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1
회귀자 사용설명서 451화
우리 현성이(3)
‘거리 조절 좀 하자.’
여기에서 더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히 지양해야 한다.
이기연의 포지션은 김현성과 끈끈한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하룻밤 불장난을 저지를 생각은 없지만 마치 원나잇 상대 같은 담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깊은 대화를 주고받고, 서로 미련 없이 헤어지는 깔끔한 관계.
너무 친해졌다가는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내밀어져 있던 몸을 슬그머니 뒤로 젖힌 것은 당연지사.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김현성은 내 신호를 거리감을 두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순히 자세를 바꿀 뿐이라고 생각한 모양.
애초에 이런 액션에 일일이 반응하는 녀석도 아니지만 중요한 자리인 만큼 이런 행동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네.’
물론 대화는 지속된다.
가벼운 이야기부터, 조금은 사적인 이야기까지.
조금 의외였던 것은 김현성 역시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중얼거렸다는 것.
사실 자세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녀석이 말해오는 건 기껏해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끌어내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군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드네요. 린델을 대표하는 길드마스터의 입장이라는 게 편치만은 않나 봐요.”
“네. 여러 가지 정치적으로 얽혀 있는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교황청 쪽도 생각해야 하고 주변 도시들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해 봐야 합니다. 잘난 듯이 말했지만 사실 저도 이런 쪽으로는 젬병이라….”
“하지만 파란 길드는 잘해내고 있잖아요? 무력도 무력이지만 정치적인 면도….”
“아마 제 친우 때문입니다.”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나를 언급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친우… 아, 명예추기경님.”
“네.”
‘키야. 현성이가 날 친구라고 해주고…. 내가 다 눈물이 나네? 현성아, 형이 아낀다.’
“소문대로 사이가 돈독하신가 봐요?”
“글쎄요. 최소한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조금은 이상하죠. 가끔은 형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니까요.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상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현성아, 형이 니 마음 다 안다. 형도 마찬가지야.’
“아마 명예추기경님도 같은 생각을 하시고 계실 거예요. 제가 두 분에 대해 아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 같은 건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까?”
“후훗. 명예추기경님께서 파란 길드마스터에게 얼마나 충성하는지는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잖아요? 사실 충성심이라는 표현이 조금 어울리지는 않지만….”
“하하. 네. 충성심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 겁니다. 오히려 조금 부끄럽습니다. 충성이라니….”
“우정이라고 말하는 게 더 듣기 편하시겠어요. 그렇죠. 우정. 사실 조금 부럽기도 해요.”
“네?”
“이곳에서 그런 관계를 찾을 수 있다는 거.”
“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거 쉽지 않잖아요. 까딱하면 뒤통수에 칼 맞을 수 있는 곳인데…. 마음 놓고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게 어디 쉽나요.”
“이해합니다.”
“…….”
확실하지는 않지만 딱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타이밍.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고 분위기도 충분히 무르익었다.
지금보다 더 시간을 끈다면 오히려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존재하는 만큼 마음을 굳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감정 한번 잡고 천천히 입을 열자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시선이 느껴진다.
“사실.”
“네.”
“사실 저도 그런 사람이 있었거든요. 파란 길드마스터에게 명예추기경 같은 사람. 친자매처럼 느껴졌던 사람이요.”
“그 말씀은….”
“네. 지금은 없어요. 사고가 있었고 결국에는 죽었어요. 제 잘못 때문에요.”
“네?”
“흔히 있는 이야기예요. 믿지 못했거든요.”
“아….”
“언니는 저를 믿었는데. 저는 언니를 믿지 못했어요.”
“…….”
“…….”
“제가 처음 만난 분한테 무슨 말씀을 드리는 건지 모르겠네요.”
눈물을 흘리는 추접스러운 짓은 하지 않는다.
찰랑거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이야기를 꺼내는 게 더 효과적이었으니까.
슬쩍 김현성의 표정을 살피니 많이 당황한 눈치.
갑작스레 분위기가 인간극장으로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눈에는 진지하게 나를 위로해 줘야겠다는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마 위로해 주고 싶을 것이다.
녀석 역시 동료를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테니까.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드렸네요. 우는 여자는 매력 없는데….”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취향 한번 특이하시네요.”
“큼. 못 당하겠군요.”
“죄송해요. 반응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뭐… 아무튼 그래요.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대륙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죠.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극복했으니… 굳이 그런 표정 지으며 위로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현성 씨.”
“네.”
“그럼 한잔 더 할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정말로 유감입니다.”
“계속 이렇게 우울하게 만들 거예요? 빨리 짠 해요. 짠. 으… 독하네요. 이 와인은.”
녀석이 살짝 웃으며 술을 들이켜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미소가 자연스럽지는 않다.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먹혔나.’
표정만 보면 제대로 먹힌 것 같다.
조금 노골적이라 걱정했는데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모양.
조금 기쁘기도 했지만 다른 의미로는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방금 이야기가 먹혔다는 건 현재 김현성이 나를 조금이나마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진배없었으니까.
‘현성아, 시바. 형 진짜 가슴 아프다. 내가 뭘 했길래. 자꾸만 이렇게 형을 의심하냐. 형 가면쓰레기 같은 사람 아니다. 진짜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이야.’
하지만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대륙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되는 장면이 있기는 있었다.
아마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보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밟히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걸 생각해 보면 합리적 의심은 충분히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다.
형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형제는 본래 싸우면서 크는 법이다.
다시 한번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
내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김현성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차례. 물론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또 그 표정이네요.”
“네?”
“답답하다는 표정이요. 바람 쐬고 싶어졌어요?”
“정말로 남의 표정을 읽는 데 익숙하시군요.”
“얼굴에 드러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래도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마침 저도 생각할 만한 게 있었을 뿐입니다. 신뢰에 관한 이야기요.”
“명예추기경 말씀이신가요?”
김현성은 쓴 웃음을 보내왔다.
아마 긍정의 뜻이겠지.
“뭔가 문제가 있나요?”
“아니요. 타인에게 문제 같은 건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저한테 있습니다.”
“네?”
“제 인간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답답함이 아니라 자괴감이었군요.”
“네. 굳이 표현하자면 그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자괴감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도 될까요.”
“…….”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 뒤로 빼려나.’
조금 아쉬워지려는 찰나.
다시 한번 입을 열어오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의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네?”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의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정말로…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개인적인 문제요.”
“아….”
“신뢰에 보답하지 못하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아닌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계속해서 쓸데없는 감정이 생겨나고, 결국에는 제대로 마주할 수 없을 정도까지 와버리더군요. 언제부터, 어쩌다가 이렇게 된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성이 망가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 바보 같은 새끼. 현성아… 너 왜 이렇게 착해 빠졌냐.’
불안하기도 했지만 기쁘기도 했다.
녀석이 대충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확실히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문제는 그걸 자신의 잘못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1회 차에 너무 뒤통수를 처맞았기 때문인지 사람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PTSD에 걸렸다고 판단하고 있는 모양이다.
본인도 무척 괴로워하는 모습.
자기 입으로 형제라고 말하면서도 슬슬 나를 피한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 그렇게 뒤통수를 맞았는데 그럴 만도 하지…. 이해할 수 있다, 현성아.’
실제로 공화국과의 전쟁에서도 극심한 PTSD를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 연장선인 모양.
사실 김현성의 말처럼 모든 잘못이 김현성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만한 사건이나 정황이 있었다.
하나하나 퍼즐을 맞추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을 뿐이지 무의식 속에 퍼즐을 숨기고 있다는 거다.
쾌재를 지를 만한 것은 본인이 먼저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는 것.
딱히 내가 뭘 하지 않아도 본인이 먼저 나서서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있다.
‘기영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의심하면 안 돼.’
따위의 생각으로 브레이크를 걸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녀석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심각할 만하다.
아무 죄 없는 나를 자꾸만 가슴 속에 있는 마구니가 의심하라 소리치는 상황이었으니까.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을 볼 때마다 인간성이 마모되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아요.”
“…….”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하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기에 파란 길드마스터는 인간성이 마모된 사람이 아니에요. 위로하려고 드리는 말이 아니에요. 단 몇 시간뿐이지만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현성 씨는 좋은 사람이라고.”
“…….”
“제 말이 맞아요.”
“저도 취했나 봅니다. 이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제가 먼저 이야기를 드렸었으니까요. 이런 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경험을 겪은 선배로써 말씀드리자면.”
“네.”
“대화를 많이 해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
“솔직하게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이야기를 전부요. 분명히 도움이 될 거예요. 계속해서 뒤로 미루는 건 좋지 않아요. 형제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셨잖아요.”
“네.”
“명예추기경님도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충분히 현성 씨를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아….”
‘그래 이 새끼야. 서로 마음속에 있는 건 훌훌 털어내야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한잔 더 할까요?”
“네.”
‘나쁘지 않았어.’
충분히 자연스러웠다.
이런 식으로 통수를 치는 게 조금 가슴 아프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머릿속에 있는 마구니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느껴진다.
생각보다 더 좋은 결과에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진 것은 당연.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녀석과 함께하는 술자리라 조금 오버해서 마셔 버렸다.
슬그머니 정신이 알딸딸해지는 느낌.
김현성이 보기에도 내가 제법 취해 보였는지 걱정하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으흥.”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군요. 숙소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괜찮다니까요. 그렇게 걱정 받을 정도로 약하지는 않으니까. 조금 더 마셔요.”
“아니요. 지금 데려다 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데려다 주지 마, 새끼야.’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