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475화 (472/1,590)

# 475

회귀자 사용설명서 475화

이간질(6)

허공에 떠도는 소문을 스펀지처럼 흡수해 버린 박덕구와는 다르게 이지혜가 흘린 소문이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의도대로 느리지만 전체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박덕구의 입을 막아버린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다른 불순물이 끼어든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위에서 아래로 퍼지는 형태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형태.

발신지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소문은 훈련장이나 숙소에서 입으로 입으로 전해졌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간부급 모험가들의 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단순한 찌라시로 치부했던 사람들도 진상 조사에 들어간 것은 당연지사.

정보나 찌라시에 민감하지 않은 김현성의 귀에 들어가기까지는 며칠 걸리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박덕구 이 새끼는 진짜 뭐지.’

이렇듯 이 찌라시가 자리 잡히는 걸 눈으로 목도한 이후에는 다시금 박덕구의 능력에 대해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걸려야 취합할 수 있는 정보들을 몇 시간 만에 취합해 답을 내놓은 것이다.

파란의 정보부에서 일하게 하는 걸 심각하게 고심해 볼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 만무.

쓸데없는 소문만 수집할 것 같아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상하게 감도 좋고….’

2인분 이상은 충분히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간에 모든 상황이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

나에게도 그렇지만 합동 훈련장의 적폐 집단이 축배를 들었다는 것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루에도 손님이 수십 명씩 내 집무실을 들락날락거렸으니까.

물론 이유야 뻔했다.

“이번 훈련이 끝나면 한번 와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마도왕국과 교국 사이에 조금 일이 있었지만 이제는 다 과거 아닙니까. 마법에 기초한 직군에게는 축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원 체계가 잘 잡혀 있습니다. 직접 보신다면 분명 놀라실 겁니다.”

라거나.

“공화국의 총통께서 직접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자세한 내용은 밀봉되어 있기 때문에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원하는 걸 말씀해 주신다면 최대한 적극적으로 수용하시겠다는 뜻을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랫동안 공화국에 내려져 오는 보물로써….”

라거나.

“북부는 조금 춥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나름 운치 있는 곳입니다. 단도진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나 이적을 생각하신다면 꼭 북부를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계약 조건은 원하시는 대로 작성하셔도 됩니다.”

따위의 말을 해오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생각보다 파급 효과가 큰데….’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쪽이 직접적으로 이적 문제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도 않았음에도 수많은 권력자가 눈에 불을 켜고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이름만 들어본 대형 길드는 물론 아예 나라 단위로 제안을 해오다 보니 함께 오는 제안도 눈이 다 돌아갈 정도.

아직은 생각이 없다고 은근슬쩍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인사들은 믿지 않는 것 같은 눈치였다.

이미 이적은 확정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물론 내 몸값이 괜찮고 인기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공화국 총통, 연방 지도자 연합, 심지어 왕국 연합의 왕족은 혼인 카드를 내밀며 부마가 되어 달라 종용하고 있었다.

‘빛기영 위상이 크기는 커.’

그동안 대륙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한 과거를 떠올려 보면 납득이 가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문이 잘 자리 잡혔다는 거겠지, 뭐.’

그만큼 정보도 확실했으니까.

내 행동거지 자체도 정보의 힘을 실어줬을 것이다.

최근에는 아예 간이 길드 하우스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있었으니까.

정하얀을 보러 가거나 훈련준비를 제외하면 굳이 김현성과 마주치지도 않았다.

파란의 길드마스터 김현성과 교국의 명예추기경 이기영의 불화설이 날개를 단 것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는 것 역시 설명할 필요 없는 이야기였다.

일이 이쯤 되니 녀석도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모양.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쉬쉬하고 있었지만 최근 길드의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김예리와 김창렬 같은 암살자 직군들은 아예 길드 하우스에서 보이지도 않았는데 아마….

‘정보 캐고 있겠지 뭐.’

이제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느려….’

애초에 파란 길드의 정보부 관리는 거의 내가 도맡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반박자도 아니라 한 박자 느린 움직임이 너무 아쉬웠다는 건 여담으로 남겨둘 이야기.

아무튼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현성이 눈에 띄게 초조해한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는데 하루 일과를 끝낸 뒤 녀석에 대한 소식을 듣는 게 소소한 낙이었다.

그동안 내가 마음고생 했던 만큼 녀석도 마음고생을 했으면 하는 1차원적인 생각이었지만 괜스레 만끽하고 싶은 느낌이기는 했다.

오랜만에 녀석과의 관계에서 갑의 위치를 선점할 수 있는 기회.

물론 녀석이 나를 찾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이쪽에서 조금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기영 씨.”

“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들어오셔도 됩니다, 현성 씨.”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네.”

‘확실히 효과가 있기는 있네.’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오는 거 보면 왠지 모르겠지만 반성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그나마 최근에는 마음의 여유를 얻어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그 전까지는 정체불명의 PTSD를 앓으며 스스로 나와 거리를 두었으니까.

자기 자신이 문제였다는 걸 비치렐라에게 고백했지만 녀석은 내게 이것과 관련해서 직접 상담한 적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기영의 입장에서는 왜 갑자기 김현성이 묘하게 거리를 뒀던 걸까, 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는 거다.

물론 지금은 여러 선물 공세를 하며 미안함을 표현하고 있었지만 아주 친근했던 예전을 떠올려 보면 아직도 몇 발 떨어진 느낌.

충분히 친근하기는 했지만 녀석 스스로가 기묘한 거리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있을 때 잘해야 한다고 했던가.

‘그 말이 딱 맞지.’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은 없었지만 아마 김현성은 그 누구보다 그 감정을 잘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균열 박물관 전까지는 이쪽이 똥줄이 타는 상황이었다면 현재는 김현성이 그때의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이제 막 밀린 업무를 끝낸 참입니다. 조금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군요. 서로 바쁘다 보니까요.”

“네. 아무래도 서로 바쁘다 보니…. 오늘도 나가시는 겁니까?”

“네.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분들이 계셔서요. 연방의 게르한 님께서 다른 분들을 소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괜찮은 인맥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니까요. 게르한 님 말입니다만….”

“네….”

“아무래도 연방에서는 꽤나 큰 손이신 것 같더군요. 인맥도 상당히 넓고, 관련 사업도 걸치고 있는 게 많아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왠지 모르게 침울한 표정.

‘어디까지 닿았나.’

조금은 궁금했다.

‘찌라시가 돌고 있는 건 이미 눈치챘고.’

이건 너무 쉬우니까.

당장 전 대륙의 유력자들이 이쪽의 집무실을 들락날락거리는 상황에서 이것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김현성에게 실망할 것이다.

‘제3세력이 있다는 것도 눈치챘어?’

김예리나 김창렬이라면 지금쯤 물어왔을 것이다.

아마 그것 때문에 김현성이 여기에 왔을 가능성도 있고… 심증은 있지만 제대로 된 증거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자료만 쌓인 타이밍이겠지.

대충 일을 처리하는 속도를 생각해 보면 딱 그 정도 시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없으니 조금은 더 느렸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지만, 예리와 창렬이가 그렇게 무능하지는 않다. 천천히 김현성을 바라보자 무언가 똥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것이 시야에 비친다.

대화에 서툰 녀석인 만큼 어떻게 먼저 말을 거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파란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인지.

게르한이라는 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최근에 어째서 그렇게 자신을 피한 건지, 파란과 자신에게 섭섭한 점이 있는지, 혹시 파란을 찢으려는 제3세력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말이다.

“기영 씨.”

“네.”

“그….”

“네.”

“최근에….”

“네.”

“그러니까.”

“네….”

‘시바. 답답하네.’

너무 답답하다.

차라리 내가 먼저 운을 띄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막 말을 내뱉으려고 한 찰나 김현성이 입을 열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최근에 이상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만.”

“아… 예. 무슨 소문인지.”

“혹시… 그 파란이나 저에게 섭섭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이것부터 물어오는구나.’

굉장히 어렵게 입을 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케일리 예일, 게르한이나 자밀라에 대한 건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증은 있는데 확실한 물증은 없는 거겠지, 뭐.’

만약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면 조금 더 급진적으로 달려들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인성 참 좋기도 하다.

옆에서 이간질을 하고 있는 놈들이 있다고 한들, 1차적인 문제를 자신에게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버림받기 직전의 강아지 같은 표정에 괜스레 가슴이 찡해진 것은 당연한 일.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딱히 크게 문제되는 건 없습니다. 파란과 현성 씨에게는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전부 현성 씨 덕택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날, 튜토리얼 던전에서 현성 씨가 저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멘트 지렸고요.’

왠지 모르게 마지막 인사를 꽂는 듯한 플래그.

녀석의 얼굴에 불안감이 휩싸였다.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기영 씨에게는 감사할 일뿐이라…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히려 제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연금술사를 추천해 주신 것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재능이 없는 저를 거둬주시고 끝까지 믿어주신 것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표정 봐라. 현성아….’

아직 뭐라고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이적 플래그를 쌓고 있는 상황.

이미 슬픈 예감을 직감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무척이나 다급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이, 이적 준비를 하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여러 길드마스터와 왕래가 잦으신 것도 알고 있고요.”

“아….”

“…….”

“…….”

“네.”

“크게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만.”

“아….”

“역시 헛소문이었군요. 조금….”

“아뇨. 사실….”

“네?”

“사실 완전히 헛소문이라고 하기에는 힘이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물론 아직 이렇다 저렇다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만 최근에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라….”

“네?”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있는 단계에 있습니다.”

“네?”

‘이 새끼 얼굴 왜 이래.’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