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5
회귀자 사용설명서 435화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저 세계 생활(4)
“안 될… 까요?”
“왜 그래? 민지야?”
‘그래. 너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냐. 나는 사냥 좀 나가면 안 되냐? 응? 나는 던전 좀 나가면 안 돼?’
“딱 봐도 경험이 그다지 많지는 않으신 것 같은데. 제 말 맞나요?”
‘무슨 개소리야. 나처럼 경험 낭낭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다른 사람들이랑은 좀 다른 경험이기는 하지만.
“다리에 근육도 없으시고 팔도 마찬가지네요. 손도 너무 고우시고 손톱에도 상처 하나 없으신데…. 어떻게 봐도 원정을 많이 다녀보신 몸이 아닌 것 같아서요. 개인 보급품은 어디에 두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방 샤넬리아 에르메스 맞죠? 명품 브랜드. 예쁘기만 한 쓰레기.”
‘무슨 개소리야. 우리 현성이가 선물해 준 거다, 이년아. 무한의 가방이라고. 쓰레기 아니야. 너는 평생을 벌어도 못 사는 가방이야.’
“상식적으로 원정을 떠나는데 저런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겉보기에만 좋지 실용성은 완전 꽝이라고요, 저 가방. 던전에 남자 꼬시러 가는 거 아니잖아요? 최소한의 준비는 해주셨어야죠. 아무리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개인 보급품까지 신세지는 건 조금 아니죠. 그렇지 않아요? 텐트나 캠프 같은 건 저희 쪽에서 어떻게 해드릴 수 있지만 기본은 해주시고 파티신청을 하시는 게 맞아요, 이기연 님. 철우 오빠랑 태건 오빠도 어디서 꿀리지 않는 사람인데…. 그리고 풀메라니…. 정말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민폐라고요. 상식적으로 원정 가는데 화장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기나 해요? 거기서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메이크업 하시게요?”
‘얘, 얘 왜 이러니. 미쳤나 봐, 진짜. 너 왜 이래? 왜 이렇게 날이 섰어?’
뭔가 맞는 소리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리 만무.
“메, 메이크업 안 했는데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
“…….”
“…….”
“네?”
“메이크업 하고 온 거 아니에요. 자세히 보시면 아실 텐데….”
“그럼 그 입술이랑 피부가… 속눈썹은 마스카라….”
“전혀 아니에요. 한번 보세요.”
무한의 가방은….
‘밝히기 좀 그렇지.’
“가방은 죄송해요. 제가 연구실에만 틀어박힌 지 오래 돼서…. 맬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없어요. 연구실 나오기 전에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은 전부 처분했거든요.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라서…. 마, 말 못할 사정도 조금 있고요.”
“아무리 그래도….”
“원정 경험이 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믿어주신다면 열심히 해볼게요. 적어도 민폐가 되는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어느 정돈데요?”
그래도 빛기영은 일말의 근육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이기연은 정말로 여리여리 그 자체.
이 몸 가지고 영웅 등급의 던전은 물론 전설 등급의 던전도 클리어 했다고 말하는 건 여러모로 무리수가 있다.
어차피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선에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맞으리라.
“희귀 등급 던전 두세 번? 필드에는 그것보다 더 많이 나가봤어요.”
“거짓말. 그런 몸이 아닌 것 같은데….”
‘이 계집애야, 무슨 청문회 하니?’
“안 믿어주시면 제가 할 말이 없지만… 정말이에요. 조금 오래되기는 했지만요.”
정말로 청문회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 정도까지 하면 보통 어느 정도는 져주기 마련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이쪽에 극딜을 퍼붓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 이런 식이라면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나 진배없다.
원정 전부터 분위기를 완전히 말아 먹고 있는데 그 누가 이런 파티에서 원정을 진행하고 싶겠는가.
서로가 절박하지 않았다면 벌써 쫑난 것은 물론 서로의 머리카락을 뜯고 있었으리라.
‘그래 씨바. 내가 이해해 준다.’
사실 내가 그녀였어도 나를 파티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린델의 개미들은 더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양.
목숨이 달린 문제라고 생각하니 그나마 고개가 끄덕여진다.
솔직히.
‘내 실수이기는 하네.’
메이크업 부분에서는 쓸데없는 오해가 있기는 했지만 원정을 나간다는 사람이 백팩 하나 메지 않은 건 실수 중에 실수다.
‘너무 모르고 살았다. 너무 귀하게 컸어. 기연이 이 계집애야.’
첫 원정 이후로는 가방을 메 본 적이 없다.
애초에 기본적인 도구들은 전부 샤넬리아 에르메스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그 전까지는 박덕구가 가방을 들어주거나 길드 직원들이 물품들을 정리했다.
병아리 시절은 이제 기억도 안 난다는 거다.
게다가 내가 병아리였을 때와 쟤들의 병아리 시절이 같을 리 만무.
저들은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내 던져진 입장이었고 나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고액 연봉을 받고 시작했었다.
내가 경력이 꽤 되는 베테랑이라고 한들, 저들의 생태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하… 이거 실수한 건가. 실수 한 거 맞네.’
더 이상 뭐라 변명할 수 없는 상황.
갓기연의 처분은 저쪽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파티에 가고 싶었지만 역시나 늦게 나왔는지 구직시장이 문을 닫고 있는 상황.
애절한 표정으로 국민지를 바라봤지만 아직도 그녀의 표정은 냉랭하다.
‘얘는 확고하네.’
포기는 없다.
한쪽이 확고하다면 다음 사람을 공략할 뿐이다.
조용히 이철우를 응시한 것은 당연. 받아달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자 곧바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얘는 처음부터 우호적이었지. 나이스요오오오. 우리 기연이 화이팅!’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 민지야. 죄송합니다, 이기연 님.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네?”
“착한 아인데 가끔 이렇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기본 보급품을 챙기지 않은 것은 저도 조금 의아하기는 하지만… 뭔가 사정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키야. 바로 이거죠.’
“그럼….”
“함께 가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태건아, 어때?”
“나는 처음부터 찬성이었는데, 뭐. 민지야, 그렇게 입술 삐죽 내밀지 마라. 네가 걱정하는 부분은 이해하고 있지만… 아쉬울 게 없는 건 저분이야. 마법사가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원정길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생각해 보면 감지덕지다.”
“그, 그렇지만.”
“일단 사과부터 해야지.”
두 남자는 무언의 눈빛으로 버릇없는 계집애를 바라보기 시작. 결국 백기를 든 것은 혼자 발광을 하던 계집애다.
“죄송해요. 제가 무례했어요.”
“아니요. 괜찮아요. 충분히 오해할 만하기도 했고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기연 씨. 뭐 하냐, 철우야. 임시 파티 계약서 드리지 않고.”
“계약서도 쓰는 건가요?”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별게 다 있네.’
조심스레 종이뭉치를 꺼낸 사제가 내민 계약서를 바라보자 몇 개의 조항이 눈에 들어온다.
복잡하지도 않고 아주 간결하다.
그야말로 형식적인 계약서.
탈주나 트롤짓에 대한 조항과 보상과 분배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 법적인 효력은 크지 않을 것이다.
여신의 거울을 24시간 풀로 돌리지 않는 이상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단순히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의미라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조금 잡음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간에 파티를 구하는 것은 성공. 이쯤 되니 궁금한 것은 저들의 인적사항과 디테일한 부분이다.
“4명이서 들어가는 건 아니죠?”
“네. 동료가 3명 더 있습니다.”
딱 적당하네.
“아마 숙소에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클랜 하우스는 어디쯤 있나요? 서부 지역?”
“부… 끄럽습니다만 아직 클랜 하우스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장비를 먼저 사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
“아….”
“이거 부끄럽습니다.”
“아니요. 정말 탁월한 선택이신데요? 조금 더 발전하시려고 하시는 거니까요. 처음부터 장비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데, 잘 판단하셨네요. 어쩐지 그래서 이렇게 장비가 번쩍거리셨구나. 로브도 영웅 등급 아닌가요? 질이 정말 좋은 것 같은데….”
“아니요. 희귀 등급입니다.”
“인물이 받쳐주시니 그렇게 보였나 보네요. 후훗.”
“그, 그, 그, 그나저나 기연 씨는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저는 얼마 안 됐어요. 이제 2년 됐나…. 이제 곧 3년이네요. 철호 씨랑 대건 씨는….”
“저희는 이제 4년 됐습니다.”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네? 나쁘지 않아.’
4년 차에 영웅 등급 입성이라면 성장이 무척 빠른 편이다.
평균적으로 이 정도 스탯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약 6, 7년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생각 없이 움직이는 클랜은 아닌 모양.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고 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는 이들이라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
사람 하나는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보통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위에서 한 번쯤은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얼굴을 익혀 놓는 게 손해는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함께 원정을 하기로 했으니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는 것은 기본.
접대 하는 게 몸에 밴 만큼 기본적인 아부에 함박웃음을 짓는 두 명을 볼 수 있었다.
국민지는 아직도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나마 마음을 가다듬은 것 같다.
“기본적인 보급품은 전부 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네. 저희 클랜은 항상 넉넉하게 움직이는 편이라. 가방 하나 더 준비하는 것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고요. 시작부터 신세만 지는 것 같은데… 죄송해서 어쩌죠?”
“당연합니다. 한 팀이니까요.”
“멋있으셔라…. 듬직하세요. 마음이 든든하네요.”
역시 아부는 패배하는 일이 없다.
기분 좋은 미소지게 하는 미소를 흘리자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바젤 교황을 녹인 아부가 빛을 발하는 순간.
조금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작은 숙소. 아직까지 클랜 하우스가 없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이 숙소에 짐을 놓고 생활하는 것 같았다.
이철호는 잠깐 기다리라며 안쪽으로 들어간 이후 그 빈자리를 챙기는 세 명의 여자가 시야에 비쳤다.
‘궁수 하나, 근접검사 하나, 무투가 하나.’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미소를 흘리며 인사했지만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반응은 없다.
김태건이 소개를 시켜주니 그제야 인사를 해오는 느낌.
“인사들 합시다. 이번에 함께 원정에 가게 될 기연 씨. 소환마법사라는 직업이시고 3년 차에 영웅 등급에 올랐다고 하네.”
“특수 직업?”
‘왜 스캔하고 그래.’
“잘 부탁드려요, 기연 씨.”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3년 차에 영웅 등급이라니 대단하네요.”
“운이 좋아서….”
모두 아까 전 국민지의 표정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조금이지만 나를 무시하고 있는 표정. 아니, 무시한다기보다는 경멸한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병아리들이 뭘 알겠어. 이따 언니가 보여줄게, 계집애들아. 준신화가 뭔지.’
준신화 등급의 짬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
그걸 본 순간 저 계집애들이 태세전환하는 그림이 빤히 보인다.
하지만 그 다짐이 무너지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밑바닥부터 올라온 이들의 저력을 무시한 것이 실수 아닌 실수.
‘씨바…. 마차 타고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왜 걸어 가는 건데. 마차가 있는데 왜 걸어 가냐고. 그거 낼 돈도 없어?’
“아으. 하아….”
‘무거워. 슈바. 개무겁다. 이거 못 들고 갈 것 같은데…. 내 어깨야…. 뒈질 것 같다. 덕구야 씨바 짐 좀 들어줘라. 어디 갔니, 덕구야. 보고 싶다, 박덕구!!’
“하아. 하아. 하으윽.”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신음이 튀어 나오기 시작.
이 거지 같은 신음은 멈추려고 해도 도무지 멈춰지지가 않는다.
‘도대체 왜 안 쉬냐. 제발 좀 쉬자. 물 좀 먹고 가자, 이 새끼들아.’
“하읏으으으읏.”
‘내 허리. 내 어깨! 이기연 죽는다, 이 새끼들아!!’
“응기잇. 으…. 응기잇!!”
“제가 조금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여성 클랜원들의 경멸어린 눈빛이 다시 한번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