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3
회귀자 사용설명서 483화
슈퍼스타L(1)
휙휙 바뀌는 풍경이 보이기는 했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속도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안락한 승차감이다.
악마들 역시 마차 비스름하게 생긴 걸 운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혹시나 이쪽을 위해 마련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렇다기에는 옆에 앉아 있는 촉수녀의 행동이 꽤 자연스럽다.
아무튼, 이렇게 편하게 이동하니 괜스레 정하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제대로 들어갔으려나 몰라.’
조금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버릇 고치기의 일환이라고 한들, 마지막에 본 정하얀의 모습이 제법 비참해 보였기 때문이다.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가 마트에서 과자를 사달라며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지 말라고 울부짖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나조차 숙연해지게 만들 정도였다.
‘죄책감은 더 할 것 같은데….’
애초에 반성과 자책하라는 의미로 이런 상황을 던진 것은 맞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다. 마지막에 잘못했다고 말한 것도 어떤 심정일지 이해 가고….
본인이 던진 작은 불씨가 이렇게 크게 되돌아올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 사실.
물론 아직 내가 살아 있는 만큼 1회 차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커다란 자책감에 휩싸이게 될 거라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반성할 때도 됐지.’
본인이 제대로 느낄 때도 됐다. 물론 이걸로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나 다른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고….
하지만 카르마를 깨닫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손뼉을 쳐줄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간단한 이치.
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걸 깨닫게 되는 것만으로도 조금 더 행동반경을 줄일 수 있게 되리라.
슬그머니 옆쪽을 바라보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예의 그 촉수녀.
정하얀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르게 제법 정중한 모습을 보였는데, 아무래도 벨리알에게 무언가 언질을 받은 듯했다.
정체불명의 촉수로 이쪽을 희롱하던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
마치 VIP를 대접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니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정체불명의 음료를 조심스레 넘기며 말을 걸어왔다.
‘어우 씨바. 맛없어. 이거 뭐야.’
-뭔가 불편한 점이라도….
“아닙니다. 뭐가 불편하겠습니까? 다만 하얀이가 잘 돌아갔는지 궁금한데….”
-흐음.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확인하고 있으니까요. 현재는… 인간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한 거로 확인됩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이기는 하지만요. 저희 쪽이 보내는 메시지 역시 같이 동봉했으니 다른 인간들은 무언가 대책을 강구하고 있겠군요.
‘무사히 돌아가기는 했나 보네.’
혹시나 나를 찾는다고 난리 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마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겠지.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현재 합동 훈련장의 상태였다.
‘난리 났겠네. 난리 났겠어.’
딱 이쪽이 그리던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소식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야 유리하게 작용할지에 대해서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모양.
과연 벨리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리고 그 미친 여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 여자는 벨리알 님께서도 특히 신경 쓰시는 인간이라…. 조금 거칠어 보였겠지만 조금 지나고 나면 멀쩡히 일어날 겁니다. 애초에 제가 준 대미지보다는 허용치 이상의 마력을 사용한 게 원인이기도 했고요. 이런 따분한 이야기보다는…. 음…. 어떻습니까? 마침 도착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텐데.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방금 전에 어떠셨는지…. 미친 여자와 마찰이 있었을 때 나누었던 말처럼 할 수는 없겠지만 원하신다면 인간 여성체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드릴 수….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왠지 모르게 그 말이 현실이 될까 봐 무섭다. 얼굴 자체는 미형이기는 했지만, 뭔가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다.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저것들에 의해 ‘기잇’ 당할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개를 젓게 된다는 거다.
당연하지만 눈앞에 있는 리무르아는 무척이나 시무룩한 표정.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아쉽네요. 혹시나 제 겉모습이 성에 차지 않으시는 거라면 일부 조정해 드릴 의향도 있습니다만.
“아니요. 아니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래 봬도 다른 악마들 사이에서는 제법 인기가 많은데…. 조금 어리거나 나이 든 모습으로도 충분히.
“아니요.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무척 감사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이 우매한 필멸자가 아름다운 리무르아 님에게 진심으로 빠지게 될까 걱정이 돼서….”
-입에 발린 거짓말이라고는 해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굳이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말을 높일 정도로 대단한 악마가 아니에요. 그리고 벨리알 님이 아니더라도 저는 당신에게 충분히 우호적이랍니다. 굳이 말하자면 취향이라고 하는 게 좋겠네요. 저뿐만이 아니라 아마 악마 중에서 당신을 싫어하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겁니다. 다른 인간과 차이를 두는 것이 당연한 거고요.
‘욕이야, 칭찬이야.’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이토록 구역질 나는 영혼을 가진 걸 본 것은 제 생을 통틀어 처음입니다. 분명히 신성의 기운이 느껴지는데도 영혼은 이토록 더럽다니….
“불… 편하시지는 않습니까? 악마들에게 신성력은 치명적으로 작용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조금 불편하다는 느낌은 있지만, 당신 같은 경우에는 안에 들어 있는 빛보다는 그 구역질 나는 영혼의 크기가 더욱더 커서…. 어떻게 예를 들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굳이 들어보자면 발효식품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이를테면 치즈 같은 것들 말입니다. 고약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맛은 아주 좋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 네에….”
-당신은 그런 치즈 중에서도 몇 만 년이나 묵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썩은 내가 진동하는 특수한 치즈인데, 그런 걸 싫어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너도나도 한 번쯤은 입에 넣고 싶은 게 당연한 거랍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이건 진짜 욕 아니야?’
혹시나 이쪽을 먹이려고 지껄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
하지만 리무르아의 눈빛은 진심에 가까웠다.
악마들의 언어 표현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도 걸렸고 무엇보다 실제로 먹음직스럽다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가관. 어떻게 생각해도 부담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러지 마….’
-언제든지 생각이 바뀌신다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언제라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크… 흠흠. 말씀을 정말로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큼. 사과의 의미라고 하기에는 뭣 하겠지만 가능하다면 작은 내용으로나마 계약 한 건을 진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것은 바로 그때. 무표정한 얼굴이 밝아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보험 팔이에 성공한 보험 판매원 같은 얼굴로 변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게 확실히 실적이 되긴 되는 모양이네.’
조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악마가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구미가 당기게 할 수단이 있다는 건 내게는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였으니까.
애초 예상하기는 했지만, 막상 확인하게 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같은 길을 걷지는 않은 만큼 직접계약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가계약 정도라면 얼마든지 진행해 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이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제가 더 감사할 지경이군요. 하핫. 리무르아 님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인간들과 계약을 맺으실 수 있으실 텐데….”
-대충 저희 쪽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 거지만 단순히 계약한다고 해서 실적이 크게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와 계약을 맺는지, 또 계약 내용이 무엇인지, 그 계약으로 얼마만큼의 성과를 내는지도 중요 요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번 계약으로 인해 벨리알 님의 순위가 무려 41계단이나 상승했다는 걸 보면 대충은 감을 잡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네?”
-본래 벨리알 님께서는 72 악마 군주 중에서도 서열 68위로 비교적 낮은 서열에 있으셨습니다. 사실 10위권 밖에 있는 악마는 그 힘이나 권능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41계단이나 상승했다는 건 충분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직접계약도 아니고 가계약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당신의 그 썩은 영혼 그리고 대륙 전체에 벨리알 님의 위엄을 심어줬다는 게 유효했던 것이겠지요. 이 정도 스케일로 계약을 진행한 것은 저희 사이에서도 충분히 이례적이라는 평이 많았습니다.
“아….”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베니고어의 재림이라고 불리는 당신과 계약을 맺었는데 어떻게 실적이 쌓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네.’
-만약 정말로 이기영 님께서 저와 가계약을 맺어 주신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한 번에 1,000위권 내에 진입할 가능성도 열릴 것 같습니다. 무려 600계단이 넘게….
‘이거 진짜 대박이네.’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벨리알이 지나치게 친절한 것도 그렇고, 가지고 있는 힘 자체도 크게 성장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막상 상자를 까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저번 라이오스 사태. 그거 한 방으로 무려 41계단이나 상승했단다.
심지어 촉수녀 리무르아는 가계약 한 방에 600계단 상승의 경지를 꿈꾸고 있고….
벨리알의 휘하에 있는 악마들과도 간단한 가계약을 진행한다면 내가 모르는 지옥 내 세력의 판도가 변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가능할 때의 이야기겠지만.
-저, 정말 해주시는 겁니까?
‘괜히 해준다고 했는지 몰라.’
“네. 물론입니다. 앞서 충분히 도움을 주시기도 했으니까요. 계약 내용은 추후에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많을 테니까요.”
-네.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알고 있어요. 이번에도 대륙의 모든 인간을 속이신다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충 계획하고 있는 바는 그렇습니다.”
-저, 이기영 님.
“네?”
-직접 이런 말씀 드리기는 무척 죄송합니다만….
“네.”
-혹시나 추후에 가계약을 진행해 주실 때.
“네.”
-기왕이면 조금 비중 있는 역할로 배정해 주신다면… 너무나도 감사할 것 같습니다. 보답은 꼭 해드릴 테니까요.
‘뭐야…. 이거 언제 이렇게 소문이 퍼진 거지.’
벨리알의 사도가 아니랄까 봐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습은 가관. 현재 이쪽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이렇다.
저들은 배역을 원하는 배우고.
이쪽은 이 무대의 책임을 맡은 총책임자이자.
캐스팅 디렉터이자.
감독.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물론,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팔자 폈다, 기영아. 빛 길만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