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
회귀자 사용설명서 419화
위쪽에서 생긴 문제(2)
뭔가 메시지가 뜬 것 같기는 했지만 당연히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의심의 씨앗이 싹을 튼 것으로도 모자라 꽃봉오리가 맺혔다.
지금 와서 내 사고를 막아보려고 한들,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백 번 양보해 아주 약간은 의심의 시선을 거둘 수 있지만 준비하고 있는 걸 캔슬할 정도로 착해빠지진 않다.
‘내가 그 정도로 멍청할 것 같아?’
내가 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
이 메시지는 일방적으로 들려온 메시지다. 누가 보내온 건지도 모를 퀘스트. 심지어 이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퀘스트 생성을 중단한단다.
신뢰도가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일시적으로 퀘스트 생성이 중단됩니다.]
‘알 수 없는 이유는 개뿔….’
어쩌면 문제가 생겼다고 연막을 친 이후에 뒤통수를 후려치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베니고어는 모르겠지만 엘룬 쓰레기라면 충분히 가능한 행동.
자신만을 믿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엘레나를 과감하게 버린 걸 보면 베니고어가 나를 버리는 장면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애초부터 이 타락한 신들에게 인정과 의리는 없다. 자기 자신의 탐욕과 이득을 위해서라면 아들딸들의 뒤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는 못된 부모들.
‘가시는 길 편하게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려장이라는 잘못된 풍습을 혐오했던 나지만 이번만큼은 지게에 베니고어를 싣고 산으로 올라갈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아직까지 실행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지만 만약을 위한 안전장치도 불안한 것이 사실.
상대가 타락한 신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아직도 부족하다.
이지혜에게 따로 넣을 매뉴얼을 작성하며 가지고 있는 물품을 점검하는 것은 순식간.
일단은 나 자신이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강제 각성의 후유증으로 조용해진 율리에나와 갖가지 효능을 가지고 있는 포션들, 전설 등급의 방패 아이기스를 장착하는 것은 물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무장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한다.
겉모습은 마치 원정이라도 떠나는 모양새.
단순히 수도에 다녀온다고 하기에는 과하지만 그제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나도 어느새 현지인이 다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조용히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인지는 뻔할 뻔 자. 활짝 웃으며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하얀아?”
“오빠, 부르셨어요?”
“아. 잠깐 기다려. 곧 나갈 테니까. 이야기는 들었어?”
“네. 수, 수도로 가신다고요. 급한 일이 생기셨다고….”
“응.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가게 됐는데. 괜찮은 거지?”
“네. 무, 물론이죠.”
“희라 누나도 같이 갈 거야. 엘레나와 혜진 씨도.”
“…….”
조금은 뾰루퉁한 얼굴.
인선에 대해서는 이미 전해 들었겠지만 막상 내 입으로 다시 들으니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크게 신경 쓰지 마.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게.”
“아!”
팔을 살짝 벌리자 조용히 안기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스스로가 내뱉은 오글거리는 대사에 닭살이 돋아나기는 했지만 받는 대상은 저런 대사를 즐긴다.
고객에 입맛에 맞추며 목줄을 채워두는 게 중요하다.
정하얀 역시 주요인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김현성과 마찬가지.
대체 불가능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마법사 정하얀은 인간들도 모자라 신들도 탐내는 종류의 인간이다.
본래 잘 케어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어루만져주는 게 중요하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맡은 바 임무도 잘해주고 있고 결혼이라는 안정제로 분노조절을 완화시켜주고 있는 지금 정하얀의 상태는 최상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최근에는 바닥을 쳤던 자존감 역시 하늘을 뚫을 정도로 올라가고 있는 상태.
어마어마하게 강해지기도 했고 프로포즈를 받음으로써 달라진 뉴타입 정하얀은 내가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걸 참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목숨을 걸고 얻은 결과가 겨우 이 정도라 생각하면 조금 씁쓸하기는 했지만 이런 심적 안정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서론이 길기는 했지만 여기서 중한 것은 현 정하얀의 정신 상태는 굉장히 안정되어 있다는 거다.
“그런데 갑자기 무, 무슨 일이에요? 조금 더 푹 쉬셔도 조, 좋을 텐데. 계속 누워계시지 않고….”
“교단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떤 사고가 생길지 모르니까. 그보다 엘레나는 같이 안 왔어?”
“혜진 씨랑 밖에서 준비하고 있어요. 떠날 준비요. 이, 일주일은 있는 다고 하셨으니까. 길드 직원들도 짐을 챙기고 있고요. 그, 그럼 오빠. 수도로 가시면 교단에서 주무시는 건가요?”
“응.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 아니면 따로 건물을 빌릴 수도 있을 것 같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거야. 일단 우리도 밖으로 나갈까?”
어째서 내 잠자리가 중요 요소인지는 모르겠지만 교단에서 자는 걸 그리 반기지는 않는 모양.
이런 종류의 냄새는 동물적으로 캐치하는 만큼 뭔가 불길한 걸 느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슬쩍 정하얀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한쪽 팔을 꽉 잡는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조금은 민망했지만 잠자코 발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내가 눈치를 준다고 한들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이윽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자 금방 길드의 그리폰 이륙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시야에 비친 것은 둘.
그리폰들을 사육장에서 꺼내고 있는 조혜진과 그 모습을 몇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엘레나.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던 엘프는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정하얀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고 조혜진은 평소대로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 참….’
무언가 아련해 보이는 표정의 엘레나의 얼굴이 보인다.
입술을 꽉 깨문 것이 혹시라도 폭발하지 않을까 무섭다.
기본적으로 마음이 약한 엘레나가 (구)정하얀 같은 행동을 보이지는 않을 거라 판단하고 있지만 혹시나 이쪽이 모르고 있는 모습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에베리아 왕국의 반대를 뚫고 나와 이곳에 있는 게 증거 아닌 증거.
사실 그녀도 내 동료라고 할 수 있는 몸이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하하 호호 웃고 있지만, 실상은 타락한 신들에게 버림받은 선배.
하늘을 향해 원망이라는 탄도를 발사할 준비를 마친 대포동 미사일이나 다름없다.
이후 언론플레이에서도 커다란 활약을 보여줄 수도 있는 만큼 각별한 관리와 취급을 요하고 있는 상태.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자 침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처량한 모습이 엘룬 쓰레기에게 버림받아 생긴 결과물이라 생각하자 다시 한번 하늘 위의 존재에 대한 적개심이 피어올라왔다.
‘저렇게 여리고 여린 엘프를….’
입술이 꽉 닫아버린 것은 당연지사.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레나는 쭈뼛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부… 길드마스터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엘레나 님.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하하.”
“아….”
“길드의 일원이신 건 맞지만 아무래도 엘레나 님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일반적인 길드원으로 다루기가….”
“그렇게 특별대우 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디….”
“아니요. 특별대우를 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파란은 그렇게 딱딱하지 않을 뿐더러… 개인적인 친분도 있으니까요. 저도 다른 파티원들과 현성 씨에게 의식적으로라도 딱딱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엘레나 님도 평소대로 행동해 주시면 됩니다. 아무튼 조금 늦었지만 파란 길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엘레나 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뇨. 제가 드려야 하는 말씀인 걸요. 잘 부탁드려요, 이기영 님. 그… 리고 정하얀 님도요.”
“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그, 그리고 파란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감사합니다.”
“출발 준비는 끝났습니까? 혜진 씨?”
“네, 부길드마스터. 차희라 님이 도착하시면 곧바로 출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디아루기아 님은 이후에 합류하기로 하셨고 카스가노 유노 님도 수도에서 뵙는다고….”
“아, 그렇군요. 고생하셨습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일 처리 빨라서 좋긴 하다.
희라 누나도 함께 간다는 건 환호성을 지를 만한 소식.
잠깐 동안 그녀에 대해 떠올리자 곧바로 한쪽에서 붉은 머리를 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붉은 용병의 수행원을 몇몇 데리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평소대로의 그녀의 모습이 맞다.
“오랜만이네, 자기. 아니, 오랜만이라고 하면 안 되는구나. 며칠 전에도 봤으니까.”
전쟁이 끝난 이후 곧바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를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평소답게 푸석푸석한 머리가 정돈되지 않은 듯한 느낌은 왠지 모르게 갈기가 빨간 사자를 떠올리게 할 정도.
조금 달랐던 건 눈 밑에 다크서클이 퀭하게 져 있다는 것.
“어디 아파?”
“욕구불만.”
“…….”
“…….”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자기도 알다시피 조금 오랫동안 미쳐 있었거든. 그 후유증이라고 보면 돼. 이렇게 오랫동안 정신을 놓고 있었던 건 정말 오랜만이기도 하고, 최근에는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제기랄. 숙취에 시달리는 것보다 10배는 더 괴로워. 그걸 입는 게 아니었는데.”
“광전사 세트?”
“봤어?”
“아니. 직접 보지는 못하고 이야기만 들었지. 갑옷도 걸치고 무기도 들고 있었다고. 그거 전설 등급 아이템이야?”
“맞아.”
“한번 보고 싶은데.”
“정말로 보고 싶어?”
“아니….”
“잘 생각했어. 나도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거든. 그보다… 이렇게 옹기종기 다 불러 모은 이유는 뭐야? 피크닉 가기에는 무장상태도 제법 훌륭한데. 수도 안에 던전이라도 발견 됐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준비성이 철저한 거라고 생각해 줘.”
“뭐. 자기가 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흠…. 기왕 가는 김에 이번에는 느긋하게 쉬다 왔으면 좋겠는데. 말 그대로 느그읏하게. 그렇지 않아, 자기?”
힘없이 웃으면서도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무섭게 느껴진다.
대놓고 이쪽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육식동물 앞에 초식동물이 된 느낌.
아니, 기분 탓이 아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한차례 살피는 모습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나 다름없었다.
정하얀이 내 옷깃을 꽉 잡은 것은 바로 그때.
‘너네… 또 그러지 마.’
이 사람들이 부딪치면 일이 어떻게 되는지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저번에야 어떻게 잘 끝났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잘 끝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결국에는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느긋하게 쉬는 건 중요하지.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리폰에 올라타자. 누나랑 하얀이랑 엘레나 님이랑 같이 타고, 나는 혜진 씨랑 타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렇지? 그렇지 않습니까? 혜진 씨?”
“…….”
“…….”
“…….”
“자. 그럼 빨리 올라오세요, 혜진 씨.”
“…….”
“빨리요.”
“불쾌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저도 마찬가지니까 어서 타기나 해요.”
순식간에 자리를 잡은 이후, 조혜진의 등을 꼭 붙든 것은 당연.
세 명의 여인들은 조금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보내고 있지만 다행히 질투하는 모습을 보내오지는 않았다.
다만 저들이 함께 그리폰에 타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저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너무 꽉 붙잡지 마세요, 부길드마스터. 정말로 불쾌합니다.”
물론 다른 의미로는 조금 상처 받고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