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3
회귀자 사용설명서 453화
우리 현성이(5)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 한쪽이 저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반문한다면 양심의 가책이 가시기라도 했겠지만 이 순진한 새끼는 자신의 무얼 잘못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모양.
상황 자체가 조금 억지스러웠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죄책감과 비슷한 무언가가 얼굴 한쪽에 감도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럴 만하지.’
사실 충분히 오해할 만할 여지가 있었다.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을 계속해서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질척거리며 달라붙었던 모습은 레이디를 지키는 기사라기보다는 발정난 양아치.
온갖 일을 다 겪은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조신하고 또 조신한 빛기연의 입장에서는 뭔가 흑심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심지어 마지막에 신체접촉마저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어깨를 파악하고 붙잡았잖아. 심지어 배도 건드리지 않았나? 엉큼한 새끼 이거….’
물론 우리 현성이는 넘어지려고 한 나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뿐이겠지만, 온전한 처녀의 몸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렀다면 응당 그 책임을 져야 하는 법.
마음을 조금 더 독하게 먹어야만 했다.
생각해 보니 고급 마력 운용지식을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면 굳이 손을 쓰지 않고도 나를 붙잡을 수 있었다.
잠깐 잊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벌어진 녀석 답지 않은 실수.
아마 본인 역시 그 실수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모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겸허히 내 말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괜스레 탄식을 자아내게 했다.
‘1회 차에 그렇게 통수를 맞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이거.’
차라리 나를 먼저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혹시나 웬 꽃뱀 같은 계집애가 달라붙었다면 사고가 났어도 단단히 났을 테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하다.
파란 길드마스터 성추행 의혹 같은 타이틀의 기사가 린델에 돌아다니는 것보다 끔찍한 상황은 없다.
물론 나는 그런 기사가 나가게 내버려 둘 생각 따위는 없다.
아니, 애초에 녀석이 다른 지지배와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게 상상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 공부 한다고 생각해라, 현성아.’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절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거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아암. 아프니까 청춘이지.’
어차피 인생을 살면서 몇 번 정도는 이런 상황에 직면할 것이 분명.
그때가 돼서 많이 아픈 것보다는 빛기영이 안배한 성장통을 겪어보는 게 낫다.
‘나는 그나마 사정을 봐주기라도 하니까.’
귀신같은 합리화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기 시작.
그 와중에도 김현성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내가 먼저 치고 들어가야지.’
“분명히 거절의사를 밝혔는데도 이런 식으로 나오시니 저를 값싼 여자 취급 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네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분위기가 좋았다는 건 인정 할게요, 파란 길드마스터. 즐거운 시간이었고… 그럴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에요. 제가 오해의 여지를 드렸다면 죄송하지만 저는 절대로 그럴 생각 없었어요. 저를 구해주시고 좋은 식사를 대접해 주신 것도 너무 감사하지만 그 대가가 이런 거였다면 차라리 도움 받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 같네요.”
“그게 아니라.”
조금은 냉정하게.
“하룻밤 같이 보낼 여자가 필요하면 다른 곳에서 알아보세요.”
“아니.”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하시나 봐요?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요?”
“아뇨.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분이 상했다는 티를 팍팍 내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당황스러워 하는 것이 보인다.
어떻게든 오해라는 걸 설명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기는 했지만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내 말에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
혹시나 자신이 무례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물론 녀석이 딱히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데려다 준다고 말하는 것 정도로 이런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무리수.
신체적 접촉은 어디까지나 넘어질 뻔한 나를 잡아주기 위함이었고 끈질기게 달라 붙어왔던 것 역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사실 김현성을 무례한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비치기연을 예민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아니, 오히려 미친년에 가깝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함정에 빠뜨린 셈이나 다름없으니까.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하자면 전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걸려들어도 제대로 걸려든 모양.
당연히 그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극한의 연기력이다.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물론 눈에는 약간의 눈물을 머금는다.
실망했다는 표정과 함께 자괴감에 휩싸인 복잡한 감정도 얼핏 보여준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의 표정이 이러할까.
거울로 현재의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김현성의 표정만 봐도 연기력은 충분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길게 이야기를 끌 필요도 없다.
애초에 길게 끌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계속해서 이런 상황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불리했으니까.
치고 빠지는 게 더 효과적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런 분인 줄 알았다면….”
“오, 오해입니다. 정말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상처를 받으셨다면 죄송하지만…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다른 마음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나요?”
“…….”
“…….”
“어?”
“…….”
거기서 멈칫 하면 안 되지, 이 새끼야. 조금은 있었어도 자식아 일단은 잡아떼야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현성아, 너도 남자구나.’
개미 손톱만 한 호감이었겠지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심지어 고개를 숙여오는 꼴은 가관.
“죄송합니다. 불편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뭐라고 변명이라도 좀 해라. 바로 사과하는 거 아니다, 현성아. 이런 상황에서 사과하면 지는 거라고….’
너무나 진심 어린 사과에 오히려 이쪽이 더 민망해진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저쪽에서 적당히 흥분하거나 변명을 해줘야 조금 더 긁어 먹을 구석이 생긴다.
억울할 만도 하건만 녀석은 치졸한 변명 대신 마음을 담은 사과를 선택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가면 오히려 이상한 쪽은 빛기연.
결국에는 나 역시 한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실랑이할 시간도 없었으니까.
“후우….”
“…….”
“알겠으니까. 고개 드세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현성 씨 모습을 보니까 저도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럴 분이 아니신데…. 제가 부끄러운 생각을 한 모양이에요. 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
“조금 취한 건 사실이지만 저는 세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니에요. 엄연히 영웅 등급 판정을 받은 모험가고… 무엇보다 혼자 돌아갈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걱정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너무 과한 친절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거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이번에도 이전처럼 나오시면 정말로 쓸데없는 오해를 하게 될지도 몰라요. 아니, 솔직히 지금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고요. 현성 씨 의도가 어떠셨던 간에 받아들이는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모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제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아실 거라고 믿어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좋은 쪽으로 시작된 만남. 마무리까지 좋게 끝내고 싶네요. 좋은 인상만 남기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예.”
“오늘은 이만 봤으면 좋겠어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하게 됐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사과하지 말라고….’
“네.”
‘X나 조신했어. 시바.’
조선 시대급 조신함이라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행동이었다.
스스로에게 뿌듯함이 느껴지는 것도 잠시, 어려운 미션을 해결했다고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잘 정리해서 마무리한 건지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일단은 상황 자체가 나쁘지 않다는 거다.
김현성 역시 이 이상 고집부리는 게 무리수라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모양.
미행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한 번 실수했다는 걸 인정한 만큼 쓸데없는 짓을 해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멀찍이서 바라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겠지.
이제 남은 것은 균열 여관까지 되돌아가는 것.
머리가 빙빙 돌기는 했지만 최대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다.
당연하지만 쓰러지거나 비틀거려서도 안 된다.
조금이라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순간 녀석의 오지랖이 다시 한번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이미 육체와 정신은 한계.
방심하는 순간 마력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릴 것 같다.
입술을 꽉 깨물고 온몸에 힘을 주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긴다.
나름대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 뒷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걱정되는 것이 사실.
커다란 길에 있는 큰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니 혹시나 넘어지지 않을지 신경 쓰인다.
‘시이바… 망할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몸이 비틀거렸던 것은 바로 그때.
난간을 붙잡고 기적적으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걸 참을 수 있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신발 한쪽이 벗겨진다.
‘X데렐라도 아니고 시바!’
“기연 씨! 신발이….”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저 소리에 반응할 수 있을 리 만무.
‘아직도 보고 있었어. 이 스토커 같은 새끼. 제발 집에 좀 가!’
되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지금으로서는 녀석이 나를 앞질러 신발을 전해주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는 모양.
뒤에서 뭔가 기척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제발….’
멀게만 느껴졌던 균열 여관이 점점 가까워졌다.
순간적으로 긴장을 놓아버릴 것 같았지만 최대한 서두른다.
‘제발!’
덜컹.
“안녕하세요. 균열 여관에 오신 것을 환영!”
“전설 등급. 방. 빨리.”
“아… 네.”
“잔돈은 필요 없어요.”
금화 뭉텅이를 던진 이후에는 곧바로 위로 향한다.
“체크인은….”
“지금 바로 올라갈 거예요.”
“네.”
“방 번호.”
“지금 안내를….”
“필요 없으니까. 빠, 빨리요.”
“네.”
‘제정신이면 여관 안까지 따라 들어오지 않겠지.’
하지만 방 안에 들어갈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노릇.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은 느낌, 마치 소변이라도 마려운 기분이다.
안내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고 한 이후에는 곧바로 방 안에 들어섰고 이윽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공간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세이프….”
몸 안에 있던 마력이 전부 빠져 나간 것은 바로 그때.
슬쩍 고개를 돌려 거울을 확인하니 시야에 비친 것은 익숙한 남자의 모습.
사실 빛기연의 모습도 굳이 나쁘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이 모습이 더 정감이 간다.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지사.
맨발이 괜스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훌륭히 미션들을 완수했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모든 게 완벽했어.’
김현성이 신발 주인을 찾는다는 헛 짓거리만 하지 않는다면 더욱더 완벽한 원정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