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0
회귀자 사용설명서 450화
우리 현성이(2)
“파란 길드마스터?”
“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두 명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지 물어보는 듯한 표정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단신으로 도시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녀석과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키야. 이 정의로운 자식.’
아마 장정 두 명이 아녀자 한 명을 희롱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어찌됐건 자신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일단 인사드리겠습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하지만 이건 파란 길드마스터가 생각하시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린델에서 활동하는 우정 클랜으로….”
“여성분이 싫어하지 않습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연 씨. 뭐라고 말 좀….”
도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미 손절 타이밍은 한참 전에 지난 상황.
손목이 자유로워지자 황급히 김현성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쓰레기 같았지만 아무래도 녀석들과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그림으로 그린 듯한 태세전환.
“기연 씨!”
“철우 씨, 원정은 즐거웠지만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방금 하셨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하셨는지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얻은 아이템은 처분하는 즉시 곧바로 보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조금 머리를 식힌 이후에 연락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런….”
“다음에 만날 때는 웃으면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내가 말을 끝내자 얼굴이 흙빛이 된 녀석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울상을 하고 있는 이철우는 조금 불쌍했지만 볼일은 끝났다.
확인할 수 있는 건 전부 확인했고 전체적으로 현재 모험가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이상 쟤네들이랑 같이 다닐 이유가 없다는 거다.
언제나 손절은 냉혹한 법.
나를 힐끔 바라보던 이철우는 이내 김현성이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기연 씨. 상처를 드릴 의도는 아니었는데…. 기연 씨 말씀대로 머리를 조금 식히고 뵙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원정 함께해서 정말로 즐거웠고 꼭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묵었던 숙소에서 기다릴 테니 경매 대금은 그쪽으로 부쳐주시면 됩니다. 그럼….”
“네. 들어가세요. 따로 배웅은 드리지 않을게요.”
풀이 죽은 게 꼭 나라 잃은 느낌이다.
어버버 하고 있는 김태건도 나에게 고개를 숙이곤 이철우의 뒤를 따랐고 국민지도 녀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주 잠깐의 유희가 끝난 이후, 슬그머니 김현성을 봤지만 딱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눈치 못 채고 있나?’
황급히 자리를 옮기거나 내가 이기영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선택지도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나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최근 김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으니까.
중간에 정체가 들킬 가능성에 대해서도 떠올려 봤지만.
‘쟤는 눈치 더럽게 없으니까.’
대놓고 힌트를 주지 않은 이상은 알아 챌 것 같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심하지 않는 기색. 박덕구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덕구가 회귀했으면 이 새끼야. 벌써 세계의 위협이고 나발이고 3년 안에 막아낼 수도 있었겠다.’
농담 삼아 던진 생각이었지만 왠지 정말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간에 녀석은 사심 하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 숙이고 자신이 가던 길로 마저 향하기 시작.
‘뭐야. 이대로 가?’
오히려 다급해진 것은 내 쪽이었다.
“파란 길드마스터!”
다행히 돌아봐 주기는 한다.
“네?”
“감사했습니다. 마침 조금 곤란하던 차였는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럼.”
“저기!”
“네.”
“감사의 인사로 차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혹시 시간 있으신가요?”
“딱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 시바 눈치 없는 새끼!’
왜 녀석을 둘러싸고 있는 여성진이 매일같이 똥 씹은 표정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눈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영원히 고통 받는 박연주, 조혜진, 샤를롯트, 김예리.
그들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지 대충은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온몸으로 눈치를 줘도 제대로 받아먹지도 못했을 거라 장담한다.
딱히 녀석을 붙잡을 명분이 없는 상황.
혼자 입꼬리를 내리고 있었을 때 나를 천천히 살펴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뭐야.’
“닮았군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인연인 것 같은데 잠깐 차, 아니, 식사라도 하시죠.”
가슴이 철렁했던 것도 잠시.
이윽고 들려온 녀석의 목소리에는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닮았다는 건 아네. 심장 떨어질 뻔했네.’
운이 좋았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빛기영과 얼굴이 묘하게 닮은 게 놈의 호감을 산 것이 분명.
보통 김현성은 남에게 먼저 식사나 차를 제안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낯선 사람이라면 일단 피하거나 경계한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녀석의 방어막이 많이 완화됐지만 튜토리얼에서 막 튀어 나왔을 때는 전혀 이렇지 않았다.
식사는커녕 동석도 하지 않았던 것이 현실.
녀석의 성장의 조금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야 많겠지만 결과적으로 유해진 것이다.
단순히 빛기영과 닮았다는 이유로 저런 제안을 해올 정도라면 나에 대한 호감 역시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무 1차원적인 걱정은 일단 구석으로 몰아놔도 상관없으리라.
“네. 그렇게 하도록 해요. 파란 길드마스터와의 저녁식사라니. 제가 더 감사하죠.”
“…….”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놀리고 싶어진다.
“이거 데이트 신청인가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건….”
우물쭈물하는 듯한 얼굴.
왠지 평소 같은 느낌이라 조금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시 호흡을 가라앉힌 녀석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이렇지 않습니다. 남에게 함부로 식사를 권하거나 시간을 내달라고 하는 타입도 아니고요. 그런데….”
“네?”
“오늘은 조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든 것 같습니다.”
‘현성아, 너 선수 아니냐.’
별것 아닌 대사.
하지만 저 외모로는 무슨 말을 해도 여심을 찌르기에 충분하다.
만약 여기에 있는 게 내가 아니었다면 거의 확정적으로 김현성 하렘에 합류했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우연이네요. 저도 마찬가진데.”
“그거 정말로 우연이로군요. 그럼 일단 움직이시죠.”
“그런데… 혼자 나오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다른 길드원 분들은….”
“아직 업무 중일 겁니다. 저도 오랜만에 바람을 쐬러 나온다는 게 이렇게 돼서.”
“답답하셨나보군요.”
“네?”
“보통 그렇잖아요. 일하시다가 답답하실 때 한 번쯤 바람 쐬러들 나오잖아요? 그 말이었어요. 표정을 보니 정말로 답답하실 일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정곡을 찔렀나요? 후훗.”
“조금… 답답한 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표정을 읽는 데 익숙하신가 보군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파란 길드마스터께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타입인 것 같으셔서….”
“제가 말입니까?”
“네. 언뜻 보면 무표정이신 것 같지만 미묘하게 알 것 같거든요. 왠지 모르게.”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네요.”
“그래요? 조금 의외네요. 주변 분들에게 많이 들어봤을 것 같은데….”
“하하.”
멋쩍게 웃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본래는 걸음이 훨씬 빨랐던 것으로 기억.
하지만 천천히 속도를 맞춰주는 걸 보니 영 맹탕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눈치 없는 것치고는 매너가 몸에 배었다.
아마 이런 점이 녀석을 좋아하는 여성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현성아, 시바. 너무 멋있는 거 아니냐. 적당히 해라. 반하겠다. 이 새끼야.’
생각했던 것보다 대화가 스무스하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화술 스탯이 희귀 등급으로 추정되는 녀석치고는 꽤나 노력해 주는 모습. 적당히 호응해 주는 것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미소를 짓고 있으니 대화하기가 편하다.
갑작스럽게 성사된 소개팅 같은 자리였지만 생각보다 위화감이 없다.
마치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는 느낌에 나 역시 이것저것 재지 않고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아마 그건 녀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식당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마찬가지. 의자를 빼주는 모습은 정말로 녀석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앉으시죠.”
“이런 매너는 부담스러운데… 여성분들과의 자리가 익숙하신가 보네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숨기지 않으셔도 돼요. 파란 길드마스터 정도 되시는 분이 주변에 여자가 없다는 게 더 이상한 걸요.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건 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 받아들여도 될까요?”
“끄응.”
“농담이에요, 농담.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말입니까?”
“유명인이시잖아요. 린델에 해주시는 것만 봐도 답은 금방 나오죠. 아! 와인도 시켜도 되나요?”
“네. 물론입니다. 식사 제안은 제가 드렸으니.”
“그럼 부담 없이 고를게요.”
“네.”
안 그래도 고급진 것들을 목구멍에 들이고 싶었다.
그동안 먹었던 건 소시지 말고는 맛있다고 하기에는 힘든 것들뿐이었으니까.
‘분위기는 좋은데.’
여기서부터 대화의 방향을 어떻게 꾸려나가느냐가 중요.
녀석이 나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리라.
분위기는 좋긴 하지만 녀석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어째서 최근 조금 이상한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해 스스로 내뱉을 리 만무.
생전 처음 본 여자에게 주절거릴 정도로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입은 가볍지 않다.
오히려 조금 무거운 편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벌써부터 선을 긋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놓고 유혹해 봐?’
그건 기각.
수많은 미녀 사이에서 하렘라이프를 즐기고 있는 녀석이 반응할 확률은 낮다.
차라리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편이 유리할 수도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할 말도 거리감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까.
녀석이 지금 나에게 가지고 있는 호감도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내가 먼저 고민을 이야기하고 녀석의 고민도 들어봐 주는 식.
이런 노선을 타는 게 가장 적당 하리라.
당장 본론부터 꺼내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움직여 경계심을 키울 필요가 없다.
적당히 분위기를 즐기는 게 첫 번째. 간을 보는 게 두 번째다.
“박물관에 들어갔다 오신 겁니까?”
“네. 정말 좋은 곳이더라고요. 무엇보다 모험가 보험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어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게 도와주잖아요. 물론 어느 정도 위험이 있어야 하는 것도 인지하고 계시지만 누구나 전투에 대한 불안감은 가지고 있잖아요.”
일단 가장 가까운 주제부터 조지는 것은 물론.
“사실 예전에 멀리서 뵌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도 잘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훤칠하시네요. 그런 말씀 많이 들으시죠?”
“많이 듣는 편은 아닙니다. 간혹 듣기는 합니다만.”
“후훗.”
가벼운 농담 따먹기도 빼먹지 않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는 것도 수 시간째.
녀석이 지루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기색이 없다.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니 적당히 분위기에 취한 모양.
조금 멀었던 의자와 의자 사이의 거리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 마음의 경계심 또한 허물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이거 시발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것.
조금은 거리조절을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