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8
회귀자 사용설명서 408화
디아루기아, 율리에나(2)
콰득! 콰지지지직!
적 병력을 개미처럼 밟아버리는 모습은 기가 찰 지경.
거대한 뿔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의 모습은 외관만으로 경외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실제로 적 병력들의 반응도 그렇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든 녀석이 있는가 하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녀석도 있었고 심지어는 눈을 비비고 있는 녀석도 있다.
용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사전 브리핑을 통해 전해 들었겠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과 실제로 목도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특히나 본래 이곳에 자리 잡았던 대륙인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한 크기.
본능적으로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거대한 눈, 거대한 이빨과 발톱, 광택이 나는 흑백색의 외피는 어지간한 방어구보다 단단해 보인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내구 수치는 일반 병사의 공격 정도는 가볍게 무시한다.
기본적인 마법 저항력 역시 상상이상.
괜스레 콧대가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쉽게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약점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전장에서 이보다 듬직한 아군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제….”
“공격! 공격! 마법 쏟아 부어!”
“드래곤이다! 드래곤!”
“날개를 공략해! 날개! 브리핑대로 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전담부대 위치 확인! 드래곤 전담 부대 위치!”
벌써부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지만 우리 자랑스러운 드래곤 장군님에게는 인간 동무를 비롯한 인민들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모양.
부피가 커다란 꼬리를 한 번 휘두르자 주변에 있는 적 병사들이 한꺼번에 하늘로 솟구쳤다.
땅을 긁고 올라간 꼬리가 방패를 든 병력을 쓸어버리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
콰드드드드득!
“어어어?”
“피해!”
콰아아아아아앙!
마치 마법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모양새.
물론 겨우 이걸로 끝날 리가 없다.
숨을 크게 들어 마신 이후에 적이 있는 쪽에 브레스를 쏘아내자 커다란 빛줄기가 순식간에 뿜어져 나왔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은 한참이나 뒤로 밀려나기 시작.
거대한 방어 마법진이 브레스가 떨어진 곳을 감싸 안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우직우직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금이 간 보호 마법 사이로 쏟아진 브레스는 고스란히 적군에게 피해를 안겨주고 있는 중이다.
독박육아의 울분을 토해내듯 입에서 뿜어져 나간 브레스의 위력은 보기만 해도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얼마나 피해를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속 시원한 장면이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사랑해, 임자!’
나도 모르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게 된 것은 당연지사.
신나게 덩실덩실 봉산탈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억울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주변에 보는 눈들만 아니었더라면 이미 디아루기아의 다리에 달라붙어 열렬한 입맞춤을 보내고 있었으리라.
그만큼 디아루기아는 속 시원하게 주변 적군의 뚝배기를 깨부수고 있다.
그녀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율리에나 역시 마찬가지로 활약 중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에고소드는 좁고 밀집된 전장의 사이로 파고 들어가 일반 병사들의 목을 거침없이 꿰뚫었다.
물론 어느 정도 수준이 높은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기는 했지만 율리에나를 감당할 수 없는 병사들 역시 넘쳐난다.
사방팔방 모기처럼 날아다니며 종횡무진하는 한 자루 검의 모습은 정말로 신기하게 느껴진다.
‘이래서 에고소드! 에고소드!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형적으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종류의 인간.
내가 그런 인간이라는 걸 부정하지는 않지만, 내 전투능력 역시 이런 성격을 따라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양민 학살자!’
나 스스로 내리기에는 조금 기분 나쁜 별명.
하지만 이 단어보다 내 전투능력을 잘 표현하는 말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입꼬리는 이미 찢어질 정도로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늦지 않게 온 겁니까?
-게드릭! 나의 게드릭!
-늦은 건 아닌지 묻지 않습니까, 당신!
-나의 게드릭!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건가요! 어째서 그동안….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길래…. 막스와 루리아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겁니까? 얼굴 보기도 참 힘들군요. 그래서 그 아픈 몸은 전부다 회복되신 게 맞습니까? 참으로 아프셨겠습니다. 네. 정말로요.
-게드릭, 게드릭!
-당신 제 말 듣고 있는 겁니까? 들리면 들린다고 뭐라도 대답을!
-게드리익!!
순간적으로 머리를 뒤흔드는 소음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다.
듣기 싫은 잔소리와 게드릭을 울부짖는 목소리가 이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진 것은 처음.
아마 서로가 서로의 울림을 듣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열심히 쏟아내고 있었으니까.
조금 머리가 울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짜증이나 미친 짓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일단은 디아루기아 먼저.
‘아니요. 딱 맞게 도착해 주셨습니다, 디아루기아. 어떻게, 우리 똘똘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잘 지내고 마다요. 당신이 아프다는 소식은 또 어디서 전해 들었는지 따라나서겠다는 걸 말리는 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네. 정말로 고생했었습니다.
‘걱정할 만한 상태는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좋았을 텐데.’
-그럼 아버지가 자신을 보러오지 않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합니까? 물론 당신도 당신 나름의 삶이 있고 일이 있다는 건 이해하고 있지만… 이런 쓸데없는 전쟁 때문에 가정을 등한시하는 일은 없도록 해주세요. 막스도 많이 섭섭해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루리아와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네.’
-인간들은 어째서 매번 이렇게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건지….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가 일으킨 전쟁이 아닙니다. 저들이 시작했고 저들이 먼저 터뜨린 전쟁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소중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함이니 정상참작을 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디아루기아. 가만히 놔뒀다간 소중한 둥지가 있는 린델까지 병력을 밀고 들어올 텐데 그것만큼 최악의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이 안에서 가정을 지키는 동안 저 역시 바깥에서 가정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
‘큼. 큼.’
-여전히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군요. 당신이라는 인간은…. 후우….
‘뭐 전부 사실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시 한번 울분을 토해내는 얼굴에 왠지 모르게 짜증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수는 없는 모양인지 열심히 꼬리를 후려치는 걸로 화를 삭이고 있다.
‘그보다 지금….’
-박덕구라는 인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는 길에 그쪽으로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내렸으니까요.
‘네?’
-붉은 머리를 한 인간 말입니다. 차희라 그 사람.
‘요, 욜로….’
-욜로가 뭡니까?
대충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차희라가 박덕구 쪽으로 갔다고 생각하자 커다란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올라간 입꼬리가 더더욱 올라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산 박덕구의 뚝배기가 완전히 산산조각 날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은 이동할 준비를 해주세요.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위험할 겁니다. 하늘에 올라가 지속적으로 견제해 주시는 것도 좋고요. 아니… 그것보다는 함께 본대 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오랜만에 만난 부부의 대화치고는 형식적이고 딱딱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계속해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라 제대로 대화에 집중할 수 있을 리 만무.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율리에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통에 제대로 대화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게드릭, 게드릭 외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때려대고 있는 중.
빠르게 대화 채널을 바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게드릭! 내 목소리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게드릭! 게드릭! 게드리리이기익! 게드리이이익!
한 번 숨을 가다듬고 마음속으로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아직까지 율리에나를 만날 준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대충 스토리는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아아. 나의 율리에나.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겁니까.’
-게드릭! 목소리가 닿았군요. 게드릭! 나의 모든 것. 나의 사랑. 나의 전부!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게드릭! 나의 게드릭!
‘그동안 그대를 만나지 못한 것은 바로 저들 때문이오. 이 더러운 악마의 무리들이 지난 시간 나를 감금하고 고문하고 겁박했소. 그동안 얼마나 그대가 보고 싶었는지 모르오. 나의 율리에나여!’
-아….
‘이 악마의 무리들은 대륙을 악마의 소굴로 만들려고 하고 있소.’
사실 저번에 마력을 쪽쪽 빨리던 기억 때문에 그녀를 기피했을 뿐이었지만 충분히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괜찮은 변명.
조금 더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사랑이라도 속삭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녀의 상태를 보니 사전 설명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더러운 놈들이. 이 더러운! 이 더러운 놈들이 감히!!!
“…….”
-찢… 찢어 죽일 것이다. 네놈들을 찢어죽일 것이야!
“이게 뭐야.”
-쓰레기 같은 놈들. 감히, 감히!
율리에나 주변에 검은색 기운이 가득차기 시작한 것.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든 것은 당연했다. 검은색 희미한 연기가 뭉치는 것은 물론 무언가 이상한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통제를 벗어난 분노로 인해 전설 등급의 무구 ‘저주를 내리는 율리에나’가 강제로 각성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야….”
[율리에나의 봉인이 일시적으로 풀리며 실체화가 진행됩니다. -지속시간 60분]
“뭐?”
-네놈들, 네놈들. 네놈들이! 가암히! 감히! 나와 게드릭을 방해하려해? 네놈들이 감히이이이이!!
“…….”
‘이런 미친.’
입을 떡 벌리게 된 것은 당연했다.
시스템의 메시지에 혹시나 하며 율리에나를 살펴봤지만 정말로 실체화가 진행 중이다.
예전 저주받은 신단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눈.
괴기스럽게 생긴 검은색의 미친 여자 한 명이 그 자리에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본인이 몸을 가지게 됐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통제가 불가능해 보였다.
심지어 저주받은 신단에서 만났던 때보다도 강해 보인다.
대충 봐도 전설 등급 정도로 보이니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가아아암히! 감히! 나의 게드릭…. 나의 게드릭을 감금하고! 또, 또! 겁박하… 겁탈해? 네놈들이? 네놈들이!?
겁탈 당했다는 설정은 없었다.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 저주, 저주가 내리리라. 저주가! 내리리라!! 네놈들에게 전부 저주가 내릴 것이다!! 죽어서도 고통 받을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뼛속까지 고통 받게 하리라!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그 괴기스러운 외모는 무언가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나보다 더 당황한 것은 전투를 치루고 있는 병사들.
저주를 뿌리는 것은 물론 사방에서 검은색 촉수를 불러내 주변의 적들을 찢어 죽이고 있다.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꼴은 심지어 악마에게 영혼을 판 광녀처럼 보일 지경.
‘저건 모르는 척해야겠는데.’
그 말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