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7
회귀자 사용설명서 447화
우정 클랜 우정에 금가는 소리(2)
곤죽이 된 것은 물론,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버린 타락한 나무의 정령의 몸은 성한 곳이 없다.
화 속성에 제대로 두드려 맞았다는 걸 보여주듯 온몸이 시꺼멓게 그을렸고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하지도 못한 수준이었다.
압도적인 질량에 의해 한참 동안이나 두들겨 맞았으니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할 리 만무.
오히려 저 정도에서 그쳤다는 게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결과 자체는 고개를 끄덕일 만했지만 다시 말하면 녀석이 저런 꼴이 될 때까지 두들겨 패야 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뭐가 됐든 이들이 놀라워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리라.
이철우는 물론 김태건 그리고 국민지 외 4인방까지, 내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1인분만 해줘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놀랍다 못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신위를 보였다.
아직까지도 4인방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중.
그 정도로 빛기연의 업적은 대단했다.
마법 몇 발로 영웅 등급의 몬스터를 때려잡은 셈이다.
아마 저들의 눈에는 내가 천재 마법사 정하얀처럼 비치지 않을까.
최소한 지금 모여들고 있는 눈빛을 보면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이철우와 김태건은 눈을 비비고 있었고 국민지 외 4인방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다.
‘이제 좀 믿음이 간다, 이거지. 응?’
바크 세르게이와 아르기르모가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무리하게 나를 찾아와 영입 제의를 한 이유에 대한 퍼즐을 맞추고 있음이 분명.
아까까지는 감도 잡지 못했겠지만 현재는 그 퍼즐이 무척이나 쉽게 들어맞고 있을 것이다.
왜.
답이 너무 뻔했으니까.
‘능력이 있으니까 똥줄이 타서 영입제의를 하러 왔겠지, 이 계집애들아. 이게 바로 클래스의 차이야. 클래스의 차이. 너희가 이런 영입제의를 못 들어봐서 그런 오해를 하는 거야.’
전투가 완전히 끝난 이후에도 약 1분 동안이나 침묵이 내려앉은 상황.
이쯤 되니 어떤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지도 고민된다.
‘단순히 운이 좋았어요’라고 하기에는 보여준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내가 행동방향을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뭐라고 말을 잇기 전에 쏟아지는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대단하군요…. 그,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한 겁니까? 기연 씨.”
“네? 그냥 평소대로… 보통 마법사들도 전부 할 수 있는 일 아닌가요?”
“아니요.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보통의 마법사들은 이런 화력을 낼 수 없을 겁니다. 캐스팅 속도가 빠른 것도 그렇지만 마법의 위력이 영웅 등급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라.”
‘그야 당연하지. 전설 등급의 촉매를 쏟아 부었는데 영웅 등급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죄, 죄송합니다.”
‘그래. 니네는 또 뭐가 죄송하니?’
“아니요. 그렇게 죄송해할 필요 없어요.”
“저희가 오해를 한 것 같아서….”
“그런 오해는 많이 받았는걸요. 익숙하니까요.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언니 정말로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언제부터 내가 네 언니가 된 거냐.’
“아니에요, 미정 씨. 그럴 수도 있는 거죠.”
‘계집애들이 태세전환이 만만치 않아.’
“말 편하게 하세요. 기연이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진짜 대단하다. 나 같으면 염치가 없어서 그렇게 못 하겠다.’
“네, 물론이죠.”
“마력이 높지 않으셨던 것 같았는데 정말 대단하신 건 같아요!”
심지어 비벼오지 않을 것 같았던 국민지마저 은근슬쩍 비벼오고 있다.
‘능력이라는 게 대단하긴 하다.’
솔직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유희라면 유희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런 인정을 받는다는 게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쌍팔년도 소설책에 나왔던 드래곤이 왜 그렇게 허구한 날 인간인 척 싸돌아 다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온몸을 간질이는 쾌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 하는 김에 서비스도 조금 뿌려준다.’
“아! 그리고 아까 사냥하다가…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기연 씨.”
“그… 제가 사실은 여기에 오기 전에 붉은 용병에 네임드 몬스터 대응팀에 몸을 담은 적이 있어서요. 받아들이는 건 여러분 마음이지만, 아무래도 제가 보기에는 자꾸만 눈에 띄는 부분이 보여서.”
“붉은 용병 말씀이십니까?”
“네. 잠깐이었지만요.”
“그게 정말입니까? 허.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기분 나쁘지 않게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기분이 나쁠 리가요.”
“일단 태건 씨는 조금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으신 것 같아요. 물론 몬스터와 정면에서 마주하면서 몸을 부딪쳐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으시겠지만 팀 내 사제를 믿고 조금 더 시야를 넓게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서브 탱커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얼굴이 붉어진 녀석의 눈에 보였다.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이것도 전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이번에는 국민지 4인방에 포함되어 있는 서브 탱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또 파티 내의 서브 탱커의 역할은 메인 탱커가 리타이어했을 때 등장하는 걸로 끝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신 거죠? 두 분이서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스왑 과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서브 탱커 분이 조금 더 믿음을 줘야 앞에 있는 메인 탱커도 조금 더 여유로워질 수 있어요.”
“아… 네.”
“두 분이 제 역할을 해줘야 근접 딜러 분도 행동반경이 넓어질 수 있고요. 또 암살자 클래스에게 파티원들이 바라는 게 많은 건 아니에요, 민지 씨. 움직임이 많은 건 좋지만 오히려 신경을 쓰이게 하는 움직임이라…. 차라리 평소에는 원거리 지원을 하시는 게 좋겠어요. 석궁 다루실 줄 아시잖아요? 그렇죠? 어그로가 좀 더 꽉 잡혔다면 근접으로 싸우시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요.”
‘니가 김예리도 아닌데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되지.’
“가장 포지션이 애매한 건 파티 내 근접 딜러 분인데… 아무리 내구 스탯이나 체력 스탯이 낮다 해도 너무 몸을 사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부상을 우려하시는 거라면 이해가 가지만 검사 클래스면 어쩔 수 없어요. 공격이 날아오면 무조건 피하거나 탱커들이 막아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검을 들어야 해요. 조금 잔인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중상을 입을 각오를 하셔야 돼요. 레인저도 마찬가지고요. 어그로 잡히기 전까지 툭툭 던지는 화살이 탱커한테 많이 스트레스를 준다는 건 알고 계신 거죠?”
“네.”
“또 철우 씨도 신성력을 낭비하시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방금 나온 몬스터 같은 경우에는 버프가 없어도 충분히 태건 씨가 버틸 수 있었어요. 첫 버프 이후부터는 팀 내 근접 딜러에게 몰아주시는 게 더 좋으실 거예요. 치유주문 타이밍도 잘 생각해 주시고요. 큰 공격이 떨어지기 전에는 캐스팅이 준비되어 있어야 해요. 그래야 떨어지고 난 이후에 곧바로 신성 주문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개개인의 능력은 다들 좋으신 것 같은데 호흡이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파티원 분들의 포지션을 이해해 주시면 훨씬 더 결과가 좋을 거예요.”
너무 팩폭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눈빛에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기존에 보여줬던 내 능력이 도움이 됐음이 분명.
사실 갓기연 개인이 가지고 있는 화법도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탱커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서브탱커와 사제가 조금 더 잘해줬다면, 서브탱커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근접 딜러가 조금 더 잘해줬다면, 이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킨 것.
개인이 지적당한다면 그저 기분 나빠 하는 걸로 끝이겠지만 집단 전체에 조금씩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면 결과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훌륭하죠. 아주 훌륭해요. 너무 착한 거 아니냐, 기연아.’
잠깐 몸을 담은 파티를 위해 너무 많은 서비스를 해준 것은 아닌지에 대해 고심해 볼 정도.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이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조금 갑작스러웠던 것은 갑작스레 이 자리에 있는 파티원들이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달이 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
마치 대형 길드의 스카우터의 눈에라도 띈 것 같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자세 좋다. 그런 열의가 중요한 거야. 너희 자질은 나쁘지 않아. 충분히 오퍼 받을 수도 있다.’
파란은 녀석들을 영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혹시나 운이 좋다면 다른 대형 길드에서 우정 클랜이라는 하나의 파티를 영입할지도 모른다.
“일단 보상부터 돌리시고… 다음 네임드 몹은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해보시겠어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대비는 제가 해드릴게요.”
“이거 감사합니다, 기연 씨. 도움만 받는 것 같군요.”
“아니요. 이렇게라도 도움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죠. 뭐, 일단은 보상 돌림판부터 돌려보죠.”
“아. 네.”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돌림판이 멈췄습니다.]
[희귀 등급의 아이템 전사의 뿔피리가 선택되었습니다.]
“끄응. 희귀 등급의 아이템인데….”
“아직 두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으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태건아.”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다음 몬스터는 민지 네가 돌려볼래?”
“네. 오빠.”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돌림판이 멈췄습니다.]
[영웅 등급의 하위 네임드 몬스터 지옥수문장 카르사크가 선택되었습니다.]
‘음. 얘도 괜찮네.’
“바로 전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당연하지만 얼굴에는 비장한 표정이 감돈다.
아까와 마찬가지.
이철우의 버프가 김태건에게 쏟아지고 김태건이 몬스터의 사정거리 안에 진입하며 전투가 시작된다.
‘아까보다는 낫겠지?’
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아예 기틀이 없었던 전과는 다르게 현재는 최소한의 기틀은 잡혀진 상태라고 할 만했으니까.
하지만 그것 역시 내 착각에 불과한 모양.
“스왑! 스왑!!”
“근접 딜러 너무 들어가면 안 돼!”
“태건아! 고개 돌려줘야지!!”
“버프는 왜 안 와! 버프!!”
‘슈바. 이거 개판인데.’
“민지야! 화살! 쏘지 마! 쏘지 마! 딜 중지! 딜 중지!!”
잘못 생각했다.
주문이 너무 갑작스러웠는지 진영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개판 오 분 전이라고 봐도 할 말이 없는 수준.
아까처럼 싸웠다면 시간이 걸리더라고 잡을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 녀석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전멸 일보직전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서브 탱커와 메인 탱커의 스왑 과정은 기괴했고 심지어 제대로 스왑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중상을 입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내 말을 중상을 입으라는 말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근접 딜러는 무리하게 들어가 어그로를 개판으로 만드는 중.
국민지는 석궁이 익숙하지 않은지 카사라크의 왼쪽 눈알에 석궁을 때려 박아 몬스터에게 광폭화라는 선물을 주었고 레인저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철우는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곧이곧대로 근접딜러에게 버프를 밀어 넣고 있다.
광폭화로 인해 탱킹을 힘들어 하는 김태건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
‘얘들 뭐 하는 거냐. 진짜.’
이대로 간다면 누구하나는 높은 확률로 요단강 건널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백퍼센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무조건 한 놈은 건넌다.
결국에는 또다시 아까와 같은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불의 거인이 등판해 지옥수문장 카사라크의 뚝배기를 건드리기 시작하자 상황이 겨우 마무리됐다.
깊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파티의 모습은 가관.
혹시나 이 꼴사나운 모습의 공을 내 것으로 돌리지는 않을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녀석들이 선택한 것은 그것보다 더 최악의 방법.
“철우야, 너만 믿고 있었는데… 버프가 너무 안 들어오더라.”
기적의 남 탓.
우정 클랜의 우정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거 아니야, 이 새끼들아.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 니들 사이 박살 내려고 한 게 아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