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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31화 (430/1,590)

# 431

회귀자 사용설명서 431화

생명의 위협(1)

물론 이 약발이 벌써 떨어졌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장담컨대 이 결혼 드립은 정하얀에게는 신화 등급의 포션이요, 엘릭서에 가까운 만병통치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어떤 화도 가라앉힐 수 있는 지고의 영약이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너무 풀어놓은 건가.’

지난 시간이 조금은 후회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정신없이 바빴다고는 하지만 관리를 소홀히 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

물론 엘레나와 함께 살라트의 뱃속에 있었을 때는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아니, 그것도 아니야.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지.’

막 자기반성을 시작하려는 타이밍이었지만 지금껏 내가 한 일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소홀한 것도 아니다.

정하얀이 정신을 놓았을 때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는 만큼 그 바쁜 시간에도 어느 정도는 시간을 투자해 그녀를 다독이는 자리를 가졌었다.

이를테면 짧은 데이트.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쉬는 시간에는 항상 정하얀을 끼고 있었고 심지어는 틈틈이 스킨십을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그녀를 케어했다는 거다.

평소였으면 이 정도로 충분히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었을 터.

이렇게 현타가 빠르게 찾아온 것은 어쩌면 그녀의 전체적인 기대치가 올라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는 것, 함께 여가활동을 즐기거나 식사하는 것.

본래대로였다면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겠지만 결혼이라는 약으로 인해 제한선이 높아진 것이다.

한 번 강한 약을 투여 받으니 강한 면역력을 가지게 된 것과 같은 이치.

더 이상 어정쩡한 약은 듣지도 않게 된 것과 일맥상통.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누군가의 명대사처럼 그녀 역시 이쪽의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예비 신부니까 당연한 거야.

나는 예비 신부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지.

이제 이런 거는 당연한 거구나.

맞아. 이제는 당연한 거야.

내가 정확히 정하얀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대충 이러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진도를 잘 조절했어야 했는데.’

뭔가 광기에 물든 것 같은 정하얀의 얼굴을 바라보니 내 쪽에서 실수가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라이오스에서 투여한 약은 확실히 그 시점에서 사용하기에는 너무 이른 수였다.

그동안 당연한 권리였던 걸 다시금 회수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정하얀의 얼굴을 본 시점에서 그 의견은 아웃.

줬다 뺏는 게 가장 치사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방금의 생각을 배재한 것이 아니다.

정하얀 자신이 응당 누려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권리들을 하나씩 빼앗아 간다면 아마 이쪽이 골치 아파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결혼 한다고 했잖아…. 끄으으윽.”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싫은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 중에도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듯 울부짖는 정하얀의 모습은 가관 중의 가관.

얼굴에 차희라에 대한 원망과 나에 대한 불신이 서려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대놓고 적의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됐건 이쪽에 불만을 표현한 것이나 진배없었으니까.

“지금은 바쁘다고….”

“결… 혼한다고 했잖아요. 끄어어억. 언제 할 건데…. 언제. 어, 언제!”

‘얘 목소리 높이는 것 좀 봐. 미쳤나 봐….’

“그렇게 목소리 높인다고 해결될 일이….”

“끄으으으윽. 차희라 너무 싫어…. 너무 싫어어. 너무우으으으!”

‘니가 먼저 도발했잖아.’

심지어 혼잣말을 시작하는 꼴은 가관.

너무 작아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혼잣말을 하고 있다.

평소 정하얀이 내게 소리를 지른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

현재 그녀가 극도의 흥분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소리라도 질러야 되나?’

커다란 힘은 더 커다란 힘으로 제압해야 되는 법.

조선 시대에 태어난 양반가문의 8대독자처럼 어딜 감히 언성을 높이느냐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의 눈은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은 충신처럼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개 무서워.’

마치 폭탄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

“누가 그렇게 목소리 높이래!”

당황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커다란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끄으으으윽.”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팔을 덜덜 떨고 있는 모습에 이건 통하지 않는 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

이미 내 목소리가 들리는 상태가 아니다.

김현성이라도 불러와 이 망나니를 제압해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

몸을 조금 뒤로 빼고 싶건만 내 옷깃을 붙잡은 그녀의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만약 밀실이었다면 오줌을 지리고 말았으리라.

‘이건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에서 더 강한 약을 투여할 수는 없는 상황.

한 발자국 더 상한선을 높여 버린다면 이후에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날지도 모른다.

도끼눈을 치켜뜬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을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이 샘솟기도 했지만.

일단은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처럼 살살 달래볼까? 아냐. 그건 아니야. 제대로 망할 수도 있어.’

혹시나 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당연.

유혹의 결과를 내 온몸으로 만끽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하지만.

‘이것밖에 없어.’

그리폰 위에 둘밖에 없었던 이전의 상황과는 달리 지금은 린델에 한 가운데.

유니콘 사건 때 보았다시피 정하얀은 그 누구보다도 순수한 포지션을 지키고 싶어 한다.

차희라처럼 무턱대고 덮치는 그림은 나오지 않을 거라 장담, 또 장담할 수 있다.

‘효과는 이미 입증된 거나 다름없고.’

방법은 조금 다르겠지만 당장 화를 내고 있는 정하얀을 달래기에는 충분하리라.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던 정하얀을 천천히 떼어내자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내 기준 최대한 고혹적인 미소를 밀어 넣으며 정하얀을 바라보는 것은 물론 얼굴을 가까이 대며 눈가에 입을 맞췄다.

“울지 마, 하얀아.”

“끄으으으윽?”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이후에는 귀를 살살 매만지기 시작.

“지금은 상황이 조금 안 좋다고 이야기했잖아. 일적인 이야기라면 이해해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고… 이런 걸로 떼를 쓰면 앞으로 나도 조금 힘들어져.”

“아아아….”

별것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오감을 자극하는 터치다.

예상했던 것처럼 정하얀을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이대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

“아으아아아아아.”

단언컨대 이쪽이 기대했던 리액션 이상이라 할 만했다.

오줌을 참고 있는 것만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가 굉장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나라고 왜 하얀이랑 빨리 맺어지고 싶지 않겠어?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는 거야. 매일매일 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봐. 이렇게….”

심장의 두근거림은 공포로 인한 두근거림이기는 했지만 귓속에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것은 물론 나 나름대로 그녀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사실 지금까지 정하얀과의 스킨십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형식적이었던 전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 정도는 그녀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최대한 페로몬 팍팍 뿌리려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아으아아아아아아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 직후.

“하아. 하아. 하아.”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는 것은 물론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오묘하게 변해가는 눈.

안 그래도 이성을 잃은 눈이 기괴하게 변하고 있다.

왠지 모르게 정하얀의 피부가 홍시처럼 붉게 물들었고 자꾸만 몸을 배배 꼬기 시작.

울고 있는 건지 웃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개 망….’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어? 나 왜 이래. 어?’

졸음이 쏟아지는 것은 물론 다리가 풀리는 것만 같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최선을 다해 올려보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감기는 눈은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지경.

‘니가 그런 거야? 정하얀?’

마법은커녕 마력을 끌어 올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차희라의 여파가 지금 찾아온 건지 정하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덤이다.

“마, 많, 많이 피곤하세요?”

들려온 목소리는 아까처럼 광기에 휩싸이지 않았다.

정말로 걱정하는 눈빛.

하지만 그 안에 깃든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욕망이 번들거린다.

“제,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바, 방, 방까지. 오늘 하루는 푹 쉬어야 되겠다. 헤헤. 히. 히히힛.”

“아… 응. 갑자기 몸이 너무… 포, 포션….”

“머, 먹, 먹여드릴 테니까. 일단은 여, 여기 기대세요. 여기로.”

“지금 당자….”

“아, 알겠어요….”

“…….”

“…….”

“…….”

“…….”

“일어… 나 봐요.”

“…….”

“오빠, 일어나 봐요. 회의한다고 했으면서 뭐예요? 이게?”

“이지혜…?”

눈을 천천히 떴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날이 밝은 것을 보니 정신을 잃은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정하얀과 함께인 줄 알았건만 내 옆에 자리한 것은 뜻밖에도 이지혜였다.

황당함 걱정이 공존하는 표정.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정하얀은 어디 가고 왜 얘가 있어?’

“어? 정말로 일어났네요? 그냥 한 소리였는데.”

“뭐, 뭐야? 나 오래 자고 있었어?”

“3일 동안 잠들어 있었어요.”

“뭐?”

“딱 삼일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요. 그리고 오빠 정말로 어디 몸 안 좋은 거 아니에요?”

“그게 뭔 소리야.”

“교황청에 템플러가 찾아왔다니까요?”

“뭐? 템플러가 갑자기 왜 와?”

“저도 그쪽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데…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신호가 갔다던대요? 상태를 확인하고 괜찮은 것 같다고 말한 뒤에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난리 났었어요. 특히나 엘레나, 그 엘프 공주님이 오빠 건강을 살피고 있었던 도중에 그런 거라…. 믿을 수 있는 여자 맞아요? 사제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목숨이 위험해지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아무래도 수상하다니까.”

‘이건 또 뭔 소리야.’

“갑자기 뭔 엘레나? 아니, 엘레나는 지금 뭐 하고 있어?”

“방금 치료 끝났을걸요. 지금은 쉬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자꾸 숲 냄새 나지 않아요?”

“잘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하얀이는 없었고?”

“3일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했잖아요. 정하얀이 오빠 데리고 오고 난 이후에 반나절 정도가 지났나? 계속 깨어나지 않는 걸 보고 엘프 공주님이 오빠 상태를 본다고 방으로 들어갔었나 봐요. 그 뒤로 세 시간 정도 지난 다음에는 곧바로 교황청 템플러가 들이닥쳤고요. 저도 템플러 나오는 건 처음 봤는데. 정말 대단했다니까요?”

명예추기경이 된 이후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던 템플러의 첫 출동.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엘레나?’

얘 이름은 또 왜 튀어나오는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굉장히 불명예스럽게 베니고어의 곁으로 갈 뻔했다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목숨을 잃었다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었으리라.

괜스레 씁쓸한 마음이 든 것은 당연지사.

나도 모르게 이지혜의 얼굴을 바라보자 괜스레 몸을 밀착시키는 그녀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그나저나 오빠 오늘따라 왠지 섹시해 보이네? 평소에도 그렇기는 한데. 지금은 더….”

‘너까지 이러지 마, 슈바….’

진심 어린 속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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