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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16화 (415/1,590)

# 416

회귀자 사용설명서 416화

살기 좋은 세상(1)

-전쟁은…. 전쟁은 끝났습니다. 네. 전쟁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 서로를 향하 검을 뻗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많은 오해가 있었고 그만큼 서로를 적대하던 기간이 길었습니다. 단순히 이번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로 싸우며 상처 입히고 경쟁했던 그동안의 역사가 역시 이제는 모두 막을 내렸습니다. 증오를 버리는 것. 복수심을 벌리는 것. 분노를 내려놓는 것.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

-교국과 공화국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아끼는 이들을 잃었습니다. 누구는 사랑하는 이를, 또 누구는 소중한 전우를, 또 누구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모두가 극복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서로가 검을 겨누던 적이 손을 마주잡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더욱더 큰 가치를 위해 한 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조금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아픔을 딛고 그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

-공화국 여러분은 고개를 드십시오.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교국의 여러분은 손을 뻗어 주십시오.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거대한 흐름 앞에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는 그 누구보다 우리가 더욱더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눈물을 흘릴 필요도 주저앉아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함께 갑시다. 이 증오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모두가 함께 움직입시다.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는 다를지 모르지만 우리는 커다란 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대륙을 위협하는 이들은 실존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대륙 곳곳에 숨어 신들이 빗어낸 이 땅을 노리고 있습니다. 오늘 베니고어 여신께서 여러분들께 남긴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앞으로 다가올 고난과 역경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오늘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곧 새살이 돋을 것입니다. 먹구름이 걷히고 태양빛이 쏟아지는 지금처럼…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피로 얼룩진 이 땅 위에도 꽃이 필 것입니다.

-…….

-함께 갑시다. 신의 뜻 아래 우리들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묘하게 조용해진 장내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숙연해지는 게 당연하리라.

본래대로라면 한참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들이 들려왔겠지만 여신의 거울에서 흘러 들어오는 영상을 본 이후에는 이 장소도 조금 진지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옆에 있던 닉이 입을 열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조금은 듣기 싫은 목소리였지만 오늘은 녀석이 떠들어대는 걸 참아 볼 생각이다.

전쟁 이후 벌써 일주일이 흐른 상황.

여러 가지로 아는 게 많은 녀석인 만큼, 여러 가지 정보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참… 대단하신 분이야.”

“아암. 저건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니까. 그러니까 여신의 거울에서도 매일같이 나오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대단하고말고. 저분이 어디 보통 분이신가. 아마 저러기도 쉽지 않을 거야. 저분 역시 가장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신 분이 아닌가. 실제로 라이오스 사태 때는 돌아가실 뻔하기도 했고. 에베리아 왕국에 있었던 것도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보면 사실 가장 큰일을 겪으신 거나 다름없지. 사실 저 상황에서 아무 조건 없이 공화국 병사들의 손을 들어준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릇이 크신 거지.”

“아암. 그렇고말고. 나도 저 자리에 있었는데 정말 대단했다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 실제로 공화국 병사들도 질질 짜기는 했었는데 아마 걔네들 같은 경우에는 나보다 더 했겠지. 사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몸에 베니고어 여신이 강림하신 것도 직접 봤었는데 말이야.”

“정말인가?”

“그렇고말고! 여신의 거울로 보는 거랑은 상대도 안 된다니까? 손을 막! 한 번 슉 하니까 언데드 놈들이 막! 한 번에 허물어지고! 왼쪽 손을 한 번 더 휘두르니까 완전히 빛에 휩싸여서 펑퍼펑펑펑펑! 베니고어여신께서 강림하신 것 말고도 그전에도 창을 들고 전장에 직접 뛰쳐나오셨다니까. 믿겨지나?”

“허….”

“아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거야. 실제로 그 악마 소환사 놈은 끝까지 숨어 있다 끌려나오지 않았는가. 쯧. 참 저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끔찍하다니까 끔찍해. 지금까지 공화국병사들과 치고 박다가 결국….”

“그렇게 끝나면 다행이지. 아마 그 전장에서 살아 돌아올 수도 없었겠지. 아무튼 그래서… 지금 명예추기경님은 뭘 하고 있는 지 아는 사람 있나?”

당연히 닉에게로 시선이 집중된다.

녀석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잔에 들려 있는 물을 벌컥 벌컥 들이켠 뒤에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 이게 좀 말하기 힘든 내용인데….”

“그러지 말고 좀 알려주는 게 어떻겠나. 이렇게 내가 오늘 밥도 살 테니까.”

“아마 곧 여신의 거울로 공식적인 내용을 전달받을 수 있을 텐데. 아니 이건 여신의 거울로 전달받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우리가 몇 년 친구인지 잊은 건 아닐 거라고 믿네, 닉.”

“큼. 이게 정말 말하기 힘든 내용이라… 자네들이 제대로 입단속을 한다고 하면 시원하게 말해주겠네. 정말로 약속해야 하는 내용이야. 파란 길드에 김미영 팀장님의 특별 지시사항이라 나도 어렵게 구한 정보라서.”

“아암. 그렇고말고. 내 입을 꼭 다물고 있겠네. 그러니 좀….”

슬쩍 비어 있는 잔에 맥주를 채워주자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여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사실은… 건강이 그리 좋지는 않으신 것 같더라고.”

“뭐?”

“쉿.”

“조용히 해. 마이클! 제기랄.”

“아. 미안하네. 미안해.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해 보면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지. 어디 인간의 몸으로 신을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인가? 그분이 아무리 베니고어 여신님을 담을 그릇이라 하더라도 무리가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야. 안 그래도 병상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라고 했었으니까. 그나마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고는 있지만….”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고말고. 저번 라이오스 때처럼 또 많은 이가 성 앞을 지키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시는 것 같더라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셨으면 서도 여전히 우리 같은 놈들을 신경 써주시고 계신 거지.”

“허….”

“물론 대외적인 이유도 있고.”

“대외적인 이유?”

“현재 그분이 평화의 상징 같은 게 아닌가. 사실상 전쟁을 완전히 종결시키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고 만약 그런 분께서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겠어? 지금 논의되고 있는 이야기가 전부 뒤집어 질까 걱정하시는 게 틀림없으신 거겠지.”

“튜토리얼 던전들을 완전히 통합해 하나의 교육소로 운영한다는 거?”

“그것뿐만이 아니지. 공화국과의 동맹 문제나 대륙종전선언문, 대륙평화협정, 새로운 이종족 차별금지법의 발의. 정치적, 경제적, 심지어 군사적으로 얽혀 있는 게 많아. 물론 나도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 같이 다들 민감한 사안인데… 안 좋은 몸을 이끌고 계속해서 대외활동을 하는 것 역시 그런 이유라고 하더라고. 뭐, 가슴 아픈 일이지. 측근들이 그만큼 도와주고는 있지만 그래도 모든 걸 직접 해결하셔야 속이 시원한 모양이야. 김미영 팀장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파란 길드 내에서도 조금 만류하는 분위기이기는 한데 어디 그분 열정을 꺾을 수가 있겠는가. 최근에 잠깐 쉬게 된 것도 김현성 님의 부탁 때문이라고 그러더라고….”

“전쟁영웅.”

“그러고 보니 그분도 굉장했지. 그런 사람들이 한 명도 아니라 두 명이나 교국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것도 전부 다 복이야.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복을 내려주신거지.”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긴데… 혹시 진청에 대해서 새로 들어온 정보는 있나?”

“뭐, 그 개자식이야. 매번 똑같지. 당장 목을 쳐도 시원치 않을 개자식. 어째서 그런 놈을 재판대에 올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야. 아직도 자기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라고 울부짖고 있는데. 아, 지금 나오는구만. 여신의 거울 좀 보게나.”

-공화국의 큰 혼란에 빠뜨렸던 악마 소환사 진청의 재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모든 이의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린델방송의 김성경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김성경 기자?

-린델방송의 김성경 기자입니다. 지난 2일 공화국에서 악마 소환사 진청의 신병을 인도받은 교국의 이단 심문관 헬레나가 마를린 의원과 함께 마침내 수도로 도착했습니다. 전 대륙에 관심이 쏠려있는 사건이었던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이곳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교국이 자랑하는 신성기사단은 물론 이례적으로 교황성하와 오스칼 님께서도 직접 자리한 모습입니다.

-나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야. 나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란 말이다. 꺼흐으윽. 이기영 이 개자식. 이기영!! 이기여어어어엉!!! 나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란 말이다! 콜록! 네놈들은 속고 있다! 진짜 악마는 그 자식이야! 그 자식이 진짜 악마라고!

-입 막아!

-나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언데드도 악마도 소환한 적이 없단 말이다…. 나는 아니야!! 콜록! 콜록!!

-일각에서는 곧바로 처형하는 것이 대륙의 안전을 꽤하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확한 사건의 진상을 파악과 대륙에 뿌리내린 어둠의 세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교국 이단 심문관의 입장입니다.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해 봤을 때 수사는 이단 심문관에서만 그치지 않고 여러 기관을 통한 다방면의 기관에서 조사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공화국이 악마 소환사 진청에 대한 조사 협조를 최대한 지원한다고 약속한 가운데 모든 대륙의 관심이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김성경 기자였습니다.

-네. 다음 소식입니다. 조금은 딱딱한 이야기로 마음이 무거우셨을 분들을 위한 소식입니다. 베스트셀러 천재 검사와 연금술사가….

“저저… 악마 소환사 저거!”

“저런 때려죽일 놈! 퉤!”

다음 소식이 미처 나오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고함 소리와 함께 욕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여기도 다르지 않다.

아마 모두가 똑같은 마음일 것이 분명.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모습에는 기가 찬다는 반응이었다.

“저런 쓰레기 같은 새끼. 도대체 조사할 게 뭐가 있다는 거야! 당장 단두대에 올려 버려야 된다니까.”

“쯧. 여신의 거울에 비친 얼굴 봤나. 눈깔도 아주 벌게져 가지고. 누구 하나 때려죽일 기세더만! 처음에 잡혀 올 때도 저런 모습이었다니까. 공화국 병사들한테 붙들린 채로 오는데 어찌나 소리를 지르던지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니까?”

“저놈뿐만이 아닌 게 더 문제지. 여기저기에 어둠의 세력들이 숨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처형하는 데 한 손 보태고 싶지만, 여러 가지 정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처형할 수는 없지. 정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는 게 교국의 입장이기도 하고. 신성한 민주주의 혁명 때도 그랬으니까. 저런 쓰레기 같은 놈이라도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은 정당한 재판을 받게 하고 싶으신 거야. 그것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 꼴이라니….”

“악마 소환사가 괜히 악마 소환사겠는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지. 아무튼 간에 내일은 다들….”

“아, 오랜만에 사냥이나 나가볼 생각이네. 몬스터 사냥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전쟁이 길어져서 조금 개체 수가 늘기도 했고.”

“사냥 나가기에는 몸이 조금 편치 않은 거 아닌가? 사울? 아직 상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본다.

“뭐, 그렇긴 하지. 사실 나 같은 놈이 열심히 해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만은…. 그래도 언젠가 써먹을 때가 있지 않겠어. 조금 더 쉬고 싶기는 하지만 베니고어 여신님과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해주신 말씀처럼 한 발 나아가야지. 명예추기경님도 쉬지 않고 있는데 나도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뭐, 그럼 먼저 일어나겠네. 좋은 이야기 고마웠네, 닉.”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사울.”

“응. 그래야지.”

천천히 주점의 문을 열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전쟁이 끝나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달라진 것들이 보였다.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거리를 거니는 광경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 다양한 건축물이나 달라진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세상.’

그 생각 그대로.

“참 살기 좋은 세상이야.”

조용히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참 살기 좋은 세상이야.”

“역, 역시 그렇죠?”

“우둔살 살살 녹는다.”

“사, 살, 살살 녹는다아. 헤헤헤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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