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0
회귀자 사용설명서 480화
벌은 받아야지(1)
비정한 엘룬 쓰레기와 무능력한 베니고어의 방해 전파를 뚫고 만난 벨리알의 목소리에 심신이 정화되는 느낌이 든 것은 당연지사.
사실 반신반의하기는 했다.
정하얀과 카일리 예일, 한소라 그리고 수많은 도움을 주신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도우미 여러분들이 아메라에 악마를 떨구어 놓았다고 한들, 그게 벨리알일 가능성은 희박했으니까.
애초에 벨리알이 소환된 이유가 이쪽 마력의 영향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가정이었지만 그때와 똑같은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 정하얀이 무언가 손을 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게 유효했다.
이쪽의 마력을 빌려 가거나,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촉매를 가지고 가거나.
나야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만악의 대군주이신 벨리알 님이 현세로 강림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아직은 그 준엄하신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쪽이 현재 어디에 위치한지에 대해서는 파악하신 것 같았다.
말하자면 완전히 암흑 속에 휩싸여 있는 이 범위 자체가 지고한 벨리알 님의 영역이라는 것.
‘대단하긴 대단하네.’
신화급 존재가 가진 힘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지만, 확실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연방의 절반을 완전히 암흑으로 뒤덮은 모습은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게 될 정도.
심지어 현세에 완전히 강림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다.
베니고어가 강림했을 때 보여줬던 언데드 청소 역시 충분히 박수를 보낼 만했지만….
‘역시 벨리알 님의 힘은 이 우매한 필멸자의 상정 범위를 완벽히 넘어서시고 계십니다. 만악의 지배자의 힘에 감복, 또 감복했습니다.’
[아부는 되었다고 항상 말하지 않았나. 정말로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야.]
‘그동안 정말 너무나도 그리웠습니다. 벨리알 님.’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역겨운 인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게 우리 같은 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만, 네 구역질 나는 영혼은 내게 오랫동안 잊었던 감정을 되새기게 하더군. 무어라 예를 들어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은혜로우신 벨리알 님께서 부족한 종을 그리워 해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 또 영광이옵니다.’
[그러니까 아부는….]
‘어디 계시는 겁니까. 벨리알 님. 온 천지를 뒤덮은 이 어둠의 기운은 이 필멸자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초라한 존재인지, 또 벨리알 님께서 얼마나 지고지순한 존재인지 깨닫게 만들지만, 벨리알 님의 위대한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너무나도 가슴 아플 뿐이옵니다.’
[아부는….]
‘심해처럼 깊은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이 필멸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요. 벨리알 님 목소리에 살살 녹는다. 살살 녹아!’
[…… 항상 생각하기는 하지만 정말로 역겨운 인간이로구나. 네 목소리에서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아 더욱더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부는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런 불필요한 말들은 필요하지 않겠지. 무언가 필요한 게 있는 것 아닌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필요한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 진심을 알아주시지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내 일찍이 지옥에서도 너같이 역겨운 아부를 들어본 적이 없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든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하면서도….]
‘오해이십니다. 벨리알님. 제가 어찌….’
[되었다. 어차피 너와 함께 일하면 내게도 득이 크니… 특히 저번 일에 대해서는 나 역시 내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
‘도움 말씀입니까?’
[자세한 건 알 필요 없다.]
고 말했지만 어째서인지 대충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대륙인들에게 공포나 불안함 따위의 마이너스 감정을 뽑아낸 것이 도움된 것이 틀림없으리라.
마치 반대편의 신들이 신앙심을 먹고 사는 것처럼 악마 군주들 역시 마찬가지.
계약서로 실적을 올리기도 했으니 어쩌면 가지고 있는 순위나 권능 따위가 업그레이드됐을 수도 있었다.
지고지순한 만마의 지배자 벨리알 님께서 지난번보다 조금 더 커다란 힘을 낼 수 있게 된 것은 조금 더 치밀하게 소환을 준비한 소환자들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본신의 힘 자체가 상승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느껴졌다.
[정답이다. 눈치 빠른 인간. 그럼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겠군.]
‘아마 계약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수적인 것들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침 제가 원하는 게 벨리알 님꼐서 원하시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벨리알 님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나저나 계약은….’
[계약은 하지 않았다. 그 흑마법사 인간의 재능이 제법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네가 없이는 가계약을 하는 게 힘이 들기도 하고… 대충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 고개만 끄덕였다고 보는 게 맞겠지. 덕분에 현세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졌다만… 뭐 아쉬울 것은 없다.]
‘현세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게 좋지 않으시는 겁니까.’
[물론 즐겁기는 하다만, 이곳은 내게 일터와 같은 곳이다. 너무 오랫동안 있는 게 달가울 리가 없지. 쓸데없는 대화는 이제 되었다. 네가 원하는 것을 고해보라.]
‘큼…큼… 제 입으로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죄송스럽습니다만, 그 하해와 같은 목소리로 직접 원하는 것을 말하라 하시니 염치불구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재미있는 일이었으면 좋겠군.]
‘사실은 저번과 같습니다.’
[음?]
‘명확히 말씀드리옵건대 이번에 속여야 할 것은 개인이 아니라 대륙 전체입니다. 벨리알 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으실지는 제가 확언을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지난번 같은 즐거움을 느끼시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아직 모든 내용을 말씀드리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만….’
[또 어떤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군. 정말로 궁금해.]
‘아마 원하시는 실적 역시 충분히 얻어 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계약은 저번처럼 흑마법사를 통해야 하는 건지….’
[필요하지 않다. 직접 계약은 불가능하지만, 가계약 정도는 가능할 것 같으니. 멍청한 베니고어를 비롯한 신들이 대륙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양이더군. 만약 강경파들이 대륙에 현신했다면 아마 너희 인간들의 입장 역시 무척 난처했을 것이다.]
‘강경파라고 한다면….’
[이미 베니고어를 통해 대충 전해 들었겠지만, 이 대륙은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영업장이나 다름없다.]
‘영업장….’
[어디까지나 인간의 표현에서 적당한 예를 찾아온 것이다. 우리도, 그들도 이곳을 영업장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아. 하지만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신앙심을 통해 신성을 얻으며, 대륙을 관리하고, 우리는 여러 가지 감정과 계약을 통해 에너지를 얻지. 말하자면 영업장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강경파라고 부르는 악마들은 이 영업장이 멸망의 길을 걷게 하는 게 숙원인 자들이고.]
‘그, 그렇군요.’
[참으로 멍청한 생각이 아닐 수가 없다.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자면 이 대륙은 황금알을 낳는 닭이야. 강경파들은 그 닭의 배를 가르려고 하는 이들이고….]
‘우, 우매한 자들이로군요….’
조금 불경한 생각이지만, 이들도 인간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
물론 조금 더 고차원적인 문제를 떠안고 있기는 할 것이다.
영업장이니, 황금알을 낳는 닭이니, 이쪽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결국 뜻은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얘네 입장에서도 조금은 스트레스 받겠네.’
동업자가 영업장에 똥을 투척한 상황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악마 중에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지향하는 바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1차원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금방 답이 나온다.
대륙의 관리.
마음속으로는 대륙을 아끼는 마음이든, 인간들을 아끼는 마음이든, 뭔가 있겠지만, 벨리알을 비롯한 일부 온건파 악마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속해서 실적을 올리는 것.
대륙이 망하는 꼴 따위를 보고 싶을 리 만무했다. 그 말씀대로 이곳은 신과 악마들의 일터였으니까.
‘대륙 파산 사건이 꼭 악마들에게 반가운 상황은 아니라는 거네.’
강경파들에게는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하며 이것저것을 떠올리는 와중에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벨리알의 목소리가 아니다. 들려오는 것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정하얀의 목소리.
왠지 모를 불안감을 감지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꼴은 가관이라 할 만했다.
가정하고 있던 것이 더 명확해지는 순간.
하계에 소환된 벨리알을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인제 그만 도, 돌아가요, 오빠.”
‘내가 왜 돌아가. 돌아가려면 너 혼자 돌아가. 하얀아.’
“뭐, 뭔가 느낌이 안 좋은 것 같아요… 빠, 빨리요오….”
약간 긴장한 채로 옷을 잡아 끌어당기고 모습.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당연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정하얀은 그 누구보다 이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슬쩍 주변만 둘러보고 나갈 생각이었겠지만, 영문도 모르는 내 님은 계속해서 호랑이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단다.
실제로 계속해서 위험한 장소를 제 발로 걸어가고 있으니, 답답한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슬그머니 정하얀을 바라보자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 고백 안 한다 이거지.’
“다, 다른 사람들도 걱정할 거예요. 그,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요. 안, 안 그래도 이제 곧 구조대가 오, 올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빠, 빨리 가자니까요.”
‘이게 어디서 눈을 부라려.’
“잠깐만….”
“빨리 가야 돼요!!”
‘언니, 저 맘에 안 들죠.’
[마음에 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벨, 벨리알 님을 향해 생각한 것이 아니옵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단순한 장난일 뿐이니 그리 긴장할 필요도 없다. 그럼 이쯤에서 조금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데….]
‘저 역시 마찬가지옵니다. 벨리알 님.’
[대충 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다만 정말 그렇게 진행해도 괜찮은 건가. 나야 상관없지만 멍청한 베니고어의 힘이 무뎌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는군.]
‘위대하신 분들의 영업장이 무너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답은 드리기 어렵지만, 운이 좋다면 이번 기회에 대륙이 본래의 상태를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본래 인간들이라는 건 절박하면 절박해질수록 신을 찾게 마련입니다. 벨리알 님은 그 지고지순한 힘을 우매한 인간들에게 보여주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베니고어의 재림과 상징인 저를 이용하시는 게 아마… 편한 방법이 될 겁니다….’
[그 말은….]
‘부족한 종이 만마의 지배자에게 드리는 첫 번째 부탁이옵니다. 일단 이 자리에서 저를 납치해 주시지요.’
[푸… 푸흐흐… 정말로 구역질 나는 인간이군. 내가 의심스럽지 않은가? 너를 해할 수도 있다만….]
‘저와 벨리알 님의 사이가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너와 나 사이니까. 가능한 부탁이겠지. 푸… 흐흐… 그래. 한 번 더 네 장단에 어울려 주마.]
‘압도적 감사를 올리겠습니다. 감사. 또 압도적 감사! 너무나도 감사드리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준비하지.]
딱 거기까지였다.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
‘뭐야. 시바….’
당연하지만 나보다 더 당황한 것은 정하얀 쪽이다. 얼굴이 푸르죽죽해진 것은 물론, 땀으로 온몸이 축축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
“도, 도, 도망쳐요.”
“뭐?”
“빨… 빨리요.”
“그게 도대체… 무슨….”
“도… 도망치라고요!!! 빨리!!! 빨리 도망치라고!!!”
상황이 긴박해지기 시작했다.
정하얀에게는 조금 잔인한 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단언컨대 필요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