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1
회귀자 사용설명서 481화
벌은 받아야지(2)
‘도망치긴 뭘 도망쳐. 내 발로 기어들어 가도 모자랄 판에.’
은근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는 나와는 반대로 정하얀의 표정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현재 상황이 그 어떤 상황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이 분명.
당장 나만 해도 피부가 찌릿찌릿 울릴 정도였으니 그녀가 느낄 불안감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래저래 막장 짓을 일삼기는 해도 이쪽의 안위가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은 모양.
순간적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이게 공명의 함정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기영아….’
이번만큼은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정하얀이 뭔가 극적으로 변하는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종류의 대형 사고를 계속해서 수습해 줄 수 있을 리 만무.
자그마한 것 정도야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이번 일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쪽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내 손을 거쳤느냐, 거치지 않았느냐의 차이는 크다.
더 커다란 사고를 치기 전에 다시 한번 잡아줄 시점이 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하얀은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중.
“이, 이미 늦었어.”
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로 내리꽂혔다.
“그게 무슨….”
“떨, 떨어지지 마요. 절대로 떨어지면 안 돼요. 절대로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나, 나중에 설명해 드, 드릴게요. 그러니까. 떨어지지 마요. 떨어지지 마세요.”
눈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은 당연지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사이로 흉측한 악마들이 모습은 드러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더 이상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는 게 도움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정하얀 역시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며 중얼거리는 중.
마침내 상상할 수 없는 적의가 온몸을 뒤엎었을 때 흉측한 악마들 사이로 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급의 악마들이 홍해 갈라지듯 좌우로 갈라진 상황.
벨리알이 등장할 거로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절로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체.
생김새가 일반적인 여성과 다르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 할 수 있겠지만, 외모 자체는 아름답다고 말할 만했다.
-흐음….
천천히 좌우를 바라본 후, 거대한 지옥 사냥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
무언가 다른 액션을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존재 그 자체로도 압박감이 느껴진다.
새하얀 피부와 보라색의 눈.
몸을 가려주는 옷 대신 자리한 것은 꿈틀거리는 촉수. 심지어는 머리카락마저 뱀 같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얼굴 자체는 지고의 미인이라 할 만했지만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촉수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어우, 징그러워.’
물론 그녀의 외관보다 더욱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쪽에 보내고 있는 적의 그 자체.
‘개 씨발…. 벨리알 관계자 맞으시죠?’
[준 신화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리무르아의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이름-리무르아]
[칭호-27군단의 만인장, 서열 1,692위 악마 군주, 벨리알의 충성스러운 사도]
[나이-666]
[성향-충성스러운 이기주의자]
[분류-악마]
[능력치]
[제한이 걸려 있어 능력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현세에 소환된 페널티로 능력치가 소폭 하락한 상태입니다.]
스텟과 특성 따위의 것들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사실 정확한 능력치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느껴진다.
준 신화 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네임드 몬스터.
그것만으로도 저 여자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가늠할 수 있었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27군단의 만인장 ‘리무르아’라고 합니다.
“…….”
-어디에선가…. 어디에선가 추악하고, 구역질 나는 빛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로군요. 베니고어에게 선택받은 인간을 보게 될 줄이야. 현세로 강림한 이후에 곧바로 이런 기분 좋은 상황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슬그머니 이쪽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내는 모습은 가관.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정체불명의 호의적인 눈빛을 확인한 이후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키야…. 연기력 지리네.’
벨리알이 거느리고 있는 악마답게 수준급이라고 할 만했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즐거워 보이기도 했고.
물론 그것보다 놀라웠던 건 저 정도의 악마가 현세에 강림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지만… 아마 저건….
‘정하얀과 한소라가 소환한 건 아니겠지.’
현세로 강림한 벨리알이 불러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악마들이 현세로 소환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사실 벨리알이라고 해도 저 정도나 되는 악마를 불러들이기 쉽지는 않았을 터.
시스템 자체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스템에 균열이 생겼으니까… 가능하다고 봐도 되는 건가?’
말하자면 시스템에 작은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을 통해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이거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온건파 악마로 분류할 수 있는 벨리알이 그 구멍을 관리하고 있다는 건 안심할 수 있는 부분.
만약 소환된 것이 강경파였다면…. 아니 애초에 그런 가정 자체가 의미가 없기는 하다.
악마 대군주와 파장을 맞출 수 있는 인간은 없었을 테니까.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정하얀은 계속해서 리무르아라는 악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걸 보면 대화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벨리알과 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정하얀과 리무르아 역시 비슷한 대화를 하고 있을 것이 분명.
현재 이 사단을 만든 것이 정하얀 이었으니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계약은 진행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엄연히 소환자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성장하긴 했네. 우리 하얀이.’
다짜고짜 마법을 날리지 않은 것 하나는 칭찬해 주고 싶다.
하지만 그 협상이 잘 풀릴 리 만무.
애초에 저 악마의 목적이 이쪽의 납치라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 하고 있는 대화 자체가 의미 없다.
아마 리무르아 입장에서는 적당히 상대해 주고 있는 거겠지.
내 예상이 맞았는지 정하얀의 얼굴은 점점 더 구겨진다.
크게 흥분했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눈에는 점점 더 핏발이 서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서히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당신 말에 동의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저 남자가 가지고 싶거든. 미안해, 마법사 아가씨. 그것 말고 협상의 여지는 없어.
“하얀아? 너….”
결국, 협상은 결렬. 심지어 그걸 리무르아가 입 밖으로 내뱉는다.
내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 건 너무나도 당연한 거고.
정하얀의 얼굴은 다시 한번 불안감으로 일그러진다.
현재 상황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듯했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시야에서 사라진 악마가 정하얀과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어….”
‘빨라.’
소름이 돋는 것은 순식간.
깜짝 놀란 정하얀이 무언가 주문을 내뱉었지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하얀이 구석으로 처박힌다.
데미지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꽤 요란한 소리가 들린 걸 보면 뼈 한 군데는 부러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살살해요.”
-죽이진 않을 겁니다. 안전하게 돌려보낼 생각이기도 하고요. 애초에 저 여자가 없으면 당신이 우리를 이곳에 불러들일 수단이 사라지는데…. 그런 멍청한 짓을 왜 하겠어요. 벨리알 님에게도 당부받은 사항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리무르아 님.”
-들었던 것처럼 달달한 입을 가지고 계시네요. 저야말로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현세로 나온 게 얼마만 인지… 요즘 당신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을 찾기가 쉽지가 않더군요.
“칭… 찬, 고맙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짧은 스몰 톡을 나누고 다시 한번 전방을 바라본다.
콜록, 콜록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정하얀이 보고 있는 모습은 내 어깨를 부여잡은 리무르아일 터.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돌아가세요. 멍청한 인간. 당신에게 빚진 게 있는 만큼 목숨만은 빼앗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감사의 인사는 따로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인간을 발견한 게 얼마만 인지….
‘아아… 그런 대화 나누셨구나.’
어째서 정하얀이 화내고 있는지 이해가 간다.
“그… 그 손 놔. 콜록….”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흥미가 생겼다고….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을 이렇게 타락시키는 게 취향이라….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그, 그 손 놓으라고….”
-죽기 싫으면 왔던 길로 돌아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랍니다.
“그 손… 노, 놓으라고 마, 말했잖아.”
-싫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왜 도발하고 그래.’
기왕 하는 거 조금 더 극적인 순간을 연출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조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내 몸을 촉수가 감싸 안기 시작한다. 즐거워 보이는 리무르아의 얼굴은 가관.
팔다리 할 것 없이 나를 싸매어 오는 정체불명의 촉수는 심지어 옷의 안쪽까지 들어와 여기저기를 헤집고 있었다.
‘시… 시바 이거 뭐야. 이러지 마. 야, 너 왜 이래.’
-생각보다 귀여운 사람이네.
‘야… 이러지 마. 응… 응기… 잇.’
절로 몸이 굽혀질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가 만무했다.
물론 정하얀의 경우에는 더 하다. 눈앞에서 내 남자를 빼앗기고 있는 그녀가 어떤 심정일지는 솔직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나이는 29살… 취미는….’
같은 정체불명의 상황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다.
“하, 하얀아. 도망… 도망쳐.”
“그. 손. 놔.”
-싫은데….
“주, 죽, 죽…. 죽여버리기 전에… 빠, 빨리 놔…. 놓으라고 이야기했… 흐으윽…. 놓으라구우…. 놓으라구우!!!”
얼마나 억울했는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지만, 저 눈물 이후에 시작될 일을 대충 예상하고 있는 이쪽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인제 그만…. 적당히 해주셔도 됩니다. 리무르아 님.”
-버릇 고쳐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계신 거 아니었나요?
“그래도 대충 하고 돌려보내요.”
‘괜히 불안하니까.’
-흐음…. 조금은 기분 좋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나 봐요?
“다른 의미로 기분이 좋기는 한데… 솔직히 불안해서 그래요.”
‘위험한데.’
리무르아가 위험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눈앞에 보이는 정하얀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중얼거리고 있는 꼴은 그 불안감을 더욱더 증폭시킨다.
중노와 극노의 상태는 이미 옛날 옛적에 지났다. 굳이 자세히 행동을 살펴보지 않아도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극대노와 비슷한 상태를 본 것은 저주받은 신단과 라이오스 사태 이래로 처음.
심지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시바….’
불안한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리던 정하얀이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흔들며 입을 여는 꼴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스럽다.
극대로 진입했을 때에도 항상 이쪽의 앞에서는 이미지 관리하던 모습과 상반되는 모습.
“주, 죽일 거야…. 죽, 죽일 거야.”
-재미있네.
“그… 손 놔…. 이… 이 더러운 싸, 싸구려… 가, 같은 년…. 그 손 놓으라고!!! 그 더러운 손으로 오빠를 만지지 마. 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콜록! 죽여 버릴 거야!!! 찢어서 죽여 버릴 거야!! 콜록! 콜록!!! 죽여 버릴 거야아!!!”
-…….
“…….”
“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누가 악마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