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8
회귀자 사용설명서 428화
그래도 얘가 제일 무섭다(1)
사실 진청에게 넣어놓은 것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녀석이 세뇌 당했다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이야기다.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일도 많고 여러 가지로 걱정해야 할 일도 많다.
어떻게 생각해도 지금 당장 처리하기에는 생각해야 할 사안이 많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녀석에게 세뇌나 이용이라는 키워드를 뒤집어씌운 이유는 뻔할 뻔자.
‘나한테 도움이 되니까지.’
그 말 그대로였다.
녀석에게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나에게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확률이 높다.
최근에 생각이 많아지고 있는 김현성이 바로 그 원인.
개인적으로는 나에게 씌워진 가면쓰레기 용의가 완벽히 벗겨졌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니, 솔직히 처음부터 용의가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나를 오해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런 보험은 몇 개를 만들어도 부족함이 없다.
‘만약에….’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김현성이 나를 1회 차 빌런으로 오해할 경우를 위한 변명거리라는 거다.
‘세뇌 당했을 가능성도 생각하게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1회 차의 가면쓰레기는 자기 자신의 의지로 그런 악독한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끊임없이 내면의 악과 싸워온 비운의 캐릭터가 더 어울린다.
매일 밤 자신이 저지른 짓에 괴로워하며 그 몸에 수많은 자해로 가득한 상처를 만든 고독하고 상처받은 남자.
가면 역시 울고 있는 눈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중2병적 설정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설정은 조금 그렇다고 생각해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그래도….
‘이거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은 설정이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이런 프레임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게 그나마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누군가는 이미 다 끝난 마당에 그런 쓸데없는 상황까지 생각해 가며 움직여야겠냐고 이쪽을 비웃겠지만 백 번을 조심해도 한 번 틀어지면 모든 게 끝이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니 넣을 수 있는 보험은 모조리 넣어두는 게 맞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진청 녀석이 너무나도 쉽게 이 일을 받아들였다는 것.
‘당연한 건가.’
어차피 복수 말고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복수할 수단이나 기회가 없어지니 더 추해지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본 녀석의 모습도 충격적일 정도로 녀석은 많이 망가져 있었으니까.
프라이드가 강한 만큼 현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이 괴로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 일은 잘 해결될 것 같고….’
과정이 짧지는 않았지만 가닥은 잡혔다.
퀘스트와 던전이 막힌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균열랜드와 악마관계자들이 거주하는 던전을 통해 해결.
전자의 경우에는 막스가 알아서 잘 해주고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지혜에게 맡기면 일을 빠르게 끝낼 수 있으리라.
물론 균열 박물관은 내가 직접 진두지휘해 과금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잠깐 동안 심장이 철렁 했던 것도 사실.
마침 딱 맞는 맞춤형 솔루션의 등장은 오히려 어깨춤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불편한 식사 도중 잠시 떠오른 생각은 기분 좋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 하지만 곧바로 말을 걸어오는 차희라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기분 좋아 보이네, 자기. 입에는 좀 맞아?”
“응, 누나. 이거 맛있네. 살살 녹아.”
“모처럼 수도에 들어왔는데 곧바로 떠나야 된다니. 김샜네. 제법 오래 있을 줄 알고 기대했는데. 여기도 혁명 이후에는 많이 바뀌어서 구경할 것도 많아, 자기.”
“나도 기왕이면 조금 돌아다니고 싶긴 한데… 급한 일이 생겨서. 말했잖아. 당분간 퀘스트 생성이나 던전 생성 같은 게 전부 정지된다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솔직히 저녁도 길드에서 먹으려고 했었는데…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 여기라도 들린 거지.”
“진청 일은 제대로 마무리 했고?”
“응. 나쁘지는 않아.”
이어서 말을 걸어온 것은 엘프 공주 엘레나.
“저… 이기영 님, 다시 물어 죄송하지만, 그 말이 정말인가요?”
“아… 네. 엘레나 님. 베니고어 님께 직접 전달 받은 메시지이니 아마 확실할 겁니다. 혹시 엘레나 님께서는 엘룬 님과 소통이 가능하신지요.”
“생각해 보니 무척 오래 전부터… 그분이 느껴지지가 않았어요.”
‘네가 버림받아서 그런 거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말씀하시길 위쪽에 커다란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대륙에 뿌리 박혀 있는 악마의 영향이 그분들이 계시는 곳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더군요.”
“그, 그럼 어떻게….”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땅 위에 뿌리내린 악마들을 빛의 힘으로 몰아내고 다시 한번 그분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증명한다면 베니고어 님과 엘룬 님을 비롯한 모든 이에게 축복이 다시 한번 내릴 것입니다.”
“노력해야겠군요.”
“네. 더불어 역시 신경 쓸 게 많습니다. 여신들이 이방인들을 위해 직접 관리하시는 던전 같은 경우에도 완전히 그 기능을 정지했으니 아마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올 겁니다. 그 혼란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몬스터의 자제나 사냥 의뢰 같은 것은 이제는 우리 사회에 너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그나마 몬스터의 숲이 있는 캐슬락 동부 쪽은 괜찮겠지만 상대적으로 숲이 작은 실리아는 조금 더 문제가 심각할 겁니다. 카스가노 유노 님은 혹시….”
“사실 따로 생각해 놓은 것은 없습니다, 명예추기경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시면 그것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물론 이방인들이 느낄 혼란에 대처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동감하고 또 동감하옵니다. 이 대륙을 유지하고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시스템에 뭔가 이상이 생기고 있다는 건… 아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든 이방인이 깨닫게 될 것 입니다. 공식적인 발표를 하고 감히 명예추기경님을 위협하는 이들을 위한 철퇴를 가다듬어야지요.”
“네. 말씀 감사합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살짝 미소를 보내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의 모습이 보였다.
문제는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게 그녀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
양 옆에는 차희라와 정하얀이 자리해 있었고 그 옆에는 카스가노 유노와 엘레나.
또 그 옆에는 조혜진이 앉아 있었다. 안전을 위해 이 모두를 데리고 온 건 후회하지 않지만 역시나 이런 상황이 오게 되면 어느 정도 후회를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건사고가 터지지 않았으니 이 멤버를 모이게 한 게 더욱더 후회된다.
‘좌불안석, 가시방석. 슈바….’
말 그대로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저들이 서로 싸우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 한 사람도 서로를 쳐다보는 인원이 없다.
오롯이 나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자신만의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꼴은 가관.
이런 상황에서 눈치를 보지 않는 자식이 없다면 녀석에게는 틀림없이 박수를 보냈으리라.
한 사람이 질문을 하고 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 마무리가 될 즈음에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그 사람과의 담소가 끝나면 바로 대기하고 있던 그 다음 타자와 함께 대화의 장으로 쓸려 들어간다.
말하기 좋아하는 나로서도 버티기 힘들다.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마치 인간 케이크가 되어서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한 조각씩 떼어 먹히는 느낌. 돌려 먹히는 기분이다.
또는 마치 압박 면접장에 나온 것 같다.
아무래도 일에 관련된 일에 이야기가 많이 나오다 보니 정하얀의 경우에는 끼어들 수가 없어 의기소침해하는 것도 불안요소 중에 하나.
폭발할 확률은 제로지만 그래도 정하얀은 정하얀.
언제 돌발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다.
물론 이대로만 끝나 준다면 무난하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
하지만 그 상황에 조용히 돌을 던진 것은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 조혜진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하얀 씨 손에 못 보던 게 있군요. 아티팩트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선물이라도 받으신 건가요?”
‘이 씨바….’
진청과 샤를롯트가 먹인 뒤통수보다도 더욱 쓰라린 통렬한 한방.
‘쟤는 또 왜 저걸 끼고 온 거야.’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정하얀의 왼손 약지로 모여든다.
모두 대충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
이 자리에 앉은 이후부터 줄곧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던 정하얀은 소중한 결혼반지를 살짝 손으로 가리는 치밀한 행동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적절하지 않은 예지만 절대 반지를 숨기는 골룸의 모양새.
하지만 저 행동이 정말로 반지를 숨기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건 어린애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손으로 반지를 가리고는 있지만 저 행동은 다분히 자랑하려는 의도다.
한껏 올라간 콧대와 자신감이 생긴 눈동자가 바로 그걸 말해준다.
자신은 이곳에 있는 여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물론, 나는 너희와는 다르다는 뜻을 심어준 것이다.
“아… 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길.’
어색한 연기.
이곳에 자리한 다른 여인들을 비웃는 정하얀의 표정은 내가 봐도 띠껍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렇게 귀엽게 생긴 얼굴이 이렇게 얄미워 보이기도 힘들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절대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얼굴도 다르지 않다.
모두가 절대반지라도 본 것처럼 움찔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면 아래 묻어두고 있었던 문제가 갑작스레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들키면 안 될 것이라도 들킨 것처럼 소중히 반지를 손가락에서 뺀 이후에 조용히 품에 집어넣는 꼴이 가관이다.
카스가노 유노는 뚫어지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미 사전에 반지에 대해 알고 있던 엘레나 역시 씁쓸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반지야?”
“아, 아무것도요. 그, 그냥 오빠가 선물해 준 거.”
“그러니까. 뭔데?”
“비, 비밀이에요. 두, 둘만의 비밀. 헤헤.”
“…….”
“둘만의 비, 비밀이니까. 절대로 말하면 안 되거든요.”
차희라의 말에는 싱긋 웃으며 대답해 주는 정하얀의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다.
지금까지 내가 내 정적들에게 한 도발보다, 방금 정하얀의 말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
유치하고 어처구니없는 도발이기는 하지만 이런 종류의 도발은 먹힐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의외로 차희라는 제법 유순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도발에는 어울려주지 않겠다는 어른의 기개가 느껴진다.
‘역시 우리 희라 누나!’
카스가노 유노와 엘레나는 조금 부러워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쟤네들한테도 한 마디씩 하긴 했었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소중한 사람, 함께 있고 싶다, 따위의 말을 지껄인 적이 있는 걸로 기억한다.
아마 그 기억을 되새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틀림없이 부럽기는 하지만 괜찮다고 속으로 자신을 다독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괘, 괜찮은 것 같은데….’
조혜진이 폭탄을 떨어뜨린 것치고는 제법 나쁘지 않은 결과.
식사가 끝날 때까지 별다른 사건은 터지지 않았고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 되는 듯했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날까?”
“네.”
“바로 린델로 가는 건가요?”
“저는 실리아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엘레나 님.”
“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카스가노 유노 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자기. 그리고 세컨드. 빨리 와. 시간 없다며?”
차희라가 앉아 있던 테이블의 한 쪽이 종잇장처럼 뜯어져 꼬깃꼬깃 접힌 채 버려져 있는 걸 목격하기 전까지는….
‘저 식탁 쇠로 만들어진 거잖아. 슈바….’
차희라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