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422화 (421/1,590)

# 422

회귀자 사용설명서 422화

위쪽에서 생긴 문제(5)

[나 파산했어….]

‘무슨 파산을 해?’

[나… 파, 파산해서 그래…. 아무것도 없어서…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나오고… 막 그러는 거야. 절대로 그런 거 아니야. 타락한 거 아니라고…. 흐으으윽. 그러니까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걸 유용한 정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조금 기쁘기는 하다.

내 가설이 아주 약간은 들어맞았다는 거니까.

악마는 계약으로 실적을 올리고 신들은 믿음으로 실적을 올린다.

그녀가 파산했다고 말했다는 건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잃었다는 게 아니라 아마 보유하고 있는 신성을 잃었다고 표현한 것이리라.

[맞아.]

‘어떻게 그동안 모은 신성을 다 날릴 수 있는 건데? 이해할 수가 없는데. 사치라도 부린 거 아니야?’

[뭐? 이, 이 개새끼. 이 쓰레기 새끼! 네 입에서 그딴 소리가 나와?!]

‘…….’

[아니지. 아니지.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미안해. 내가 정말로 미안해…. 이기영 명예추기경, 내가 가장 아끼는 신도가 이기영 명예추기경인거 알지? 나 타락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그런 짓 하면 안 돼.]

‘…….’

화를 냈다가 살살 달래는 이중인격 사이코의 모습은 충분히 타락했다고 할 만했다.

하지만 일말의 정신은 유지하고 있는 모양.

일단 어째서 이런 형태로 연락을 취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퀘스트를 생성하는 데도 신성이 들어간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겨우 그것조차 보내지 못할 경우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

[…….]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쉽게 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우리 베니고어 여신님, 이 미천한 신도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고 계신지요?”

[기… 본적인 퀘스트는 이미 정해져 있어. 예를 들어 전직 퀘스트나 던전에 들어갔을 때 받을 수 있는 퀘스트는 시스템이 관리하고 있고… 강제 퀘스트나 개인에게 보내는 퀘스트 같은 경우에는 달라. 우리가 직접 신성을 사용해 보내는 거야. 당연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신성이 소모돼. 신은 인간의 일에 개입할 수 없어. 원래 그게 원칙이야. 강제 퀘스트 같은 경우는 그 법칙에 위배되는 행위고. 물론 그 내용이나 난이도에 따라 들어가는 신성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래. 완료 이후에 지급되는 보상도 마찬가지고.]

‘좋은 거 알아가네.’

[기존에 있던 신성은 전부 다 털렸고 빌리고 빌렸던 신성도 전부 다 털어 넣었어. 내 자랑스러운 신도… 이기영… 끄읍… 명예추기경을… 후읍… 위해서.]

“그래서 우리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파산했다는 원인이 저라고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그런 건 아니시죠?”

[무, 물론… 전부 내 잘못이지. 전부…. 아, 아무튼 그래서 이런 식으로밖에 접선할 수 없었어. 강제 퀘스트를 생성할 수도 없고….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으니까.]

“신이 베니고어 여신님 한 분밖에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엘룬 쓰레기도 있고… 다른 분들을 통해서도 연락을 해주시면 되셨는데…. 비록 잠시뿐이었지만 어째서 이 신도를 져버리신 건지 궁금합니다.”

[서, 설명할 수 있어! 이 대륙을 관리하는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야. 엘룬, 바리안, 그밖에 다른 신들도 전부 파산 상태야. 내가 여기저기에서 신성을 많이 땡겨 써서 그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많아서… 그래… 심지어 외부에서도… 일이… 조금 안 좋게 됐거든. 질 나쁜 놈들한테 걸려들어서….]

‘대륙 운영을 똥구멍으로 했나.’

[그런 건 아니야. 나… 나의 자랑스러운 이기영 명예추기경. 그, 그리고 그런 말은 신성모독이야.]

아니라고 부정하고는 있지만 확실히 운영을 똥구멍으로 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관리했길래 잘 굴러가던 대륙을 순식간에 말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베니고어 하나의 파산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이 대륙을 관리하고 있던 모든 이가 줄줄이 소시지처럼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은 충분히 당황스러울 만했다.

이런 예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대륙은 하늘 위의 존재들의 작업장 같은 곳이다.

이들은 이 대륙을 통해 신성을 얻고 그 신성으로 이 대륙을 관리한다.

당연히 써야 할 일도 많을 것이다.

악마들도 견제해야 하고 자연적인 일도 해결해야 할 테니까.

심지어 사제들이 사용하는 신성력의 일부도 그들의 힘이라 가정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게다가 대륙은 이미 인구가 적정선을 유지하고 있다. 더 이상 쉽게 늘어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 대륙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성은 많지만 한정적일 터.

그런데도 그걸 모르고 졸부처럼 펑펑 써댔으니 이 비참한 최후는 어쩌면 예정된 이야기라 볼 수 있으리라.

여기에서 심각한 듯 질질 짜고 있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게 자기 자신 탓이라는 거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눈에 보이네.’

위에도 비슷한 개념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세상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렇다.

베니고어가 엘룬쓰레기나 바리안 같은 이들을 대상으로 신성을 빌렸고 그걸로도 모자라 주변 왕국의 신들도 끌어들인 것.

대륙의 신들은 결국 집단 보증까지 쓰게 됐고 보증에 힘입어 베니고어는 외부에서도 신성을 끌어다 썼다.

아주 잠깐은 행복했을 거다.

낭낭한 신성으로 낭낭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어느 날을 기점으로 외부에서 땡겨 온 신성이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늘 위에 IMF가 터져버린 거나 다름이 없는 상황.

어째서 베니고어가 친절하게 달라붙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거 망할까 봐 걱정하는 거네. 햐…. 대단하네. 대단해.’

지금도 신성은 고정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

여기서 타락한 신이 어쩌고, 악의 오염을 받은 베니고어가 미쳤다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도는 순간 신도가 줄어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심지어 악신으로 몰린 베니고어의 여신상을 때려 부수려 폭도들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타락한 베니고어 작전이 잘 먹혔을 때의 경우지만 반만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퀘스트 하나 보낼 여력이 없어 허덕이는 베니고어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신들의 신성이 전부 털렸을 때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반가운 상황은 아니다.

소멸되거나 지상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이거이거…. 우리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지금 많이 힘드신가 봅니다.”

[이래서 눈치 빠른 개….]

“뭐라고요?”

[아니…. 그, 그렇지 않아. 이기영 신도. 대부분 맞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나는 항상 이기영 신도에게 친절했는걸.]

“처음엔 그렇지 않았잖아요. 베니고어 여신니임.”

[그, 그, 그건 엘룬이야. 엘룬이 네 담당자였어. 중간부터는 담당자가 바뀐 거라. 나도 잘 모르는 내용이고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 봐,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이기영 명예추기경. 내가 이기영 명예추기경한테 해준 것들. 빛 폭탄 물약도 있고! 준신화 등급의 직업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힘, 힘써줬잖아? 내가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신도들도 늘려주고 베니고어 교단을 위해 최선을 다해 힘써주고 있는데. 우리는 한 팀이잖아. 처, 처음에는 엘룬이 담당자였어. 정말이야! 엘룬 쓰레기 그 자식이 담당자였다니까!]

“그 자식 정말로 구제 불능 쓰레기네.”

[나… 도 가끔 그렇게 생각해. 자기 딸도 팔아치운 놈인데, 뭐. 나는 절대로 내 아들딸들을 버리지 않아. 특히나 우리 이기영 명예추기경 같은 이들은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지. 내가 언제 섭섭하게 한 적 있었어? 우리는 한 팀이잖아. 한 팀.]

정말로 엘룬 쓰레기가 내 담당자였을 확률은 적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녀석의 쓰레기력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안 그래도 엘룬은 소문이 별로 안 좋아. 엮여서 별로 좋을 것도 없고 그보다 이기영 명예추기경. 할 말이….]

“아니, 아니, 내가 먼저 할게.”

[으응…. 그렇게 해. 나의 자랑스러운….]

“안 그래도 이런 기회가 생기면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거든 그동안은 일방적이었지만 드디어 쌍방향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창구가 생긴 거잖아. 물어볼게 많으니까 서론은 집어 치우고 이야기할게. 일단 궁금한 거 첫 번째. 지금 너는 어디에 있지? 여기 여신상에 들어가 있는 건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정확히 말하면 아니야. 본신은 여전히 위에 있지만… 인간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그래?”

[어딜 만져, 이 새끼야!!]

“없다며.”

[일부만 숨어 있는 거야. 이, 일부만…. 일부만… 숨어있는 거라고.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새끼들 때문에… 이 개새, 아니, 나의 사랑스러운 이기영 명예추기경.]

“진즉에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요. 그리고 겨우 여신상 한 번 쓰다듬은 거 가지고 왜 이렇게 과민반응하고 그래. 어차피 느껴지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데 너 진짜 이렇게 생겼어?”

[비슷해…. 꿈에서 내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조각가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거니까. 그럼 이게 두 번째 질문이야?]

“아니야. 그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고. 생각보다 예쁘네. 솔직히 내 타입이야.”

[그, 그런 말 많이 듣기는 해…. 그, 그래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돼. 신성모독이니까.]

“음…. 아무튼 두 번째 질문.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지?”

[뭐?]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솔직히 궁금하잖아. 네가 너 자신도 모르는 초월적인 존재를 만났다고 상상해 봐. 물어보고 싶은 게 당연할걸.”

[…….]

“…….”

[오해하지 말고 들어, 명예추기경. 베니고어의 이름을 걸고 말하는 건데… 그건 나도 몰라.]

“뭐?”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몰라. 그건 내 권한이 아니야. 우리도 말할 수 있는 부분과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보안이 걸려 있는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거지. 근데 그건… 그 질문은 어디에도 통용되지 않아. 아예 모르는 일이야. 인간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죽음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소멸되면 어떻게 되는지 나도 몰라.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믿어줬으면 좋겠어.]

“음… 믿을게.”

[정말?]

“정말. 어차피 정말로 들을 수 있다는 기대도 안 했으니까. 왠지 모를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럼, 보안이 걸려 있는 이야기는 해줄 수 있다는 거네?”

[그것도 무리야. 물론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보안이 걸려 있는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내가 입을 연다고 한들 네게 목소리가 전달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럼 개뿔 알려줄 수 있다는 게 없다는 거 아니야?”

[질문에 따라 달라. 궁금한 게 뭐야?]

“…….”

[…….]

“우리를 여기에 끌고 온 이유는 뭐야?”

[…….]

“나무라는 건 아니야. 나는 지금 이 생활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으니까. 이것도 그냥 궁금할 뿐이야.”

[보안이 걸린 일은 아니네. 하지만 자세히는 이야기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해.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너희를 끌고 온 게 아니야. 저쪽에서 너희를 떠넘겼고 우리는 그걸 받아 준 거지.]

“무슨 소리야. …지구에서 우리를 떠넘겼다고?”

[정확한 내용은 이야기해 줄 수 없어. 하지만 정말이야. 물론 이방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고 가혹한 일이라는 건 알아. 튜토리얼 던전이라는 게 그렇지.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었어. 들어온 인간 모두를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까. 물론 방법이 폭력적이었다는 것도 인지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가 결정한 사항이 아니야. 하지만 내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미안… 내가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끝이야. 어째서인지 도대체 어떻게 일이 진행된 건지는 전부다… 말할 수 없어.]

“보안이라 이거지.”

[정말 유감이야.]

“뭐가?”

[차, 차원에 버림받았다는 이야기…. 정말 유감이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