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5
회귀자 사용설명서 485화
파란의 사정(1)
“김미영 팀장님.”
“아, 박중기 팀장님…. 죄송합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미처 못 드렸군요. 물품은 전부 도착했나요?”
“예. 말씀하신 보급품은 전부 처리해서 창고에 넣어놨습니다. 일부는 곧바로 현장으로 갈 수 있게 마차에 실었고요. 확인 이후에 길드마스터께 결재 받으러 갈 예정입니다. 바쁘시다면 제가 김미영 팀장님의 몫까지 처리하겠습니다.”
“아니요. 정신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가 할 일은 끝까지 하는 게 맞겠죠. 이것 역시 중요한 일인데. 지원군도 함께 도착했나요?”
“지원군은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워낙 일이 갑작스러웠던 터라…. 교국에서는 템플러들을 포함한 신성기사단과 대주교급의 인사를 전원 차출한다더군요.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교황청에서 운영하는 모든 무력 단체를 움직일 것 같습니다. 다른 대도시들도 마찬가지고요. 바젤 교황님께서는 합동 훈련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연방으로 향하신다고 하셔서 내부적으로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건….”
“저도 옆에서 최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했지만, 성정이 워낙 불같으신 분이라…. 오스칼 님과 다른 의원분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곧바로 연방으로 진격하셨을 겁니다.”
“린델의 분위기도 뒤숭숭하겠네요.”
“어디 린델뿐이겠습니까. 교국 전체가 다들 불안에 빠진 느낌입니다. 이쪽으로 오면서 다른 중소도시들도 전부 확인했지만, 전체적으로 주민들의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대부분 기도만 드리고 있고…. 조금 과장해서 말씀드리자면 국가 자체가 마비된 것 같습니다. 여기는 어떻습니까?”
“상갓집 같은 분위기예요. 물론 그럴 만도 하지만…. 박덕구 님이 특히 안 좋으시고. 엘레나 님은 소식을 듣자마자 혼절하시고. 선희영 님이나 조혜진 님도 표정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고요.”
“정하얀 님께서는….”
“매일 식사를 가져다 드리고는 있는데 안 드시고 계세요. 계속해서 목 놓아 우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는데 얼마나 상심이 크실지 가늠이 안 되네요. 바로 눈앞에서 부길드마스터를 잃은 거나 다름없는데…. 전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더 가슴 아파요. 실제로 도착한 직후에는 횡설수설하며 자기 잘못이라 중얼거리기도 했고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일단은 휴식을 권했지만….”
“…….”
“박덕구 님은 물론이고 길드마스터나 다른 분들까지 제대로 만나지 않으시고, 상처도 회복하지 않으신 채로 가만히 놔두고 있는데 사제들이 들어가도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길드마스터께서는 혹시나 자해할 염려가 있으니 주시하라고 하셨고요.”
“끄응. 참…. 사람이 좋은 것도 문제가 되나 봅니다. 듣기로는 대피하는 연방민들을 구하시다 일에 휘말렸다고 들었는데…. 디아루기아 님에게 듣기로는 아직 생존하신 게 확실하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저희 같은 길드 직원들이 더 정신을 차려야죠. 파티원 분들은 다른 부분까지 신경 쓰기 어려울 겁니다.”
“네. 그렇게, 그렇게 해야죠.”
김미영 팀장의 어두운 낯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그동안 같은 파란의 길드 직원으로서 동고동락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왜 안 힘들겠어.’
오랜 시간 부길드마스터의 손발이 되어 행동했던 게 바로 김미영 팀장이었다.
자신을 지옥 같은 삶에서 구해준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악마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다른 분들과 같은 반응을 보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눈물 흘리고 싶고, 주저앉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평소처럼 업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부길드마스터의 신임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저런 모습을 처음부터 봤기에 보잘것없던 사람을 파란 행정의 중심으로 기용했던 거겠지.
슬퍼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서둘러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리라.
“타국과의 협의는 잘 되어가고 있는 게 확실합니까?”
“일단 연방 탈환 작전은 정식으로 승인을 받은 상태예요. 정확히 일주일 후에 작전이 시행될 예정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네.”
“제가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여러모로 준비가 미흡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몇몇 국가와 대형 길드에서 소극적인 것도 영향을 끼치고 있고, 아직도 각 지역에 들어가는 병력의 구성에 대해 옥신각신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같은 연방의 멤버인 지옥불의 게르한이나 자밀라 같은 이들도 의지가 없어 보이더라고요. 연방 내에 있는 시설들을 전부 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씁쓸한 일이죠. 부길드마스터와 그토록 친하게 지내던 이들이었는데…. 소식이 끊기자마자 발길을 끊어버리더라고요.”
“거참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로군요. 뭐, 그런 인간들이….”
“연방 다음에는 다른 왕국들 차례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건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지. 길드마스터께서는 최악의 경우 사국동맹과 공화국만으로 탈환 작전을 진행하는 경우도 생각하시고 계신 것 같더라고요.”
“공화국 같은 경우에는 적극적이겠군요.”
“예. 불행 중 다행이죠. 지난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이미지를 어떻게든 회복하려는 것 같습니다. 현 공화국 총통이 악마에게 반감을 품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거예요. 악마 소환사 진청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만요.”
“하지만 여러 가지로….”
“불안요소가 많죠. 그 불안요소를 최대한 줄이는 게 저희 일이고요. 부길드마스터의 부재로 아마 다른 업무까지 전부 맡게 될 것 같은데 박중기 팀장님도 준비 단단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혹시나 일이 잘못될까 봐 걱정입니다.”
“…….”
“…….”
잠깐의 침묵이 장내에 가라앉았다. 아마 김미영 팀장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파란의 행정팀은 타 길드의 행정팀에 비해 훨씬 유능하다는 평이 많다.
하지만 거기에 부길드마스터,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세밀한 디테일을 잡아주는 관리자 없이 어디까지 해줄 수 있을지 걱정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특히나 이렇게 큰일을 말이다. 아마 이 침묵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정말로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잠깐의 침묵 속에서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윽고 시야에 길드마스터의 집무실이 비친다.
잠깐 심호흡을 한 이후에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셔도 됩니다.’ 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미영 팀장이 혼자 고개를 끄덕인 이후 천천히 집무실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충격이 크실 텐데.’
길드마스터와 부길드마스터의 사이가 워낙 각별하다 보니 이번 일에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는 것 같지만 조금 수척해진 모습을 보니 확실히 영향을 받는 듯했다.
수염을 정리할 여력이 없었는지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다.
핏발이 서 눈이 붉어진 것은 물론, 전체적으로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라고 평할 만했다.
“인사는 생략하셔도 됩니다. 곧바로 결재할 서류만 보여주시고 바로 나가…. 아니, 잠깐만 대기해 주세요.”
“네.”
“네.”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데.
마치 얼음장 같은 느낌. 사방이 무척 차가워 나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게 될 정도.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길드마스터의 부재 시 길드마스터에게 결재를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평소의 길드마스터는 지금과 많이 달랐던 거로 기억한다.
무표정이었지만 가식적으로나마 미묘하게 웃음기를 띄고 있었고 항상 친절했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지금 보고 있는 게 정말 그 김현성이 맞는지 의심이 갈 지경.
“보급품은 이게 끝입니까?”
“네. 이, 일단은 최대한 구할 수 있는 만큼은…. 전쟁이 얼마 끝나지 않은 터라 전체적으로 물량이 부족합니다. 여유가 있는 물품들도 있기는 하지만….”
“3일 이내에 똑같은 물량을 한 번 더 준비해 주세요.”
“네?”
“준비하세요. 무슨 수단을 써도 상관없으니 준비만 하시면 됩니다.”
“상, 상관없다고 하시면….”
“제가 일일이 설명해 드려야 합니까?”
“아, 아닙니다.”
“알아서 물량만 맞춰오세요.”
“알겠습니다.”
‘제기랄….’
“아시다시피 기영 씨가 부재중입니다. 전술지원팀과 전략보급지원팀, 그 외에 말씀드리지 않은 여러 가지 행정팀의 일은 앞으로 김미영 팀장님과 박중기 팀장님 두 분이 처리해주시게 될 겁니다. 기영 씨를 대신해 혜진 씨와 함께 합동 회의는 물론 파란의 공식 회의에도 참여하게 될 테니, 그렇게 알고 준비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역시나.’
“현 상황에 대해서 대충은 알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
“네…. 네.”
“김미영 팀장님은….”
“네. 길드마스터.”
“연방 탈환작전에 걸림돌이 되거나 위험요소라고 판단되는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해 저에게 가져와 주세요. 당연하지만 명단의 내용은 기밀입니다.”
“…….”
“이틀 드리겠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검은 백조 이지혜 씨의 도움을 받으셔도 무방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능력 있는 두 분이니 잘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
왠지 모르게 이럴 것 같더라니.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안 그래도 무거운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이 아니리라.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는 간다.
하지만 평소와 무척이나 다른 모습은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명단을 만들어오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살생부를 만들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보급품을 가져오는 것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란다.
‘소도시나 화전민이라도 털라는 거야, 뭐야.’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3일 안에 같은 물량을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보급품을 준비하더라도 파란의 이미지에 타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 상황이라는 거다.
그만큼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꼭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지에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괜스레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길드마스터를 뵙….”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
“용건만.”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
“아직 마법사들이 확인 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이지만, 연방 측에서 온 메시지는 마, 마력 홀로그램으로 보이며…. 부길드마스터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다른 트랩이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전령이 말을 내뱉었던 바로 그 직후.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옆에 있는 김미영 팀장의 몸 역시 오들오들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숨을 못, 못 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