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2
회귀자 사용설명서 452화
우리 현성이 (4)
“아니요. 지금 데려다 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제기랄.’
슬그머니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물론 잘생긴 얼굴 속에 다른 감정이 들어 있지는 않다.
혹시라도 이상한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가, 걱정했었지만 말 그대로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했던 모양.
귀갓길에 혹시 모를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애초에 유니콘이 인증한 초식남이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
깔끔하게 호의를 받아들여도 되는 건 아닌지에 대해 고민도 해봤지만 역시나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게 아름다워 보였다.
‘아냐. 이 새끼도 남자니까.’
어떻게 사건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다.
방금 깨달은 사건이기는 했지만 아까부터 분위기가 꽤나 묘하다.
우연히 만난 두 남녀, 평소 같지 않은 행동, 술에 취한 것은 물론 서로에게 이상한 유대감마저 느끼고 있다.
만약 정상적인 남녀 관계였다면 곧바로 균열 모텔로 돌진해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
물론 우리는 균열 모텔로 돌진할 생각 따위는 없다.
사실 그것보다는.
‘효과가 얼마나 남았지?’
요정이 걸어놓은 마법 효과가 슬슬 끝날 타이밍이라는 게 더더욱 문제.
술사와 받아들이는 대상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요정의 장난이 유지되는 시간은 3일이 한계다.
오늘이 딱 3일째라는 걸 생각해 보면 어떻게 생각해도 조심하는 게 맞다.
차라리 이 전에 들켰다면 상관 없겠지만 죽은 언니마저 팔아가며 구라를 친 것을 떠올려 보자 몸을 사려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들키는 순간 김현성 안에 있는 의심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게 되리라.
‘조금 더 효과가 유지되기는 할 거야.’
빛기영은 마법 저항력이 약했으니까.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는 만큼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과는 반대로 꼬부라지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
내가 생각해도 술이 된 여자의 목소리다.
김현성의 얼굴에 다시 한번 걱정스러운 감정이 감돈다.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니 비어 있는 술병들이 시야에 비쳤다.
언제 이렇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분위기가 좋았고 이상하게 술도 잘 받는 날이었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취하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막 원정을 마치고 되돌아 온 타이밍.
크게 힘을 들인 것은 아니었지만 근 3일 동안 몸을 무리하게 굴렸으니 몸 전체가 피로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평소의 주량을 오버해서 마셔댔으니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눈치는 없는 주제에 내 상태에 대해서는 귀신같이 파악하고 있는지 녀석의 얼굴은 이미 근심에 휩싸여 있다.
뜻하지 않은 위기를 맞이한 만큼 가방을 로브 안 쪽으로 더욱더 밀어 넣은 이후 다시 한번 녀석을 바라본다.
“이만 일어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숙소는 어디로 구하셨는지….”
“따, 딱히 구하진 않았어요. 구하기 전에 막 현성 씨와 마주쳐서…. 아마 균열 여관에 방은 많을 테니 그쪽에 가는 게 좋겠네요.”
“아직 구하지 않으셨다면….”
“네.”
“파란 길드 지부로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균열 여관에 있는 방보다는 지낼 만하실 겁니다.”
‘쓸데없이 친절해지지 마라. 이 자식아.’
“아뇨. 아무래도 그건 좀…. 이미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쳤는데 더 이상 그럴 수는 없어요. 이렇게 좋은 식사도 얻어먹었는데, 저를 너무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현성 씨.”
“아닙니다.”
“조금 부담스러워서.”
“괜찮습니다.”
“저도 정말로 괜찮아요.”
‘이 새끼 왜 이렇게 강경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이 갑작스레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오는 상황.
곧바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아니, 애초에.
‘내가 거절한다고 해도. 얘가 가만히 있을까?’
아마 미행을 해서라도 내가 균열 여관으로 들어가는 꼴을 확인하려고 할 것이다.
이놈은 그런 놈이니까.
차라리 빠르게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위험 부담은 있지만 그나마 할 수 있는 선택 중에서는 가장 그럴 듯하게 느껴졌다.
일단은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주변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순식간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탁자를 잡고 간신히 균형을 유지했다.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녀석의 몸이 보였던 탓이다.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정… 그렇다면 근처까지만 부탁드릴게요.”
‘웃지 마라, 현성아. 정들겠다.’
“네.”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고 레스토랑의 밖으로 나가자 어느덧 날이 어둑해졌다.
하늘 위에 수놓아진 별은 괜스레 탄성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
없던 분위기마저 생겨나게 하는 배경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따라 별이 많이 떠 있는 것 같군요.”
“정말로. 그러네요. 하아….”
“괜찮으신 겁니까.”
“조금 어지러운 것 빼면 문제는 없어요. 이거 죄송해서 어떡하죠. 끝까지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주셨으니 그 답례라고 생각하시면….”
“제가 뭘 했나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해드린 것뿐인데요. 아마 주변 분들에게 물어보셨어도 다들 같은 말을 해주셨을 거예요. 큰 도움을 드린 것도 아닌데, 그렇게 치켜세워 주시니 조금 민망하네요.”
“…….”
살짝 새침한 표정을 유지.
거리에 있는 조명 덕분인지 괜스레 녀석의 얼굴이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걷기 너무 힘든데…. 너무 오바했어. 시바…. 기연아, 왜 그랬니. 왜 정신을 놓고 놀았니.’
당연하지만, 평소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다.
오랜만에 우리 동생이랑 같이 논다는 생각에 정신을 놓고 마셨다.
걷는 게 힘들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김현성의 제안을 받아들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 봐야 할 정도였다.
최대한 서둘러 걷고 있는 것 같지만 풍경이 계속 그대로인 느낌.
심지어 내가 비틀거리는 것도 느껴진다.
아무리 균열랜드의 치안이 좋다고 한들, 이런 밤에 여성 혼자서 돌아다니는 건 적절하지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칼질 한 번에 거대한 몬스터의 목을 날릴 수 있는 괴물들이 즐비한 장소니까.
혼자 정신을 놓고 다니다 낭패를 본 이들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김현성의 입장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는 거다.
여러 대화를 천천히 나누면서 걸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김현성의 얼굴에는 걱정이 묻어나오는 중.
하지만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었다.
어깨를 빌려 줘야 할지 업어줘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 자.
혹시나 손이 닿는 게 불편하지는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얘 진짜 쑥맥이네.’
의도하지 않은 신체적 접촉을 조심하기 위해 거리를 두는 건 이해하지만 이 정도면 병신이다.
만약 내가 실제 여성이었다면 녀석의 이런 친절에 오히려 짜증을 냈으리라.
‘자신감 있게, 손도 잡고! 마! 은근 슬쩍 어깨동무도 하고! 마! 은글슬쩍 인마! 다 해야지, 인마!’
물론 내가 그런 상황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신체적 접촉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녀석의 행동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발걸음을 맞춰주고 있는 모습.
혹시나 이쪽이 쓰러질 때를 대비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매너 있어 보인다기보다는 연애경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안 그래도 느린 걸음이 더욱 느려지는 중.
그나마 균열 여관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한참은 걸릴 것이다.
몸 한 구석이 이상 신호를 보내온 것은 바로 그때.
‘왜, 이렇게 뜨겁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갑작스레 몸이 뜨거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안 그래도 힘든 몸이 더욱더 힘들어진다.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에 당황한 것은 당연지사.
따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괜스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마법.’
내게 덧씌워진 마법이 풀리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 조금 있으면 벗겨질 것 같다.
의심이 아닌 확신.
아주 조금씩이지만 체내에 있는 마력이 타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력이 아니다.
외부에서 들어와 있는 마력. 방심 하는 순간 안에 있는 게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제기랄.’
나도 모르게 거칠어지는 숨.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기고는 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직도 균열 여관은 멀고 김현성은 나를 호위하듯 바라보고 있다.
거친 숨소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자 녀석이 나를 바라봤지만 저런 호의는 전혀 반갑지 않다.
“하아….”
“괜찮으십니까?”
대답할 여유도 없다.
내 몸을 떠나려고 하는 마력을 붙잡아두는 데 정신을 집중해야 했으니까.
여기서 마법이 풀려 버리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생각에 초조해지기 까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현성은 요지부동이다.
‘빨리 가라, 현성아.’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여기서 부터는… 흐읏. 혼자 갈 수 있어요.”
“네? 하지만.”
“어두운 골목은 지나왔고… 이제 큰, 큰길이니까….”
오줌이라도 마려운 것 같은 목소리. 내가 들어도 상태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얼마 안 남았으니 끝까지 데려다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밤에는 위험하기도 하고요. 큰길이라고 한들….”
“정말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
‘틀렸어. 이 새끼 들을 생각이 없어.’
확실히 외골수적인 성향이 있다.
뭐라고 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에 침을 삼켜 넘긴 것은 당연지사.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려는 마력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기에도 힘에 부친다.
말하랴, 걸으랴, 마력 유지하랴, 머리가 어지러운 상태에서 자꾸만 어려운 미션이 하나씩 추가되는 기분.
정신을 놓아버리면 구멍이라도 뚫린 둑처럼 모든 게 콸콸콸 흘러내릴 것만 같다.
‘김현성… 야 이 씨….’
조금 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조금 무리수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 녀석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
아니 분명히 이건 먹힌다.
김현성의 성격이라면 틀림없이 통한다.
생각은 수십 가지.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목구멍에서는 바로 준비된 대사가 튀어나온다.
순진한 우리 현성이를 쫓아내기 위한 빌드업.
“정말로 혼자 갈 수 있어요, 현성 씨. 정말로요. 걱정하시는 건 이해하는데 제가 너무 불편해서 그래요.”
“하지만….”
“이 정도까지 말씀드렸으면… 의사표현을 확실히 한 것 같은데…. 그만 돌아가 주세요.”
“조금만 더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 정말 괜찮아요.”
슬쩍슬쩍 기분 나쁜 티를 냈지만 역시나 알아차리는 것이 느리다.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였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은 듯한 느낌.
넘어질 것처럼 살짝 비틀거리자 거미줄을 향해 돌진하는 나비의 몸짓으로 날아와 내 어깨를 붙잡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다행이라는 듯 나를 바라보는 순진한 회귀자의 눈빛.
하지만 그 눈빛이 당혹스러움으로 바뀌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왜.
굉장히 불편하다는 표정의 비치기연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테니까.
“죄….”
사과가 먼저 튀어나오기 전 말을 끊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 그런 여자 아니에요. 파란 길드 마스터.”
‘미안하다, 현성아….’
“네?”
‘진짜 미안해….’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저 그런 여자 아니라고요. 아까부터 너무 노골적이신 거 아닌가요?”
지금까지 수많은 쓰레기 짓을 하면서도 몇 번 반응하지 않았던 양심의 가책이 가열차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김현성의 표정.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