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9
회귀자 사용설명서 469화
대륙 합동 훈련(4)
솔직히 회의 내용이 뭐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 어쩌고, 이번 훈련의 당위성과 목적에 대해서 어쩌고, 모의전을 비롯해 단체 훈련을 어떻게 진행하는지에 대해서 또 어쩌고, 훈련 계획표에 대한 설명과 여러 가지 탁상공론이 오고 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 뒤로 기억나는 건 내가 봐도 놀라울 정도로 사치스러운 술판밖에 없었다.
‘재밌기는 했지.’
요 며칠 동안의 스트레스가 완전히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역시 남미 애들이 잘 놀아.’
화끈하기도 화끈하고 진짜 제대로 노는 게 뭔지 알고 있는 놈들이었다.
적당히 비위도 맞춰주는 것도 프로급이고 여성들도….
아무튼 남미 애들이 소환되는 지역의 대륙인들이 모시는 신이 음주가무의 신이니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할 리가 없다.
보급품으로 식사를 연명하는 일반 병사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부정부패.
그 중심에 서 있는 우리 내 고인물들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애초에 신경을 썼으면 혈세로 술판을 벌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녀석들에게는 조금 유익한 시간이었을 터.
지난밤이 돈을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실제로 나는 외적으로 아주 만족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아마 어젯밤 나와 형, 동생, 친구하기로 했던 녀석들 중 일부는 방구석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으리라.
비위 조금 맞춰주고 대륙의 포션 사업을 쥐고 있는 인물과 호형호제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이득인지 모르고 있는 놈들은 이 자리에 없다.
다들 어디서 권력 맛 좀 본 녀석들이었고 그만큼 고인 놈들이었으니 내 생각이 맞으리라.
권력은 고이게 마련이고 고인 것은 썩는다.
두 말하면 입 아프지만 몇몇 놈은 아주 훌륭하게 썩어 있었다.
중소 클랜들 고혈 빨고 올라온 놈들이 대다수.
웃기지만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 올 수 있을 정도의 길드나 클랜이, 더러운 사건 한두 개 걸치고 있지 않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당장 어딘가에 있는 대기업들도 여러 가지 문제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딱 봐도 답이 나온다.
검은 백조도 물론이거니와 파란도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 적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수긍이 가는 면이 있기는 했다.
‘얘들은 정도가 너무 심한 거고…. 우리는 양심 장사 하는 거지 진짜. 파란이 혜자지, 혜자.’
물론 정상적인 길드나 클랜 역시 존재하기는 한다.
붉은 용병처럼 소속감 있고 도시를 대표할 만하다고 할 수 있는 대표 길드.
이런 애들은 보통 길드마스터부터 다르다.
살이 뒤룩뒤룩 찐 놈들과 달리 전투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고 실제로도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놈들도 수준이 낮다는 것에 있었다.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따뜻한 우정 클랜 길드원들을 보고도 헛웃음을 터뜨렸던 나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타국의 도시에 유력 길드라고 해봐야 우정 클랜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
그중에 몇몇 특출한 인재가 있기는 하지만 교국 8좌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20명 내외.
솔직히 이런 인원이 20명 정도가 된다는 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전체적인 수준을 평균으로 내놓는다면 많이 쳐줘야 C등급 정도. 평균 S등급은 꿈이겠지만 적어도 A등급은 되어야 다가올 위협에 대비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두말 하면 입 아프지만 나보다 더 생각이 많아지는 건 김현성일 거라고 생각했다.
휴식의 중요성을 몸소 알게 된 녀석이 지난 번 회식에서 술 한 모금 대지 않았다는 걸 떠올려보면 아마 속으로는 똥줄이 타도 제대로 타고 있을 것이다.
뭔가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이번 회차가 도대체 뭐가 잘못됐는지,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자기반성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는 거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룩한 2회 차의 결과물을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과자봉지를 뜯었지만 질소가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김현성은 멘탈이 약간 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뜯어 고쳐야 할지 고민되겠지, 뭐.’
나 역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슬그머니 전방을 보자 한쪽에 모여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병사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몇 분전에 시작한 타국의 모의전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하하하. 역시나 철혈기사단의 힘은 허명이 아니었군요. 아무리 모의전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쉽게 뚫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실제 전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공략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왕국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반도 사용할 수 없었던 모의전이었는데… 지형도 지형이었고요. 오히려 이 정도의 병력을 잃은 게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패배는 저희 쪽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과연 지옥불의 게르한 님이 이끄시는 마법병단입니다.”
“철혈공의 실력 역시 헛소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게르한 님만 하겠습니까. 하하하.”
‘아주 지랄 똥을 싸고 있다. 진짜.’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고 있는 두 집단의 수장의 표정은 가관.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김현성의 얼굴은 더욱더 가관이다.
‘그래. 무슨 마음인지 이해한다.’
내가 보기에도 조금 그런 면이 있었으니 놈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모의전 내용 자체도 어처구니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서로 물고 빨고 하는 것에 여념이 없는 놈들을 보고 김현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머릿속에 들어가 녀석의 마음을 읽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와중에 놈들은 이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기 시작.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기영 명예추기경님.”
“과연 대단하더군요. 지옥불의 게르한 님이 이끄시고 계시는 마법병단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지옥불의 게르한은 개뿔.
정하얀과 비교한다면 모닥불이나 다름없다.
“이거 영광이로군요. 모의전에 패배했는데도 그렇게 잘 봐주셨을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형 자체가 수성에 어울리는 지형이 아니었으니까요. 처음부터 병단 쪽에 불리하게 마련된 지형이었습니다. 앞이 단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사들을 막아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는 그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전위가 취약한 마법병단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고 싶었던 거였지만.’
그딴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철혈기사단의 돌파력이 그만큼 강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만… 두 분이 거느리고 있는 병력들이 얼마만큼의 수라장을 겪으며 성장했는지 잘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하하. 이거 부끄럽습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다 해주시는군요.”
“느낀 그대로를 말했을 뿐입니다. 게르한 님.”
“감사합니다. 아… 그나저나 다음 모의전은… 아. 북부와 서부에 대결이로군요. 북부의 모험가들이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데… 조금 거칠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커다란 사고가 없었으면 합니다.”
북부는 자존심은 강하지만 실력은 없었던 것 같았다.
흥분한 북부 모험가들이 눈에 보이는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 서부를 향해 자살특공대를 돌진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분해하는 북부인들이 시야에 비쳤는데 차라리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쟤네는 이기고 싶다는 의지라도 있었으니까.
철혈공과 게르한의 어린애 장난은 정말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런 새끼들이 물을 흐리는 거야. 슈바.’
가지고 있는 실력의 한계도 한계였지만 더욱더 개판이 되는 게 당연하다.
본인이 이끌고 있는 병력의 컨디션을 걱정하고 있으니 병력을 빡세게 굴릴 리 만무.
훈련이 끝나면 곧바로 실무를 뛰어야 할 병력들이니 얘네들 입장에선 걱정이 될 만도 하지만 그래도 굴리는 수준이 너무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해는 된다.
대륙에선 사람이 곧 재산이었으니까.
포션이나 신성마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피로도는 쌓이게 마련이고 쌓인 피로도는 이후 일정에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내가 경영자의 입장이었어도 내 선수들을 함부로 굴리기는 싫었을 거다. 수익을 비롯한 모든 것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니까.
물론 이 새끼들이 트롤러인 이유는 겨우 저것뿐만이 아니다.
‘전력은 왜 숨기고 있는 거야. 이놈들은…. 볼 것도 없는 놈들이 더하다 진짜.’
전력을 숨기면서 모의전에 임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
없는 것까지 꺼내 죽을 똥 살 똥 싸워도 김현성의 성에 차지는 않겠지만 정말로 가진 걸 다 꺼내 싸운다면 이것보다 볼만해질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수준이 낮다 해도 칼밥 먹은 모험가. 목숨이 걸려 있는 만큼 숨겨진 한 수 정도는 있는 게 당연했으니까.
당장 마음의 눈으로 보이고 있는 것도 몇 개 있다.
어째서 이놈들이 적당 적당히 싸우고 있는지는 뻔했다.
타국에, 타클랜에, 타길드에, 타동맹과 타지역에 본인들이 가진 전력을 전부 내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전력을 숨김이야 뭐야.’
안 그래도 보기 힘든 모의전을 더 보기 힘들게 만드는 건 이 장소에 있는 이들이었다.
적당히 호응해 주기도 지친다.
아니, 솔직히 마음 같아선 가면이라도 쓰고 뒤집어 버리고 싶어진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하지 않는 놈들에게는 한 방 먹여주고 싶다.
‘그래도 참아야지.’
생각하고 있는 게 없었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이런 꼴을 두고 보고 있냐고 묻는다면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
이 상태가 지속되어야 우리 현성이 무거운 입이 열릴 것 같았으니까.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베니고어에게 선택을 받은 빛기영이라고 한들, 회귀자도 아닌데 먼저 나서서 미래에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고 피를 토하며 큰소리치는 것도 웃기기는 하다.
김현성이야 내가 먼저 으쌰으쌰하며 다 함께 나아가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주길 바라겠지만 오히려 적당 적당히 평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유효하다고 느껴졌다.
인맥 관리 열심히 하고,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고, 남들 비위 적당히 맞춰주면서 웃어주는 평소의 이기영.
이게 내 생각대로 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마 며칠이 지나면 김현성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기영 씨는 다가올 위협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지만.’
“…….”
‘그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구나.’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게 최종 목표라는 거다.
얻고 싶은 건 김현성의 입에서 나오는 말말말.
정확히 위협이 뭔지, 어느 정도로 위험한 건지, 가능하다면 회귀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다.
‘정확히 뭔지 알아야 대비를 할 거 아니냐, 현성아.’
나 역시 암 걸리는 상황에 있는 건 똑같았지만 일단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다하다 안 되면 찾아오겠지 뭐.’
김현성의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