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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78화 (475/1,590)

# 478

회귀자 사용설명서 478화

충실한 종(1)

갑작스러운 소집령에 모인 파란 길드원은 전부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 애들 역시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금 다르지만 나 역시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

정하얀과 한소라의 모습을 확인한 이후에는 현 사태를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먼 나라 이야기인 듯 바라보고 있었던 사건이 이제는 내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옆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와 급하게 뛰어가 봤더니 알고 보니 우리 집 불이었단다.

‘뭔 짓을 한 거야. 도대체.’

하나같이 하얀색 머리를 한 채 쪼르르 앉아 있는 모습은 가관.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얼굴이 좀 나았지만 한소라는 식중독이라도 걸린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가 봐도 마력 탈진 현상이다.

백발이 된 것으로 모자라 피부까지 벗겨지고 있는 걸 보면 마력을 한계까지 뽑아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생명력까지 퍼부어 버린 모양.

아마 다른 이들도 저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틀림없이 휴식을 권했을 것이다.

아니, 저렇게 나오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당장에라도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정하얀도 안 좋아 보이긴 하지만 마력 회복 속도가 비상식적으로 빠르다 보니 별다른 타격이 없는 것 같은 느낌.

전설 등급의 특성 대마법사의 심장의 효과였다.

‘단순히 마법을 떨어뜨린 게 아닌 거구나.’

브리핑을 받았을 때부터 마법 한 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소라까지 마력 탈진 현상을 겪는 것을 보면… 저 파티가 연방에 뿌린 건 단순한 운석이 아니다.

‘언데드?’

심할 경우 악마를 소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메라가 완전히 박살 나버린 만큼 72악마 군주가 소환되었을 확률이 높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90대 마력을 가지고 있는 카일리 예일도 함께였고 무엇보다 그녀가 정하얀 파티에 합류했다면 아마 여러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벨리알인지 뭔지 알 수 없지만 연방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기세로 일을 벌인 느낌이었다.

‘너 왜 그런 거야, 진짜….’

생각보다 캥기는 게 많다.

이전에 ‘너무 평화로운데’라고 중얼거린 걸 정하얀이 들어버린 것도 의심이 가고….

매일 밤 회식을 핑계로 자밀라와 놀아났던 것도 마음에 걸린다.

필요 이상의 스킨십을 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쓰레기 짓이라면 쓰레기 짓이라 분류할 수도 있다.

물론 대국적인 이유가 있긴 하다.

하지만 약혼자를 내팽개치고 놀러 다닌 놈이라는 쓰레기 타이틀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아니면 어제 한 이야기를 훔쳐 들었나?’

지난 밤 김현성과 나눴던 대화 역시 의심이 가기는 마찬가지.

수단은 알 수 없지만 정하얀이 내가 연방으로 이적한다는 이야기를 훔쳐 들었고, 정신이 출타해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게 그나마 개연성에 맞는다.

어째서 카일리 예일과 연대했는지, 어째서 그렇게 빠르게 극대노 상태로 진입했는지는 아직 애매한 부분이 많았지만….

오밀조밀한 퍼즐은 이후에 찾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이상하다고는 했지, 시바.’

카일리 예일에게 걸린 마법이 심상치 않았다는 걸 확인할 때부터 뭔가 싸한 느낌이 있었다.

배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배후가 정하얀일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물론 아직까지 정하얀이 이번 일의 범인이라고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봤을 때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

적어도 김현성이 빡쳐서 일을 벌였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얘는 진짜 이번 기회에 단단히 잡아야겠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더 큰 일을 치루기 전에 무조건 잡아 놔야 했다.

지금은 그나마 상황이 좋았지만 위협이 터진 이후 정하얀까지 추가된다면 솔직히 수습할 자신이 없다.

아무튼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

그리고.

우리 길드 측의 세 명이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

‘차라리 잘됐어. 시바…. 차라리 잘된 거야.’

애써 행복회로를 돌려보자면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뜻 보면 막장으로 보이지만 현 사건은 느슨해진 대륙 연합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어차피 연방 놈들은 일이 끝난 뒤에 팽할 생각이었고.’

‘설마 뭔가 일이 터지겠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대륙을 통치하는 지도자들의 생각.

무언가 실제로 터졌으니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리라.

정하얀 무리가 아니었다면 나라도 뭔가 터트리려고 했었던 타이밍.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내가 할 일을 대신 처리해 준 셈이라는 거다.

문제는 이 버튼이 내가 누른 버튼이 아니라는 것.

일처리가 얼마나 깔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 조합이 작은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일을 해결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정하얀이 주도한 일이라면 더욱더.

연방의 카일리 예일이 저 정체불명의 파티에 합류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나마 촘촘히 일을 처리했을 거라는 작은 기대가 들지만 아주 만에 하나 이쪽에서 일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나오기라도 한다면 줄줄이 소시지 엮이듯 순식간에 올라오고 말 것이다.

라이오스에 마법을 떨어뜨렸다는 게 정하얀이었다는 것부터 한소라가 흑마법사였다는 것도.

나아가 그걸 은폐한 게 교국의 명예추기경이었다는 것까지.

똥줄이 타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리라.

적어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일을 벌였는지, 증거는 없는지, 다른 사람보다 한발 앞서가야만 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카일리 예일에게 전부 뒤집어 씌워 버리는 그림도 아름답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도 내가 이 모든 사건을 알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증거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뒤처리도 직접 해야 돼.’

조금 어수선한 가운데 이제 막 김현성이 브리핑을 끝낸 상황.

다시 한번 조혜진이 파티원들에게 추가사항을 전달하고 있었을 때, 은근슬쩍 녀석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현성 씨.”

“네, 기영 씨.”

“…혹시나 파란에서는 어떻게 대응 하실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사실 아직 확실히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고립되어 있는 연방민을 생각해 보면 당장 구조대를 보내야겠지만 일단은 정찰대를 보내야 한다는 게 지휘부의 판단이었으니까요. 무턱대고 들어가기에는 정보가 너무 적고… 쓸데없는 희생자를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네.”

“조금 잔인한 생각이지만… 솔직히 저도 현 지휘부와 같은 생각입니다. 연방의 상황이 안 좋아지기는 했지만 애써 저희 쪽에서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제대로 된 정보를 모으고 완벽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볼 생각입니다.”

합리적인 판단이기는 하네.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정보가 모이기를 기다리는 것과 아직 외곽에 걸쳐 있는 타 도시의 연방민들의 피난을 돕는 일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회의 내용도 그렇게 흘러갈 확률이 높고요.”

나였어도 녀석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연방에 정확히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만큼 일단은 정보를 모으는 게 최우선.

최소한의 인도적 조치로 연방민을 도울 수는 있겠지만 사건의 중심지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다.

어떻게 봐도 합리적인 판단인데….

‘이 새끼 이거 그냥 가기 싫은 건 아니겠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이대로 확 연방이 망해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애초에 연방은 파란을 공중분해시키려고 했던 적대세력이고… 김현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손 안대고 코 푼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정적도 알아서 정리되고 있고… 이걸로 내 연방행이 완전히 무산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얘도 뭐 한 손 보탠 거 아니야?’

동기 자체는 충분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

왠지 모르게 수상하지만 일단은 한숨을 내쉴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현 사태에 대한 녀석의 입장을 확실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현성은 이번 일에 소극적이다.

갑작스럽게 터진 상황.

지켜보자는 스탠드를 취하고 있다.

이러다 연방이 완전히 망할 때까지 지켜보지는 않을지 걱정되지만 괜한 영웅 심리에 휩싸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 것보다는 단단하게 뭉친 채로 돌진하는 게 백 배, 천 배는 나았으니 어떻게 봐도 옳은 판단.

‘나도 딱히 나쁜 건 아니네.’

정하얀과 한소라가 일을 벌였다는 걸 굳이 알리고 싶을 리 없다.

“피난민 지원 병력 편성이 최우선 이겠군요.”

“연방의 몇몇 길드나 클랜은 이미 떠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원 요청도 받아들였고요. 일단 파란은 이쪽에서 대기할 생각인데 기영 씨는….”

“저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걸리는 게 있는 터라.”

“아… 그렇다면 같이.”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정말로 딱 주변만 둘러보고 올 생각이니까요. 하얀이와 함께 동행할 테니 크게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

“…….”

‘따라온다고 하지 마.’

먼저 선수 치는 게 좋을 것 같다.

“굳이 같이 오실 필요 없습니다. 파란에도 현장 지휘자가 꼭 필요하니까요.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처리해야 될 문제가 많습니다. 현성 씨가 가장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훈련에 손을 놓고 있었던 저보단 현성 씨가 현장에 남아 있는 게 좋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 금방 다녀올 테니까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네. 알겠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풀이 죽은 느낌이다.

한사코 말리는 나를 보며 정말로 이기영이 파란에 마음이 떠난 건 아닌지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고.

뭐, 지금 당장은 녀석이 뭘 생각하든 상관없다.

잡생각을 떨치며 정하얀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지사.

어마어마한 사고를 친 주범이자 현재 대륙 연합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버린 영웅은 그저 내 관심이 좋은 모양이다.

잠깐 움찔했지만 이윽고 얼굴이 환해지는 게 시야에 비쳤다.

이쪽이 뭔가 의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느낌.

단순히 나들이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그래…. 슬슬 약발 떨어질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지금까지 잘 버텨줬다는 것에 감사한 심정이다.

“가자, 하얀아.”

“네, 네!”

“잠깐 그리폰 타고 주변만 둘러보고 올 거야. 마력 홀로그램으로 볼 수 있게 전체적으로 담아올 건데. 괜찮지?”

“무, 물, 물론이죠. 오빠. 헤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현성 씨.”

“네. 알겠습니다.”

대놓고 물어보고 압박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는 게 좋을까.

고민했지만 아직 딱히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물론 방향은 있다.

정하얀의 문제는 물론, 김현성의 문제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몇 가지 조건만 맞으면 너무나도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전제조건은 딱 두 개.

한소라와 정하얀이 연방에 뿌린 게 악마여야 했고.

“…….”

그 악마가 거짓과 선동의 군주 벨리알이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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