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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64화 (462/1,590)

# 464

회귀자 사용설명서 464화

조혜진 사용설명서(9)

역사적이었던 첫 외출은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아니, 사실은 조금 비참하게 마무리됐다.

괜찮다고, 혼자 걸을 수 있다고, 길드에 연락을 취하는 것을 거절했던 조혜진이었지만 강경한 김현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 곧바로 길드의 경비들이 도착했고 취해버린 조혜진을 편하게 모시고 갔다.

그 와중에 김현성은 조혜진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상태로 걷고 있었는데, 혹시나 의도치 않은 신체적 접촉이 있을까 걱정하는 듯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아픈 머리를 부여잡게 되었다.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체모를 비치에게 뒤통수를 맞은 후유증이 확실했다.

‘어떤 년이야….

가장 강력한 수단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미묘한 스킨십은 이성간의 관계를 가깝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동의되지 않은 스킨십은 단순 성추행범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지만 김현성과 조혜진이 그 정도로 서로에게 심리적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둘이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함께 걷는 동안 어깨가 살짝살짝 스친다든지, 팔을 흔들며 손등과 손등이 스친다든지 같은 일은 의외로 팽팽한 성적 긴장감을 부여해 주는 이벤트들.

지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쌍팔년도 콘텐츠에서 괜히 팝콘 먹다 손잡게 되는 거지 같은 클리셰가 흥행한 것이 아니다.

남녀 사이에는 찌릿찌릿하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사실 저 나이쯤 되면 같이 술 먹다 실수하곤 선 실수 후 연인, 분위기에 취해 조금 더 가까워지다 입술 박치기 하고서는 급속도로 관계발전.

같은 루트를 노릴 수도 있었지만 애초에 그런 루트들은 쟤네들이 상상할 수 있는 전개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작은 이벤트가 중요했다.

별것 아니지만 서로를 이성이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스몰 스킨십 이벤트는 김현성 공략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장면 중에 하나였다는 거다.

그 가능성이 완전 차단된 상황.

‘수단이 줄어들었는데.’

심지어 김현성 쪽에서 주의 깊게 조혜진을 살펴보고 있으니 그런 게 가능할 리 만무.

어깨를 스치려고 해도, 손등을 마주 데려고 해도 녀석의 괴물 같은 반사신경이 모든 희망을 철저하게 박살 내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었다.

물론 그 이후에 이런 만남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온갖 변명을 해가며 김현성을 필드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실제로 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것도 꽤 많이.

그 와중에도 김현성은 조혜진의 개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물론 조혜진이 자신의 개인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뒤로 몸을 빼는 것은 당연했고 아예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모르는 척 대놓고 노리고 들어갈 때는 마력까지 사용하며 위기에서 벗어났다.

누가 보면 조혜진이 문둔병 환자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적극적인 회피였다.

하지만 조혜진은 이런 정황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

애초에 걔 머릿속에는 ‘스킨십은 사귀고 나서’라는 공식이 맴돌고 있었을 테니 그런 반응은 예상할 수 있었다.

만약 기적이 벌어져 둘이 잘 된다고 해도 얘는 왠지 모르게 혼전순결 같은 걸 유지할 것 같은 이미지였다.

물론 자의가 아닌 타의로.

사실 스킨십이라는 이벤트를 제외한다고 해도 이 모든 일이 조혜진으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성과.

함께 극장에 간 이후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녀에게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심지어 그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고 있었으니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을 거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따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고.

하지만 결코 기분 좋게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현성이 저거… 손가락 하나로도 꼬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분명 비치기연 때는 그랬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발가락으로도 꼬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작스레 태산처럼 높아진 거대한 성벽은 단 1미리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잘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속은 하나도 없었다는 거다.

이지혜가 직접 아바타를 움직이기도 해봤지만 결과는 더욱더 최악.

매번 미소 짓고 있었던 조혜진과는 다르게 본부의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기뻐하는 조혜진에게는 미안하지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이벤트였다고 생각했는데 최소 10년짜리 장기 이벤트였다.

물론 성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번 이벤트의 목적은 김현성의 휴식이었으니까.

실제로 녀석은 꽤나 괜찮은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조혜진한테 관심이 없어서 문제지.’

우리 조혜진으로 만들어낸 억지구실은 김현성을 훈련장과 집무실 밖으로 몰아냈고, 강제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녀석이 여유를 찾게 하는데 성공했다.

함께 카페에 가서 시간을 떼우기도 하고, 다시금 연극을 보거나 경매장에 가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카지노를 다녀와 쌓아둔 돈을 날린 적도 있다.

이런 게 녀석에게 스트레스로 느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본성은 외향적인 인간인지 점점 더 표정이 밝아졌다.

심지어 구두타령이나 신발타령도 하지 않았다.

서브 목적 달성에는 난항을 겪고 있었지만 메인 퀘스트는 답을 찾아가고 있는 상황.

정확한 진단은 내릴 수 없었지만 녀석의 머릿속에 끼어 있는 안개가 점점 걷히는 느낌이었다.

정확한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조혜진이 아닌 내가 등판한 적도 있다.

당연하지만 김현성과 함께한 자리에서는 하루 종일 조혜진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직접적인 수식어까지 써가며 그녀를 위한 빌드업을 마련했다.

아직 머릿속에 마구니가 끼어 있기는 한 것 같았지만 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으니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랜만에 나도 녀석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점점 더 쉬는 게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 푹 쉬어라. 쉬는 게 남는 거다. 푹 쉬어라, 현성아.’

지금이 아니면 쉴 수 없다.

앞으로는 더 바빠질 거고, 녀석의 마모된 정신에 산소를 공급해 줄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심지어 녀석을 위한 인위적인 축제를 열어버렸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다.

대륙 그리폰 축제를 열었고 조혜진과 함께 보내버렸다.

김현성은 같은 그리폰 소유자인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이쪽에게 그럴 여유를 부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꽤나 크게 연 축제에서는 그리폰 안장과 부속 물품, 그리폰에 대한 온갖 것이 전시됐고 여러 가지 종류의 관련 대회에서는 수많은 참가자들이 울고 웃었다.

없는 예산으로 김현성을 위한 이벤트를 열었을 뿐이었지만 생각보다 대륙의 반응이 좋아 흑자가 났다는 건 소소한 이득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김현성 개인에게는 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그리폰 대회가 기폭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이 본인의 의지로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삐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내 기준에는 부합하진 않지만 녀석의 기준에선 고개를 끄덕일 만한 수준정도로 변했다는 거다.

기회다 싶어 조혜진을 포함한 파란의 모든 인원이 녀석에게 휴식을 권했고, 나 역시 함께 시간을 가질 때마다 휴식의 중요성에 대해 입을 열고 또 열었다.

일부로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었고 조혜진을 투입하는 주기도 점점 더 늘려나갔다.

처음에는 무척 불안해했던 김현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쪽의 말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노는 일에 조금 더 적극적이 되었다.

여유가 생겼고 조급해하지 않았다.

훌륭한 변화였다. 아마 본인이 더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쉬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검 따위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깨달음이니 뭐니 잘 모르겠지만 소소한 성취도 생긴 모양.

당연한 결과였다.

무식하게 망치질만 한다고 좋은 검이 탄생하는 게 아니니까.

물에도 담가줘야 하고 가끔은 열기도 식혀줘야 한다.

쉴 새 없이 달려온 김현성은 이러한 과정을 그 누구보다 필요로 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궁예질에 불과하지만 시기가 조금 더 늦어버렸다면 부러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 느낌.

똥줄이 타 급하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한 발자국 템포를 낮추는 게 정답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

‘그런데 왜 나는 씨바….’

이상하게 이쪽은 더 바빠졌다.

여러 가지로 처리해야 될 사항이 많았으니까.

휴식의 중요성에 대해 입을 열고 또 열기는 했지만 녀석이 논다고 나까지 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요령이 좋아 적당, 적당히 쉬면서 하고는 있었지만 갈려나가고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일단 김현성을 위한 스케줄을 만드는 것부터가 커다란 업무였다.

솔직히 대륙 그리폰 축제를 여는 것부터가 엄청난 일이다.

이 정도 규모의 일이 우리 하자! 라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짠 하고 완성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외주업체에게 잔업을 맡기기는 했지만 굵직한 일들은 이쪽이 처리해야 했으니 날밤을 새야 했던 것도 당연지사.

쓰러져서 잠들고 일어나면 매번 더 피곤한 것 같은 기현상은 내 몸이 상할 대로 상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정하얀은 더 활기찬 것 같기는 했지만.

덕분에 며칠간은 피로 회복제를 달고 살았다.

그 와중에 조혜진이라는 아바타를 조종해야 했고 미래에 대한 준비도 해야 했다.

힘들지 않은 게 이상하리라.

평소처럼 교황청의 바젤 교황과 우리 아리스 시녀, 아니, 오스칼과 만남을 가졌고 카트린 의원들과도 여러 가지에 대해 협의했다.

잠깐 여유가 생겼다고 치면 정하얀과 차희라와 경쟁적으로 만나야 했고 파란에 적응하기 시작한 엘레나도 케어해야 했다.

디아루기아를 포함한 우리 똘똘이와 박물관 관리인 막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기도 했다.

어떻게 본다면 사람을 만나는 것도 휴식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절대로 휴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똘똘이랑 놀아봐라.

그게 휴식처럼 느껴지나.

최근 조용했던 똘똘이는 다시금 꼬리를 쳐대며 이상한 야심을 드러내고 있었고 정하얀과 차희라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일이었다.

추가로 디아루기아의 잔소리를 받아주는 것도 조금이지만 힘들었고.

하지만 내가 갈려나간 만큼 대륙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고 있었다.

약해진 전력에 대한 대안으로는 부족하다 느껴지기는 했지만 대륙 총 합동 훈련이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고 날짜도 정해졌다.

새로 들어오는 신입들에 대한 준비도 완벽했다.

대륙 전체가 하나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합의서에는 점점 서명이 늘어나고 있었고 각 창고에 군량도 점점 더 늘어났다.

불안요소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뼈대 정도는 세운 것 같은 느낌이라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 모든 성과에 대해 김현성이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들어봐야겠지만 말이다.

중간에는 하도 답답해 카스가노 유노를 찾아갔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는 상황.

여러 가지를 보기는 했다.

주로 내가 그녀를 괴롭히고 또 괴롭히고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괴롭히고 얘랑도 응응하고 쟤랑도 응응하는 내용.

영양가 따윈 없었던 검은색 세계 순회였다.

심지어 사이가 안 좋아 보였던 여단의 선희영과도 응응응응 응응 응응응 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코피를 흘렸을 정도.

생각해 보니 영양가가 조금 있기는 있다.

쓸데없는 지식이지만 그래도 지식은 지식이니까.

선희영과 여단에 대해서도 조금 더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몇 가지 일을 제외하면 모든 배가 순항하고 있는 느낌.

그 와중에 침몰하고 있는 배도 존재하기는 했다.

‘우리 조혜진호.’

혜진코인이 떡락하고 있었다.

“부길드마스터. 저… 슬슬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게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와 함께 말이다.

‘아직도 혜진코인 손절 안 한 흑우들 없제?’

깜짝 발언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고백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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