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9
회귀자 사용설명서 409화
디아루기아, 율리에나(3)
필사적으로 모른 척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게 당연했다.
‘미쳤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전투가 진행될수록 내 생각보다도 율리에나가 정신이 나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과 재회했던 것도 잠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마의 세력이 자신의 연인을 납치하고 감금한 상황이다.
두 사람이 이전에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렇게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스토리에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지기는 했지만 일단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이 그만큼 괴기스러웠기 때문.
-저주가! 저주가 내리리라! 저주가! 네놈들의 주검을 이끌고 온갖 대륙을 돌아다닐 것이다. 죽어서도 고통 받을 수 있게 가장 비참한 죽음과 마지막을 선사해 주리라!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이 더러운 놈들! 네놈들의 시체를 짓밟고 네놈들과 관련된 모든 이를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영겁의 고통을 받게 하리라!
검은색 연기가 밀집해 있는 적 병력을 감싸는 것은 순식간.
계속해서 정화 주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지만 율리에나의 저주는 신성력으로 컨트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단기간에 효과를 보는 종류의 능력은 아니었지만 전쟁터에 가운데 선 병력에 영향을 주는 것은 충분.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제기랄! 가까이 오지 마!”
“아아아아아아악!”
“막아! 오지 못하게 해! 어머니, 어머니!”
“사, 살려…. 도망쳐! 도망쳐! 다 죽을 거야! 우리는 다 죽을 거라고!”
이쪽이 기분 좋아질 대사를 외치고 있는 녀석부터 뜻밖의 효자가 된 녀석까지.
찢어진 입을 벌리며 검을 휘두르는 율리에나의 모습은 검사라기보다는 미치광이에 가깝다.
“오지 마!”
-받아 마땅한 고통이다! 꺄히하하하핫! 벌레 같은 인간들! 흉측한 인간 놈들! 네놈들이 받아 마땅한 고통이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어!!
그녀에게서 사방팔방 뻗어 나오는 촉수들이 적군 병사의 갑옷을 너무나도 쉽게 뚫어냈다.
심지어 촉수에 찔린 이들은 쉽게 죽지도 않는다.
부들대며 온갖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이들을 보니 이미 저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모양.
이미 죽은 병사의 시체를 몇 번이나 난도질 하고 있는가 하면 검의 손잡이로 계속해서 머리를 후려치는 모습도 보인다.
전투가 진행될수록 저주의 영향을 받은 적 병사들이 혼란스러움에 소리를 질러댔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공포를 느끼는 게 당연하리라.
심지어 나 역시 이 공간에 함께 있고 싶지 않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순식간.
아군 병력도 질린다는 듯이 율리에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괜스레 양심이 찔려와 한마디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위험하군요. 제, 제가 억눌러 왔던 봉인이 풀린 모양입니다.”
“아….”
당연히 개소리지만 일단은 이렇게 우길 수밖에 없다.
누구한테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병사들을 보니 약간이지만 안심할 수 있었다.
‘이래서 평소 이미지가 중요해.’
“그, 그렇군요. 명예추기경님, 그럼 저건….”
“일단 여러분은 길을 따라 본대와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명예추기경님은….”
“저는 먼저 가 있겠습니다.”
“어떻게….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뜬 이후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디아루기아를 바라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모양이다.
나 역시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주변 병사들은 혹여나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나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현재 이곳은 확실하게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율리에나가 온갖 시선을 다 끌어주고 있었기 때문.
고군분투해 주는 그녀와 함께 싸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절대로 율리에나와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서가 아니다.
이쪽 나름대로 해야 하는 일이 있었으니 이건 불가항력에 가깝다.
‘그래. 이건 불가항력이야.’
-게드릭! 게드리이이이익!
내가 멀어지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뒤쪽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귀가 떨어질 것 같이 들려왔다.
유리창을 긁는 듯한 목소리는 오금이 저려올 정도.
서둘러 이쪽으로 오고 싶은 것 같지만 이미 그녀의 주위로 몰려오는 적에게 발목을 잡혔다.
바야흐로 율리에나 레이드가 시작 된 것이다.
-게드릭! 감히! 네놈들이! 네놈들이! 나의 게드릭을! 당장 비키지 못해?! 벌레만도 못한 인간 놈들이!
“둘러싸!”
“저주에 영향받지 않게 주의한다. 전위들은 앞을 지켜!”
“검에 베이지 마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원거리전으로 끌고 간다. 정화 마법 유지해!”
전쟁터 한가운데서 펼쳐진 이상한 싸움의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라 말할 수 있는 장면.
-비켜! 비키라고!
“아아아아아악!”
“제기랄!”
-저주가 내리리라! 저주가! 나와 게드릭을 방해하는 모든 이는 저주를 받아 처참히 죽어갈 것이다!
“커헉!”
-아아! 게드릭!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나의 게드릭!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당신의 작은 아기 새가 곧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어떻게 봐도 아기 새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외관.
괜스레 식은땀이 흘렀지만 최선을 다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조금이라도 저 정체불명의 생명체와 멀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뛰자 이윽고 내가 올라타기 쉽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디아루기아가 시야에 비친다.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가지고 온 게 실수였나 보군요.
“아뇨.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단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 위로 올라가겠습니다.”
-당신을 태우고 싶지는 않지만….
“…….”
-알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황급히 발걸음을 옮긴 이후 뿔 부분을 꽉 손에 쥐자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했던 예비대가 점점 작게 보이기 시작.
모두 감동이라도 한 모양새다.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동화 속 주인공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의 예를 표현하는 것으로 마무리.
역사서에 나오는 영웅들의 출사표 같은 느낌을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용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중의 선망을 받기에 충분하다.
하물며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가 용을 타고 있다.
무언가 내가 전부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맹목적인 시선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저들의 입장에서는 동경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리라.
이제는 익숙한 시선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도 됐다고 생각했다.
“부탁드립니다, 명예추기경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짧게 인사를 나눈 뒤, 화살과 마법이 솟구치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디아루기아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멋있는 척을 한 이후에야 그녀의 뿔을 두드리며 입을 열 수 있었다.
이미지 관리는 중요하니까.
“갑시다, 디아루기아.”
-하늘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지상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당신을 상대하기 위한 전담부대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 테니까요. 굳이 이점을 살리지 않을 이유가 없죠. 아, 그리고 날기 전에 날갯짓 한번 해주시고 커다랗게 하울링도 부탁합니다. 모두 이쪽을 쳐다볼 수 있게.”
-저는 구경거리가 아닙니다만.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광대 흉내를 내라는 게 아닙니다. 쇼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이게 다 사기를 높이기 위한 작업입니다. 당신도 당신의 존재가 얼마나 상징적인지 신성한 민주혁명 때 목도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저들한테 뽐낸다고 생각하시고 멋지게 포즈 한번 잡아주세요.”
-그다지 내키지 않습니다만.
“이 싸움은 역사 속에 기록될 겁니다. 아마 당신과 제 모습 역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 나올 겁니다. 용의 선택을 받은 인간 같은 걸로 말입니다. 우리 디아루리아가 배울 역사책에 등장하는 겁니다. 악마의 군대에 대항하는 빛의 연금술사와 그의 와이프! 당신도 대륙에 얼마 남지 않은 용으로서 균형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저들이 악마의 군대가 맞기는 합니까?
“암요. 그렇고말고요. 만약 악마의 군대가 아니라고 한들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편인데. 아,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어둠의 군대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라이오스에 악마군주를 소환한 건 틀림없이 적들의 수장이 맞습니다. 악마 소환사 진청. 그자가 이 일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
“정말이라니까요. 자, 빨리 똘똘이에게 존경받는 부모가 되어 봅시다. 우리 디아루리아 역시 인간들의 존경을 받을 겁니다. 틀림없이요.”
-…….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채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다.
아군과 적군 가릴 것 없이 디아루기아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점프하듯 하늘로 뜬 이후에는 여러 마법들이 그녀를 목표로 올라오기 시작.
물론 저런 멍청한 공격에 맞아줄 정도로 디아루기아는 느리지 않다.
위협이 되는 공격이 있기야 하지만 하늘에서 요리조리 공격을 피하는 모습은 마치 잘 만들어진 공중 전투 신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나는 그녀의 위에 있으니 4DX를 경험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얼굴로 쏟아지는 바람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쉬기도 힘들 지경.
입을 열기 쉽지 않아 속으로 말을 걸자 다시 한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것은 피하셔야 됩니다. 아마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마법일 겁니다. 속박 마법에 한 종류처럼 보이는데 걸리면 그대로 추락할 겁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마력의 밀집도를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겠군요.
‘기본적인 홀드 마법은….’
-아마 저항할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고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푸른색의 커다란 마력 밧줄이 사방팔방에서 디아루기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가지고 있는 용 숨결 물약을 꺼내 던지자 커다란 소리와 함께 푸른색의 마력 밧줄이 터져나간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녀를 향해 뻗어오는 공격은 쉽게 피하기 힘들어 보였다.
디아루기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 듯.
수준 높은 마법사가 쏘아 보낸 마법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모양인지 피할 수 없는 것들은 상쇄시키고 있었다.
단순히 요리조리 피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런 행동은 적 지휘부의 신경을 긁기에 최적의 행동이리라.
직접적인 피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적군에게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디아루기아를 위한 전담 부대와 전담 마법이 만들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다.
‘우리 현성이는 어디 있나.’
계속해서 찾고 있기는 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쉽게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마법을 피하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등 위였으니까.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마다 최대한 살피고 있지만 워낙 범위가 넓다 보니 전부 다 체크하기가 쉽지 않다.
한 가지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에 목표물로 설정했던 마법사 부대가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
아무래도 이쪽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무사하겠지.’
이곳을 보고 있다면 틀림없이 본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으리라.
현재 아군 전력에 여유가 생기고 있었으니 충분히 몸을 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쪽에서 거대한 마력의 유동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력의 유동이 아니라 거대한 압력이었다.
‘뭐야, 저게.’
어처구니없게도 하늘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은 운석.
“미친….”
똘똘 뭉쳐 있는 본대를 향해 커다란 운석 하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어썸하네. 진짜. 진청, 이 쓰레기 같은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