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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79화 (476/1,590)

# 479

회귀자 사용설명서 479화

충실한 종(2)

“거, 나도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소?”

“괜찮다. 멀리까지 가는 것도 아니고. 대충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오는 것뿐이니까. 말했잖아. 조금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다고.”

“끄응. 난 도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다녀오쇼.”

“조심히 다녀오세요, 명예추기경님. 엘룬의 가호가 함께하길….”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레나 님.”

선희영, 박덕구, 엘레나를 비롯한 길드원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꽤나 지체되었다.

‘별거 아니야. 뭔가 조금 이상한 게 있어서 알아볼 것만 알아보고 바로 돌아올 거야.’

라고 주장했지만 정보가 너무 부족한 탓인지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물론 다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다가올 빅 이벤트를 위해서라면 정하얀과 둘만 가는 게 나았다.

사실 꼭 벨리알이 소환됐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정하얀과 한소라가 악마 소환을 했다는 것도 아직 모르는 일이고 설사 72군주 소환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벨리알일 확률은 낮다.

하지만.

‘묘하게 익숙하단 말이야….’

북서쪽에서 친근한 마력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는 내 생각이 맞다고 가정해도 될 것 같았다.

이래 봬도 벨리알과 한 번 가계약을 맺은 계약자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이런 종류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는 귓가가 계속해서 울린다.

이쪽으로 계속해서 교신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무언가 방해전파가 계속 들어오는 느낌.

아마 무능력한 파산자 베니고어와 비정한 쓰레기 엘룬이 중간에서 훼방을 놓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보는 화이트폴을 툭툭 두드리며 등에 올라서자 정하얀이 배를 꽉 껴안았다.

‘시바. 숨 막혀. 하임리히 요법이야, 뭐야?’

순간적으로 콜록거렸지만 손을 풀 생각은 없는 모양.

절대로 놓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집착증세가 도졌다고 느끼기도 했다.

물론 평소에도 달라붙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보통 이럴 때 그녀가 힘 조절을 잘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주변인들의 표정과는 상당히 대조적.

내가 다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물론 정하얀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연방이 지금 이 순간에도 박살 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기분이 나쁠 리가 없다.

만약에 정하얀이 나와 김현성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고 가정 한다면….

‘더 그렇겠지, 뭐.’

잠깐이었지만 머릿속에 있던 정보들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지사.

연방의 카일리 예일이 그동안 김현성과 주구장창 붙어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니 어느 정도 이야깃거리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1차원적으로 풀어본다면 이렇다.

카일리 예일이 김현성, 혹은 정하얀 본인에게 최근 내 행실에 대한 이야기를 중얼거린 것이 1단계.

아마 여자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무조건 입에 담았을 거고 우리 하얀이는 그 말을 듣고 무언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거기서 카일리 예일이 엮였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네.’

그동안 계속된 교육이 효과가 있었을 테니 여기까지는 무척 잘 참았을 터.

실제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연방 놈들이 작업을 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의 인내심이라고 할 만했다.

혼자 불안해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극노 상태를 유지했던 가운데 나와 김현성이 한 이야기를 들었을 테고 그 결과 버림받는다는 각이 날카롭게 섰다고 판단.

우소라 좌예일을 이끌고 연방 부수기를 실행했다는 게 사건의 전말이다.

물론 여러 가지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다.

일단 이 훈련장에서 연방까지의 거리가 꽤 멀다는 것.

28시간 안에 처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빠듯한 시간이다.

더군다나 여러 가지 술식과 마법진을 그려야 하는 시간까지 계산해 보면 시간은 더욱 필요하다.

‘이거 시바…. 그 전에 박덕구가 미리 입 털어 놓은 건 아니겠지?’

가능성 자체를 배재하기에는 그동안 녀석이 해온 보트설계가 너무나도 명확하다.

또 형님이 무슨 여자한테 빠져서 연방으로 간다는 소식 어쩌고, 어떤 꽃뱀인지는 모르겠지만 형님을 유혹 어쩌고 지껄인다고 가정해 보면 너무나도 상황이 잘 들어맞는다.

급하게 연방을 부수고, 그 정체불명의 꽃뱀을 잡아 죽인다는 하얀스러운 계획이 완성되기까지 녀석의 지속적인 서포트가 있었을 것 같았다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듯한데….’

항상 그녀와 함께 행동하다 보니 이제는 정하얀의 행동 패턴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니 조금이지만 오한이 느껴졌다.

확실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이라고 느껴진 탓이다.

연방으로 이적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연방 부수기에 돌입하는 건 확실히 정상인의 사고방식은 아니다.

가지 말라고 설득을 할지언정 이적할 장소를 망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는 가정에 불과했지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내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 그, 그 소식 들으셨어요?”

“뭘?”

“아, 아, 아, 아메라에서 보이는 해, 해안가가… 와, 완전히 부서졌대요. 이, 이제는 거기서 무, 물놀이 같은 것도 못할 거래요.”

‘나도 못 들은 소식을 너는 어디서 들었어.’

바다가 예쁘다 어쩌고저쩌고.

김현성에게 입을 털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아름답다고 소, 소문난 곳이어서… 꼭 오, 오빠랑 같이 가고 싶었는데 그, 그래도 바다는 교국에서도 많으니까. 가까운 라이오스도 있으니까요. 구, 굳이 연방에 갈 필요는 없죠오…. 그렇죠?”

“그래….”

“그, 그리고 소문보다 질도 안 좋은 곳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모험가들도 다… 다 나쁜 사람들이고 연, 연방 여자들도 다 나쁘대요. 외부에서 온 사, 사람은 어떻게든 해보려고 막, 막 그런다는 거예요.”

“그래….”

“그래서 저, 절대로 연방 사람들은 믿으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 더, 더러운 여자도 많아서 나쁜 사람들이래요.”

“누가 그래?”

“아? 어? 어, 어디에서 주워들었어요.”

박덕구한테 들은 건 아니길 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상상하기 무서우니까.

아무튼 간에 정하얀은 밑도 끝도 없이 뒤에서 중얼거리는 중.

계속해서 시작하는 연방에 대한 비방은 내가 다 낯부끄러울 정도였다.

‘밥이 맛없다’부터 시작해서 몇 시간동안 끊임없이 떠드는 모습은 어딘가 필사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미 끝장난 연방에 대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안 좋은 인식까지 심어주는 것이리라.

‘나름대로 계획적이네.’

다음 계획은 뭘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마 정하얀이 계획하고 있는 연방 부수기의 끝은 완전한 연방의 침몰.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황폐화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수도 있다.

정말로 아메라에 72군주가 들어서 있다고 가정해 보면 많이 잡아야 7일이나 10일 이내에 연방을 지도에서 지워 버릴 수도 있다.

물론 지난 번보다 계약 상태가 더 좋다고 가정한다면….

더 빨리질 수도 있고.

“이제 여, 연방은 가고 싶어도 못 가겠다. 그죠?”

“그러네.”

마음 같아서는 다시는 안 본다고 으름장을 놓고 싶지만 그 효과가 오래 유지되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일을 벌인 데에 일말의 고마움이 있기는 하지만.

‘교훈은 받아야지.’

이쪽의 판단 없이 자신 혼자 일을 벌인다면 그 결과가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정하얀이 한 번 회귀 사건을 겪은 이후 절대로 나를 건드리지 않는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그런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거다.

일단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더 효과적인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나름대로 친절함을 담아 응대하다 보니 본인도 신이 났는지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폰 위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벌써 수 시간째.

한참이나 정하얀과 함께 친절하고 즐거운 수다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전체적인 광경을 보기 위해 마음의 눈에 마력을 한계까지 집어넣은 것은 순식간.

이후 어째서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안 보이네.’

정확히 말하면 깜깜한 밤이다.

아메라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 확인했는데도 이 꼴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대낮처럼 느껴졌던 하늘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악마가 아니라 흑마법의 종류가 아닌지 의심될 정도.

심지어 그걸 보고 탄성을 내지르는 정하얀의 목소리는 가관이다.

“크, 큰, 큰일이네요. 저, 정말로 재,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보, 보이네요. 어떡하죠?”

‘입꼬리 좀 내리고 말해도 되는데. 그리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무슨 재기불능이야….’

“어,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될지 모, 모르겠다. 일단 마력 홀로그램에 담아갈까요?”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그래도… 하, 한 번쯤은 들려보고 싶었는데…. 저, 저기 불빛도 보여요. 작지만….”

외곽 도시 쪽에서는 아직도 일부 피난민들이 대피하고 있는 상황.

물론 저 지역도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사제들이 내뿜는 빛은 효과가 있는지 희미하게 보이기는 했다.

나 역시 슬쩍 신성력을 일으키자 대략적이지만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조금 그리폰이 안심한 것 같은 느낌.

아래로는 기존 연방 병사들이 잔뜩 흥분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아직까지 대륙 연합의 지원군은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열세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참지 못했는지 정찰을 위해 내려온 몇몇 인원이 몬스터를 몰아내고 있는 모습.

그럼에도 전체적으로는 제법 힘들어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개판이네. 개판이야.’

슬그머니 주민들을 피난시키는 곳으로 내려가 곧바로 신성력을 사방으로 뻗자 주변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교국의 명예추기경이 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인지 내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솔직히 내 관심사는 저들의 구출이 아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가설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계속해서 머릿속을 울리는 진동은 틀림없이 총명하신 벨리알 님이 보내시는 신호일 터.

“오, 오빠. 여, 여기 계속 계시다가는 조금 위험할 것 가, 같아요….”

“사람들을 구해야지.”

“그, 그래도요…. 잠깐 확인만 하고 돌아가신다고 했으니까. 이, 이만 다시 올라가요.”

“못 본 척할 수는 없어. 일단은 조금만 더 둘러보자.”

“그, 그렇지만.”

못 본 척으로는 달인급 텐션을 보여줄 수 있지만 일단은 계속해서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게 중요하다.

아까보다 회복했는지 검은색 머리카락이 몇 가닥 보이지만 아직는 마력 탈진 현상을 전부 회복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기껏해야 일반 등급, 희귀 등급, 높아봐야 영웅 등급의 몬스터들이다.

굳이 정하얀이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

마력의 폭발도 없고, 흑마법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맞네.’

연방 쪽에 악마를 풀어놓았다고 생각해도 된 것이다.

그것도 계약자가 컨트롤할 수 없는 수준의 악마.

기실 확인할 필요도 없다.

이곳에 익숙해질수록 웅웅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었으니까.

완벽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끝까지 긴가민가했지만 역시나 이 익숙한 기운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의 것이 맞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야! 역겨운 인간. 푸하하핫. 그 구역질나는 영혼은 여전하구나!]

거짓과 선동의 군주 벨리알이 다시 한번 현세에 소환된 것이다.

‘충실한 종이 진정한 만악의 지배자를 뵙습니다요! 벨리알 님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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