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459화 (457/1,590)

# 459

회귀자 사용설명서 459화

조혜진 사용설명서(4)

시간이 아주 약간 흘렀다.

정하얀, 한소라를 포함한 마법사들은 혹독한 스케줄을 강요당했고 그에 보답하듯 균열 랜드는 기획했던 모습이 되어갔다.

이제는 완공 전인 건물보다 완공 후의 건물이 더 많은 상황.

마법사를 포함한 인부들이 어느 정도로 힘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바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행정적인 처리를 계속해야 했던 나 역시 제대로 숨 돌릴 시간이 없었던 것은 당연.

김미영 팀장과 이지혜, 박덕구의 그녀 마도학자 황정연, 심지어는 선희영까지 불러와 밤을 새우는 날이 지속되었다.

파란에 입단한 신입 엘레나는 균열 랜드를 찾은 엘프나 이종족을 담당했고 길드 유일의 대장장이인 유아영은 하루 종일 망치질을 쉬지 않았다.

균열박물관에 보상으로 쓸 만한 아이템을 대줘야 했기 때문이다.

대장장이 겸 서브 탱커로 데리고 온 유아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 할 만했다.

살라트의 뼈나 디아루기아의 비늘로 만든 갑주들은 충분히 고급 아이템으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퀄리티가 높았고 영웅등급은 물론 전설등급에 오른 이들 역시 유아영 컬렉션에 큰 관심을 보였다.

포션 사업과 더불어 파란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새로운 사업이 물꼬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폭발적인 성장에 나 역시 한층 더 바빠진 것은 당연지사.

쓸 만한 대장장이를 길드직원으로 들이는 한편, 연금공방과 같은 공장 시스템을 새로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유아영이 직접 제작하지 않은 하위 장비들 역시 엠블럼을 찍어 컬렉션으로 내보낸 것.

타깃은 희귀 등급의 모험가들.

고급화된 장비를 통해 올린 수익 역시 상당했지만 하위 품목으로 얻는 수익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아니, 어느 시점에서는 오히려 전자를 뛰어 넘었다.

사실상 저가 장비였지만 파란의 엠블럼이 찍혀 있으니, 하위 모험가들의 지갑을 여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균열랜드에 들어가는 초기 투자비용을 유아영 컬렉션으로 전부 회수 했을 정도였으니 다른 언급이 필요할 리가 없다.

물론 새로운 시장으로 인해 덕을 본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본래 불티나게 팔려나갔던 포션 컬렉션 역시 묵직하게 자리를 잡아 훌륭한 수익을 뽑아내 주었고 그 외 다른 부분에서 일어난 수익 역시 입이 떡하니 벌어질 정도였다.

길드 직원들뿐만이 아니라 파티원들까지 업무에 투입되어야 했던 이러한 배경은 지치기도 했지만 행복하기도 했다.

붉은 용병이나 검은 백조 같이 균열 랜드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길드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차희라는 가끔 밤에 찾아오는 것 외에는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안 그래도 만나기 힘든 박연주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부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지혜의 말에 따르면 갑작스레 등장한 임신녀를 찾는다는 것 같았지만 이지혜가 흘리는 거짓 정보에 아직 단서를 찾지는 못한 상황.

이지혜에게는 항상 고마웠지만 이번에 보여준 활약에는 절로 엄지손가락을 들게 되었다.

정보 길드라고 분류할 수 있는 검은 백조의 수사망에 혼선을 준 셈이니까.

겉으로 보이는 일들이 너무나도 잘 풀리고 있어 어안이 벙벙할 정도.

하지만 대륙이 떠안고 있는 문제들은 여전했다.

모험가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평화에 절어 있었고 신성을 모으는 것 역시 진전이 느린 것 같아 보였다.

바젤 교황을 닦달해 예전보다 더욱더 큰 예배를 드리고 있었지만 무능의 아이콘 베니고어가 아직까지 신성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도의 질 때문 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목숨이 달아날 정도의 상황에 처해 필사적으로 기도를 드렸던 예전과는 다르게 등 따시고 배부른 지금은 형식적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기도에 진심을 담아야지, 진심을!’

그래도.

‘이건 언젠가는 처리될 일이니까.’

말 그대로, 이건 언젠가 처리될 일이다.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될 사항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악마 던전 시리즈와 균열 박물관 시리즈가 이전에 있었던 모든 걸 대체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기본은 해주고 있다.

조금은 더 버틸 수 있다는 거다.

이런 배경에 현재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과제는 딱 2가지.

평화에 찌든 개돼지들을 조금 더 열정적으로 굴리는 방안을 떠올리는 것. 또 하나는 잘 풀리지 않은 내부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틈틈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번듯한 해결책은 없는 상황.

일단은 당장 눈앞에 닥친 두 번째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여겼다.

물론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뻔할 뻔 자.

‘현성아….’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관련된 문제였다.

물론 녀석과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해후는 꽤 감동적이었고 평소와 같이 수많은 선물과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스폰녀에게 선물을 가져다 바치는 호구의 모습이 이러할까.

꼬박꼬박 이쪽의 안부를 물어오는 녀석의 모습도 여전했고 식사나 술자리 같은 자리나 길드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진솔한 이야기나 이후에 필요한 정보 같은 것은 얻을 수 없었다.

벽이 쳐져 있다는 느낌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느낌.

물론 나 혼자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김현성은 예전의 모습과 별 다른 차이가 없었으니까.

가지고 있는 의심도 조금은 걷어낸 것 같았고 조금 더 돈독해졌다면 돈독해졌다고 말할 만했으니 어쩌면 정말로 모든 게 내 착각 아닌 착각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것을 전부 털어 넣을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고 싶은 내 욕심은 아직까지는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회귀한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밝힐 수 있을 정도의 끈끈한 관계.

그 정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거다.

이쪽이 초조해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비치렐라가 떨어뜨리고 간 구두의 주인을 찾는 것에 여념이 없는 상황.

‘이것도 말해오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사람 하나를 찾아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올지 알았던 내 입장에서는 조금은 맥 빠지는 일이었다.

녀석이 개인적인 부탁을 꺼린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손을 써볼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 정신을 제대로 쉬게 할 수 없다는 것.

김현성과 더 가까워지고 다음 단계로 향하기 위해서는 일단 녀석의 고질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조혜진.

비치렐라에 대한 호기심도 벗겨낼 겸 김현성의 마모된 정신에 영양제를 주입하는 방안은 약간이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 입장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사냥이라는 방향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 만족하는 게 당연했다.

빌드 업 자체는 굉장히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일단 조혜진과 김현성의 관계가 무엇인지, 김현성이 조혜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것부터.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뢰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은근슬쩍 물어본 녀석의 속마음이었다.

우리 현성이가 조혜진에게 연애감정을 품지 않았다는 건 연애고자도 알 수 있었다.

실제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그녀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달라 김현성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나와는 반대로 비슷한 업무를 보는 둘은 거의 매번 붙어 다닌다.

훈련도 같이.

업무도 같이.

휴식도 같이.

식사도 같이.

어시스트를 가장 잘 받아먹을 수 있는 자리에 포지셔닝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정상적인 남녀라면 정분이 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짜투리 시간에 서로의 육체를 남몰래 탐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있기는 하지.’

매일매일 대련을 하고 있으니까.

굳이 이쪽의 도움이 없었더라고 조혜진 스스로가 충분히 해냈어야 했다는 거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위치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치였다.

김예리처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박연주 같은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김현성의 탓이라기보다는 조혜진의 탓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본인이 먼저 여자로 보일 생각이 없다.

유능한 부하, 신뢰할 수 있는 친구, 믿을 만한 동료의 포지션을 고수하고 있으니 안 그래도 둔한 녀석이 조혜진에게 그런 흑심을 품을 수 있을 리 만무.

심지어 알 수 없는 전우애까지 생성된 상태라고 할 수 있었으니 정황 자체가 그리 좋지는 않아보였다.

비치렐라 사태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녀석이 고자가 아니라는 것.

1회 차를 겪었다 한들, 녀석도 다른 팔팔한 20대 청년들과 다르지 않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성으로 인식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 같습니다.”

바로 이거다.

심각한 분위기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조혜진이 반문했다.

조금은 어두운 표정.

벌서 몇 차례나 이런 회의 아닌 회의를 거치고 있지만 여전히 머리에는 의심이라는 마구니가 끼어 있는 모양.

아직 그 성과가 드러나기 전이니 저런 표정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다.

“이성이요?”

“네. 이성입니다. 우리 현성이가 혜진 씨를 여자라고 인식하게 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아마 지금까지의 모습만 봤을 때는 기껏해야 동료나 친구, 부하, 직장 후배 같은 느낌이 전부일 겁니다. 여자의 모습보다 전사의 모습을 오랫동안 봐왔으니까요.”

“그렇군요.”

“네. 그런 겁니다. 혜진 씨가 매력이 없는 게 아닙니다. 본인이 먼저 그런 포지션을 자처하고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계속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떨어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돕니다.”

“네?”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방향을 말씀드린 거니 그렇게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함께하는 스케줄 같은 경우는 관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관리가 필요하다는 건지 저는 잘….”

“훈련 시간은 뺍니다.”

“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몸이 안 좋아졌다고 대충 변명 휘갈긴 이후에 함께하는 훈련은 무조건 제외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야외 업무도 조금은 줄이고요. 아니, 이것도 전부 뺍니다. 당분간은 행정업무만 같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거지 같은 갑옷도 당분간은 금지입니다.”

“거지 같다니….”

“그 갑옷 벗기는 합니까?”

“무슨 망발을 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잘 때는… 그리고 갑옷을 벗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제안입니다. 제 임무가 뭔지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말했잖습니까. 당분간 훈련이나 야외 업무, 임무도 전부 제외한다니까요. 당분간은 굳이 갑옷 입을 일이 없는 겁니다. 1년 365일 똑같은 갑옷 걸치고 나타나는데 현성이가 퍽이나 좋아하겠습니다.”

“1년 365일 다른 갑옷이 아닙니다. 여벌 갑옷도 제대로 활용하고 있으니까요.”

‘이 여자가….’

이러니 녀석이 조혜진을 여자로 볼 리가 없다는 거다.

심지어 1회 차에서도 이 여편네를 여자로 본 적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 더 극단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 말 듣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상식적인 요구가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충분히 상식적인 요구입니다. 아무튼 다 필요 없고 지금부터 갑옷은 입지 마요. 당분간을 평상복으로 입을 겁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 조금 그렇기는 한데 솔직히 혜진 씨는 충분히 예쁘고 매력적이에요. 그 거지 같은 퍼런색, 보노보노 생각나게 하는 갑옷, 그것만 벗어도 훨씬 나아질 거라니까요. 지금 이 순간부터 벗는 겁니다. 이 순간부터.”

“…….”

“자 갑옷 이리 줘요.”

“…….”

“벗으니까 훨씬 낫네.”

“뭘 입으면 되는 겁니까?”

“지금부터 준비해 드릴 겁니다. 이런 쪽으로는 밝은 친구가 있어서. 화장부터 옷차림까지 전부 다 바꿔 봅시다.”

“뭔가 본격적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불안합니다.”

“당연히 본격적으로 갈 겁니다. 묘령의 여자한테 소중한 현성이를 뺏길 수는 없으니까요. 혜진 씨도 그게 싫어서 지금 저랑 이러고 있는 거 아닙니까. 길드를 위해서요.”

“…….”

“자, 그럼. 지혜 씨, 들어오셔도 됩니다.”

다시 한번 입을 연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형의 모습이 보였다.

조혜진은 깜짝 놀란 얼굴.

그녀가 여기에 올 줄은 생각지 못한 것 같다.

나와 친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거겠지.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요?”

이 업계에 스페셜 리스트.

무언가 짐을 바리바리 싸온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진짜 엉망이네요.”

하늘에서 팩트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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