담 받아줄 시간도 없고.”
“형님은 먼저 가쇼.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까.”
“지랄하지 마. 이게 만화영화 같아? 괜히 명장면 만들려고 무리수 두지 말고 입 다물고 전투 준비나 해. 농담하는 거 아니니까.”
“먼저 가라고 했소. 여기는 내가 맡을 거요. 아마 남은 병력이 본대까지 데려다 줄 거요.”
“무슨 개소….”
순간적으로 박덕구가 내 어깨를 잡았다.
워낙 커다란 몸이다 보니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
이상하게 이전에 봤던 모습이 계속해서 오버랩 된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서 봤던 1회 차의 기억이다.
“꼴사나운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니까. 어째서 형님이 그렇게 침착하게 전장에 서 있을 수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소. 배려해 줘서 고맙고 함께해 줘서 고맙고 또 고맙소. 멍청한 소리처럼 들릴 거라는 거 당연히 알고 있소. 형님이 날 많이 믿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개 같은 짓 하지 마!”
“형님이 할 수 있으면….”
“지랄하지 마! 주제도 모르는 미친 돼지가!”
“나는 더 잘할 수 있다니까.”
녀석이 나를 휙 밀쳤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린 나를 아군 전사들이 받아들었다.
박덕구와 이쪽의 사이로 다시 한번 전쟁에 휘말린 병력들이 뒤섞인다.
로나프의 싸움꾼이 커다란 몸을 이끌고 쇄도해 오는 것은 순식간.
주제도 모르는 돼지가 커다란 방패를 등지고 놈의 팔을 부여잡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콰아아아아아앙!
커다란 충돌 음과 함께 두 손을 맞대고 있는 장면이 내가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장면.
“이 멍청한 돼지새끼!!”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