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5
회귀자 사용설명서 465화
조혜진 사용설명서(10)
‘얘가 뭘 잘못 먹었나.’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가장 들어와 꽂힌다.
조혜진이 저런 발언을 먼저 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조금 능동적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 적은 많았지만.
그녀가 이런 부분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줬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물론 아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선머슴 같기는 했지만 얘도 여자는 여자였고 이런 부분에는 내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러나저러나 김현성은 이 미련한 여자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최근 들어 녀석과 끊임없이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즐겼다.
내 기준에서는 그게 뭐가 데이트냐 라고 생각하만 그녀로서는 충분히 꿈같은 시간이었을 터.
한 발자국 더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아마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숨기기 힘들었을 것이 분명.
마음고생 많았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보통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그렇다.
알아서 척척 연애 잘하고 이 남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행복 속에 사는 슈퍼 인사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조혜진 같은 인간은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지 않으면 답답해 뒈질 것 같고 속에 있는 마음을 계속 전하고 싶고, 침대에만 누우면 현성이 얼굴이 아른거리고, 심지어 밥맛도 떨어진다.
너무 답답해 차라리 확 말해 버리면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해서 결국에는 사지로 기어 들어가는 종류의 인간.
그게 바로 조혜진이었다.
‘고백은 도전이 아니라 확인이야, 혜진아.’
혼자 끙끙 앓다가 도전한 사람의 패배율은 70% 이상.
고백은 서로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었던 이성이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아니, 솔직히….
‘지가 무슨 10대도 아니고….’
정하얀이나 차희라 엘라나, 이지혜와 내가 ‘우리 사귀지 않을래? 오늘부터 1일이다!’하고 맺어진 건 아니지 않은가.
보통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저런 과정은 생략되게 마련.
조금 이르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조혜진의 나이 정도면 그래야만 했다.
그냥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도 잡게 되고 마. 뽀뽀도 하고 마. 다 하고 마. 그러다 보니까 서로 좋아한다는 소리도 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약속처럼 굳어지는 관계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다.
‘물론 마음이 있는 것 같다. 만나보자’라고 시작하는 관계도 흔하지만… 이 여자처럼 혼을 담은 필사의 고백 같은 걸 갑작스레 지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특히 이런 애매한 관계일수록 최대한 지양해야 될 일이기도 하고.
슬쩍 아닌 것 같다고 운을 띄워 봤지만 조혜진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괜히 멀어지는 거 아닌가. 이거.’
라는 생각이 대뇌의 전두엽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자신만만하게 도와줄 수 있다며 조혜진을 전쟁터로 밀어 넣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 자신감이 소폭 줄어든 상황.
나름대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도 있었고 1회 차의 인연도 있어서 발을 들였는데 이 전장터는 이미 패배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어떻게 봐도 현재로서는 희망이 없다.
김현성은 조혜진을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은 그랬다.
일단 다급하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괜한 사람 하나 상처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본의는 아니었지만 현성이 쉬게 해준다고 순진한 사람 이용한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왜,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된 겁니까. 솔직히 저는 조금 이르다고 보는데….
“그냥… 시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때가 되긴 뭘 돼. 그냥 니가 답답해서겠지.’
“뭘 시기가 찾아옵니까. 아직 뭐 시작한 것도 없는데. 이런 말씀드리기는 조금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조금 더 길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조금 정신이 없기도 하고 굳이 뭐 그런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계속 관계 유지하면서 은근슬쩍 붙어 있는 게 더 괜찮은 방법일 겁니다. 계속해서 만나다 보면 뭐 정도 들고… 그렇고 그렇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길게 봐요.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애초에….”
“아니요. 지금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길드마스터나 저한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드리는 말은 허락이 아니라 통보를 드리는 거고요. 지금까지 도와주셔서 감사했지만 지금부터는 혼자 힘으로 해보고 싶습니다.”
‘너 진짜 왜이래.’
뭔가 빨리 끝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쉴 틈 없이 흘러가게 될 거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을 테니까.
어느 쪽이 됐든 딱 결판을 보고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솔직히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는 것.
처음엔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도 그랬다.
마음속으로 계속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인정할 때라는 걸 깨달은 모습 같기도 하다.
아마 1회 차의 조혜진은 이 답답함을 애써 꾹 눌러왔을 것이다.
말 그대로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당시 김현성한테 애인이 있었을 수도 있고, 살아남는 게 최우선인 배경에서 연애놀음 할 시간 따위도 없었을 거다.
죽기 직전이 돼서야 자기가 뭔 생각을 하게 된 건지 깨달았겠지.
반면 지금의 조혜진은 조금 다르다.
김현성과 직장상사 관계가 아닌 남녀의 입장으로 만나다 보니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녀석이 본인한테 마음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수도 있고, 그래서 빨리 매듭 짓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이라고 판단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혜진답기는 하다.
얘는 미련하고 융통성 없고 꼼수도 부리지 않는 주제에 정직하기까지 하다.
본인에게 불리하고 피해가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가시밭길을 걸으려는 성격이 여기까지 도진 것이다.
‘말려도 소용없겠는데….’
결국에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마음대로 해요. 근데 지금까지 도와준 게 진짜 아까운데…. 조금 길게 보면 가능하거든요. 아니, 생각해보니 딱히 도전이 실패한다는 보장도 없고. 잘되면 축하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되면 말씀드리러 오겠습니다.”
“뭐, 잘될 겁니다.”
“네.”
‘그러네. 진짜 실패한다는 보장도 없네.’
김현성은 의외로 무른 부분도 있었으니까.
누가 봐도 매력적인 이성이라고 느껴지는 조혜진을 바라보니 거부하는 게 또라이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여기는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곳이고 얘는 보트 태우려고 하는 얘도 아니다.
‘그래. 뭐, 혜진아, 가즈아! 혜진코인 떡상 가즈아!’
“언제 할 겁니까?”
“지금요.”
“…….”
“…….”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뭔 심경의 변화라도 있어요?”
“조금은.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생각을 아직 다 정리하지는 않은 상태라…. 솔직히 그동안 부길드마스터 덕분에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조금 치사하다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 무엇보다 말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든 게 큰 것 같습니다. 계속 지금처럼 지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죠.”
“곧 총합동 훈련도 있으니까요. 본격적으로 바빠지는 건 당연한 거고. 여기까지가 딱 좋은 것 같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뭐가 고마워. 그런 말 마. 진짜 너무 미안해진다. 야.’
“고마워할 거 없습니다. 다 저 좋자고 한 일이었는데.”
“아니요. 당연히 본의가 아니었겠지만 기영 씨가 아니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맞아. 시바….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다, 야.’
“그럼….”
“성공할 겁니다. 혜진 씨.”
“감사합니다.”
난데없이 찾아와 입을 연 조혜진은 그렇게 슬그머니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슬그머니 그녀를 확인하니 연무장 뒤에 있는 실내 정원으로 향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아마 저기가 결전의 장소인 모양.
겉모습부터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화장도 빡세게 했고 옷도 잘 챙겨 입었다.
내가 도와준 것도 아니었고 이지혜가 도와준 것도 아니다.
본인의 힘으로 세팅한 것이다.
‘예쁘긴 예뻐.’
실내 정원 앞에서 커다랗게 한숨을 쉬는 듯한 모습.
그녀가 막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그냥 마력 홀로그램을 꺼버렸다.
솔직히 양심이 찔리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저런 필사의 고백 같은 걸 바라보는 게 익숙하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실례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
원래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보면 안 될 것 같다.
‘성공했을까 몰라.’
솔직히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하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잘 됐으면 좋겠다.
김현성 상태가 좋아지긴 좋아졌지만 제가 옆에 있으면 더 좋아지는 건 예정되어 있는 일이고 무엇보다 잘 어울린다.
성격도 비슷하고.
괜스레 내가 다 초조해지기 시작.
‘잘되야 하는데….’
안 그러면 너무 미안한데….
괜히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사람한테 바람 넣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된 것 같다.
물론 이쪽의 조언을 무시하고 최후에 선택한 건 그녀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시작은 요 입이다.
‘그러니까 내 말 좀 듣지.’
확실히 얘는 나랑 상극이다.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은 사람이었고, 간혹 불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왠지 밉지 않다.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검은색 세계의 가면쓰레기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사실 당신은 싫지 않았는데’라고.
솔직히 내 성격에 얘를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놈들 모두와 정이 들었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초조하게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시간은 점점 흐르기 시작.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때 즈음에 결과가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예상이 됐기 때문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빛기영과 어울리지 않는 욕을 지껄이며 실내 정원에 당도한 것은 순식간.
당연하지만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조혜진이었다.
김현성은 자리에 없다.
위풍당당하고 갑작스레 나타나 고백해야겠다고 선포했던 것과는 다르게 눈에는 어울리지 않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너 울지 마… 야.’
정확히 말하면 아직 울고 있지는 않다.
“우, 울지 마세요. 좀….”
하지만 위로 받으면 울고 싶어진다고 하던가.
내가 천천히 입을 연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니 저도 모르게 와락 안기는 꼴은 가관.
울음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지만 꽉 다문 입 사이로 계속해서 끄윽 끄윽 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울지 마. 슈바…. 무조건 현성이랑 이어줄게. 10번 찍어서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 야.’
“끄윽.”
현성이 이 매몰찬 새끼…. 그래도 좀 받아주지.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게 걔 선택이면 존중할 수밖에 없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괜스레 민망해져서 조혜진의 어깨를 계속해서 토닥여 주었고 그녀는 한참이나 울고 나서야 겨우 내 품에서 떨어졌다.
민망함에 입을 연 것은 그 이후로 약 3분 정도나 지난 이후.
“후회해요?”
“아닙니다. 히끅… 시원섭섭합니다.”
“그러게 조금만 기다리라니까.”
“부길드마스터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지만 그냥 제 입으로 직접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제는 전부 끝난 이야깁니다.”
‘아직 안 끝났어. 넌 진짜 기다려라, 혜진아.’
“아무튼 간에… 이만 돌아가시죠.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넌 진짜 내가 이어준다. 시바…. 목숨 걸고….’
“오랜만에 럼주 콜?”
“네. 그렇게 하죠. 오늘은 조금 마셔야겠습니다.”
단순한 망상이지만 어째서 얘가 갑작스레 이런 포지션을 취했는지 알 것 같다.
그동안 제법 풀어졌던 조혜진이었으니까.
갑옷을 입은 시간보다 예쁜 옷을 입는 시간이 더 많았고 창을 들던 손은 작은 가방을 들고 다녔었다.
묶고 다녔던 머리카락은 불편한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었지.
발걸음을 옮기면서 머리를 하나로 묶는 모습이 보였다.
현재 차림과 어울리는 머리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혜진과 딱 맞는 머리스타일.
어쩌면 얘는 슬슬 이걸 그만 둬야 되는 타이밍이라 느꼈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이대로 가다간 나태해지거나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였고 잠깐의 휴식을 즐겼지만 이제는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야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휴가 아닌 휴가를,
이번 휴식을 본인 나름대로 마무리하려고 한 것이 분명했다.
그 마무리가 그녀에겐 김현성이었고.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간 그녀를 바라보며 나 역시 괜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왠지 모르게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 같았으니까.
“끝났네.”
“네?”
“혜진 씨 보고 한 이야기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에요.”
휴가는 끝났다.
그리고.
싸울 수 있는 모든 이가 집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