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3
회귀자 사용설명서 463화
조혜진 사용설명서(8)
잠깐 함께하는 자리를 가졌을 때 언급한 이야기였다.
식사 때였는지, 회식 때였는지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다.
대화의 주제를 찾기 위해 대충 던진 이야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화제를 찾기 위해 냅다 내던진 말을 누가 전부 기억하고 있겠는가.
다들 그러려니 하는 거지.
‘아, 요즘 그 연극이 인기가 많다는 것 같더군요. 시간이 나면 한번 보러가야겠습니다.’
딱 이 정도.
물론 나는 그 정체불명의 연극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볼 생각도 없었다.
아직까지 문화산업까지 손을 뻗칠 생각은 없었으니까.
막말로 김현성이 언급해 주지 않았더라면 계속 잊고 있었으리라.
‘아니… 고맙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현성아.’
절로 당황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어떻게든 조혜진과 김현성을 엮어야 하는 이쪽의 입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었으니까.
김현성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확인했지만 조혜진의 회심의 신청을 거절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방금 발언은 조혜진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으니 이 미션에 작은 문제가 생겼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이건 진짜로 아무 생각 없는 거야.’
그래도 조금은 관심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불과 몇 분 전이었다. 아니, 관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자로서 의식하고 있다고는 생각했다.
별 5개를 얻은 각성 조혜진이 워낙 아름답기는 하지만 비 각성 조혜진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여성이고 무엇보다 그녀가 김현성에게 은근슬쩍 관심을 표현해 왔기 때문이다.
자기 좋다는 여성을 매몰차게 버릴 남자는 없다.
조혜진 정도의 미인이라면 더욱더.
심지어 얘는 능력도 만만치 않다.
그녀가 대놓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연애고자의 눈으로 봐도 의심되는 정황이 몇 가지 있었다는 거다.
은근슬쩍 거리를 좁히거나, 다른 여성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견제하는 것 따위의 행동 말이다.
김현성은 그것 역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혜진이 자신을 의식하는 것도, 방금이 데이트 신청을 돌려서 한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
이 나쁜 새끼를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나도 모르겠다.
-…….
예상하지 못한 발언에 조혜진 역시 몸이 굳은 모양.
나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이미 보고 왔다고 하는 게 좋겠네요. 하얀이랑 같이 보고 왔다고. 연극도 제가 추천해 준 거라고 합시다. 표도 구해다 준 거고요. 큐.”
-부길드마스터께서는 이미 하얀 씨와 다녀오셨다고 하셔서… 연극티켓도 부길드마스터께서 직접 구해주셨습니다.
“업무는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마치고 다녀오자고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가끔은 휴식도 필요하다고 대충 이빨 치면서요.”
-남은 업무가 그리 많지 않으니 빠르게 마무리 짓고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요즘 길드마스터께서 무리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설령 조금 모자라다고 한들 길드마스터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일과 훈련만 병행하면서 생활하신 지도 꽤 오래되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잘해주네.
조금 허들이 높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더 주문해도 될 것 같았다.
“기왕이면 길드마스터랑 같이 가고 싶다고 해요.”
-…….
“빨리 해요.”
-그, 그리고 기왕 보러가는 거라면 길드마스터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
-…….
-…….
‘좋아.’
잠깐의 정적.
이윽고 들려온 김현성의 목소리에는 가볍게 주먹을 쥐는 세레모니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혜진 씨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몇 시 티켓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8시 30분입니다.
-지금 당장 준비하는 게 좋겠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무, 물론입니다. 길드마스터.
‘가즈아!’
1차 관문은 일단 돌파.
나만큼 기뻐하는 조혜진의 얼굴이 홀로그램에 비친다.
작지만 커다란 발걸음.
조혜진으로서는 인류의 도약이나 다름이 없는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직 축포를 터뜨리기에는 이르지만 분명히 성과가 있다고 이야기할 만했다.
남녀가 함께 데이트를 나간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모양새는 똑같은데.
일단 한번 뚫어놓은 상태라면 다음번은 더욱더 경계심이 옅어질 것이다.
“어우 생각보다 잘해주고 계시는 것 같아서 제가 다 뿌듯하네요.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지금처럼만.”
홀로그램 속에 조혜진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현성이도 조금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혜진 씨가 평소랑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일단 겉모습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무표정으로 있기는 하지만 본인도 내심 놀랐을 겁니다.”
-…….
“큼큼. 일단 이성으로 인식하게 하는 게 최우선 과제 같아요. 욕을 하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현성이가 혜진 씨를 이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말이죠. 굳이 예를 들자면 부관이나 기사, 아니면 직장 동료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먼저 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방금 일어난 거절은 마음속에 담아두셔도 돼요. 어차피 데이트 신청도 아니고 뭣도 아니었으니까.”
-네.
“연극 보는 것 정도는 딱히 드릴 미션이 없기는 한데… 아까 말씀드린 문제를 해결하는 게 최우선 과제 인 것 같습니다. 일단 이성으로 인식을 해야 뽀뽀를 하든 손을 잡든 하죠.
-…….
“스위치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오늘 같은 날과 평소의 혜진 씨를 구분 짓는 것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처럼만 가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습니다.”
-음….
“평소처럼 주변을 경계하실 필요도 무기 같은 거 챙길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그 복장 그대로 보폭 맞춰서 바로 옆에서 걸으세요. 너무 큰 것부터 시작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해나갑시다. 호위는 따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쪽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으니까요. 위험요소 같은 건 없습니다.”
-…….
정말로 호위 임무를 무시해도 되는 건지 고민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윽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불안하기야 하겠지만 내가 호언장담을 하니 어느정도 믿음이 선 모양이다.
여러 가지 기본적인 것을 전달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김현성은 준비를 끝냈다.
녀석 역시 제법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것.
혹시 기본 무장을 하고 나서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 정도로 경우가 없는 놈은 아닌 모양이다.
장소에 맞는 복장 정도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시죠.
-네. 길드마스터.
‘달달하네. 달달해. 풋풋하다. 야.’
이윽고 두 사람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괜찮은데?’
겉모습으로만 보자면 연인으로 봐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조혜진이 내 생각보다 더 훌륭히 미션을 소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평소처럼 사방으로 눈을 부라리며 길을 걷지는 않을지 걱정한 것이 사실.
김현성과 함께 있을 때 조혜진이 경계를 늦추는 모습은 본 적 없었으니까.
애초에 김현성은 호위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녀석 역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조혜진은 어떤 사고에도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녀석의 발언을 일축 시켰었다.
그런 그녀가 정말로 주변의 위험을 배재한 채 김현성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보폭을 맞추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
과장하자면 굳이 이쪽이 따로 코치를 해줄 필요가 없을 정도다.
조금 아쉬웠던 건 여기까지 와서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지만 아마 저게 저 둘의 스타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에만 적절히 개입해 커트했고 대화가 끊기면 새로운 화두를 곧바로 건넸다.
당연하지만 모두 김현성이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첫 번째는 장비.’
“그러고 보니 이번 균열 박물관에서 재미있는 아이템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딱 이정도만 말하면 됩니다, 혜진 씨.”
-길드마스터, 그러고 보니 이번 균열 박물관에서 재미있는 아이템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아, 저도 들었습니다. 요즘 공화국에서 한참 떠오르는 파티가 얻었다고…. 재미있게도 이번이 두 번째라고 그러더군요. 바크 세르게이라고 했던가요. 지난번에는 목걸이 이번에는 검이라니…. 목걸이는 직접 사용하고 검은 경매장에 올린다고 들었는데 어떤 기능인지 정확히 게시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비싸게 팔릴 거라고 들었습니다. 경매장 최고가가 붙을지도 모른다고 들었는데.
-안 그래도 최근에 경매장 최고액이 경신됐다고 그러더군요.
-그 무구인 겁니까?
-아뇨. 무슨 한정판 책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안하서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그 검 말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신나게 떠드는 것이 눈에 보인다.
‘우리 현성이가 장비에는 진짜 환장하지.’
당장 신화 등급의 검을 들고 있어 다른 검을 쓰지 않을 뿐이다.
전설 등급의 검을 본인이 독식하고 있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마 평화로운 시대가 오면, 마음의 드는 검은 모조리 수집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하기도 해봤다.
실제로 지구보다 이쪽이 더 익숙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자신의 장비를 애인처럼 아끼고 있었으니까.
‘두 번째는… 차.’
마시는 차가 아니라 달리는 차다.
대륙을 기준으로는 차가 아니라 그리폰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이것 역시 김현성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 중 하나였다.
처음에 멋들어지는 검은색 그리폰을 선물해 줬을 때도 느꼈지만 의외로 이런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크게 티를 내는 것은 아니다.
주기적으로 안장을 교체한다든지, 자신이 직접 세차, 아니, 목욕을 시켜준다든지 말이다.
간혹 가다 깃털 정리를 해주는 정도였지만 김현성의 평소 생활을 생각해 보면 이것도 충분히 이례적인 일이다.
최근에는 내 그리폰 화이트 폴과 녀석의 그리폰이 짝을 짓게 되어 화이트 폴이 알을 품은 상태.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김현성이 미묘하게 기뻐하던 반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 기준으로 역대급 감정표현이라 칭할 만했다.
그리폰 특성상 정상적인 교배가 거의 불가능했는데도 어떻게 자연교배에 성공한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 녀석이 기뻐할 만도 했지만 그날 본 김현성의 표정은 틀림없이 덕후의 표정이었다.
그것도 덕질하고 싶어 하는 덕후의 표정.
간혹 대화 주제를 찾을 때 그리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제법 쓸 만한 소재였다.
사실 녀석이 좋아하는 것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이 녀석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몇 안 돼는 소재.
아마 조혜진 스스로가 가장 많이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관심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조금이지만 녀석은 말이 많아졌으니까.
-예전에 제가 린델에 있을 때, 그러니까 혜진 씨가 오기 전에 말입니다.
가끔 저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진짜 고마울 거다.’
김현성 키워드는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나만의 비밀이었다.
조혜진에게 생각보다 많은 걸 해주는 느낌에 괜스레 고개가 끄덕여지기 시작.
그 이후로는 사실 일사천리라고 할 수 있었다.
뭔가 성적 긴장감이 흐르는 시간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박수를 쳐 줄 만했다.
옆에서 재잘거리는 이지혜가 리액션 강의까지 몸소 코치해 주니 어색한 표정의 조혜진으로도 어느 정도 커버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현성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정도 생각은 하고 있지 않을까.
‘조혜진한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1회 차에서도 보지 못했을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이런 이벤트가 일어날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
일단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거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안 나는 요상한 예술 연극을 함께 관람했을 때도 분위기는 좋았고 필사의 설득과 연계로 와인바로 끌고 가는 것에도 성공했을 때는 쾌재를 질렀다.
대화 주제는 당연히 이전에 봤던 연극.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대화하는 것도 더 쉬워진다.
누구 하나 흥분하지 않은 담백하고 단순한 대화였지만 모두 나빠 보이는 기분은 아니었다.
적당히 와인도 한두 잔 들어갔으니 주먹을 꽉 쥐게 된 것은 당연지사.
이쯤에서 꺼내든 카드는 지금까지 수많은 커플들을 있게 한 전통의 강호.
‘오빠, 나 조금 취한 것 같아.’
물론 당장의 성과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조혜진이 보호받아야 할 여성일 수도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모든 게 생각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 시점. 의외의 반응에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조혜진의 얼굴이 붉어지자 김현성이 곧바로 길드에 연락을 취한 것이다.
-여성 직원들 좀 불러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혜진 씨가 조금 취하신 것 같습니다.
변명에도 녀석의 표정은 강경했다.
‘시바…. 그런 거 하지 마, 이 새끼야.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이름 모를 비치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김현성이 얻게 된 부작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