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6
회귀자 사용설명서 486화
파란의 사정(2)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치 내 다리가 아닌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
저도 모르게 후들후들 떨려오는 몸을 꽉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희귀 등급에서 멈추기는 했지만 나 역시 한때 칼 밥을 먹었던 모험가였다.
바로 옆에서 창백하게 질린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김미영 팀장 역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쓰러질 수는 없다.
억지로 입술을 깨물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제길….’
천천히 앞을 바라보니 무표정으로 전령을 응시하고 있는 길드마스터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최대한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모습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방금 전에 봤던 모습도 이질적이었지만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더욱더 이질적이다.
최대한 화를 억누르고 있는데도 몸을 비집고 나오는 살기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울 지경.
몇 초 동안의 침묵이었지만 체감상으로는 몇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막 거친 숨을 토해내려고 했을 때 길드마스터의 입이 천천히 열리는 것이 보였다.
“곧바로 회의실로 가져와 주세요.”
“아…. 하, 하지만 아직 트랩이 전부 확인되지 않고….”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져오세요. 그리고….”
“네. 넷.”
“다른 파티원들에게는…. 아니, 파티원들 역시 소집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하얀 씨는 제외합니다. 정확하게 3분 뒤에 모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길드마스터.”
“…….”
“…….”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에 지금껏 참아왔던 숨이 토해졌다.
“허억, 허억….”
“끄윽….”
옆에 있는 김미영 팀장 허리를 숙이며 헛구역질을 하는 중.
하지만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김미영 팀장님. 이거 저, 저희도 가야 하는 겁니까? 따로 말씀이 없으셨는데.”
“아마 참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신이 없어 미처 말씀하시지 못한 것 같은데…. 방금 전에 파란 공식 회의에도 참여하라고 분명히 언질 주셨으니까요. 무엇보다 현재 부길드마스터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는 게 앞으로 계획을 정리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그 외에도 다른 단서나 힌트가 나올지 모릅니다. 아마 다른 파티원들을 모두 불러 모으신 것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 같습니다. 정하얀 님은 충격받으실 걸 고려해 부르지 않으신 것 같지만. 후우….”
“그럼 일단 가시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게 더….”
“네.”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다리를 주먹으로 쳐가며 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간이 회의실 앞이다.
안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다른 모든 파티원이 도착하지는 않은 모양.
아마 지금쯤 전달받았을 테니 슬슬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쫓겨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길드마스터의 얼굴을 확인하자 김미영 팀장의 말이 맞았다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대장장이 유아영과 암살자 직군의 김창렬이 눈에 보였다.
고개를 숙이자 천천히 눈인사를 건네오는 게 시야에 비친다.
굳이 목소리를 내서 인사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파악한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본인들이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비교적 파란에 온 지 얼마 안 된 이들이었지만 심란해 보이는 표정은 길드마스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유아영 같은 경우에는 영입부터 파란에 적응하기까지 부길드마스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함께 들어온 동기 중에서는 가장 충격이 클 것이다.
그 옆에 앉아 있는 길드의 비서실장을 조혜진 님 역시 마찬가지고.
그나마 조금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평소의 표정과 다르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자리에 앉자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며 몇 개의 인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벌게진 눈을 한 박덕구 님과 마도학자 황정연 님, 창백해 보이는 표정의 한소라.
마찬가지로 반쯤은 넋이 나간 선희영 님과 기절한 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엘레나 님까지.
김예리 님과 안기모 님 역시 잠시 후에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분위기가 어두웠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잠깐의 침묵. 평소답지 않게 먼저 입을 연 것은 선희영 님이었다.
상당히 날이 선 것 같은 느낌은 항상 웃고 있던 평소의 표정과 대조적이다.
‘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라고 불리는 것이 이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얼굴이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멍청한 여자만 빼고 전부 모였네요. 아직도 질질 짜고 있는 건가요? 무능력한 쓰레기.”
“거, 인제 그만 좀 하쇼, 희영 누님. 심란한 건 이해하는데 그 누구보다 하얀이 누님이 더 슬플 거요.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한테 폭언을 퍼부은 것도 조금 너무 하다 싶었다니까. 누님다운 행동은 아니었소.”
“제가 흥분하지 않게 생겼나요? 차라리 그 여자가 잡혀갔어야 했는데…. 회의에도 불참하고 팔자도 좋네요. 누구는 그 여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사고 아니요. 나도 슬픈 건 마찬가지지만 하얀이 누님이 비난을 받을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니요.”
“글쎄.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명예추기경님이 괜히 그 멍청한 여자를 데려갔을까. 조금만 더 자기 임무를 자각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분명히 함께 나간다는 생각에 들떠서 본인의 임무가 뭔지 까맣게 잊은 거예요. 다들 어느 정도는 동의하실 거로 생각해요. 이기영 님은 조금 더 제대로 된 호위가 필요했어요. 그런 덜떨어진 여자가 아니라.”
“그건….”
“하얀 씨는 일부러 부르지 않았습니다/.(,)/ 희영 씨. 아무래도 아직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것 같아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니,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희영 씨가 뭘 말하고 싶은지는 확실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추후에 반드시 조치할 테니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태도는 앞으로의 작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
“…….”
“후우….”
“…….”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길드마스터 말대로 제가 조금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분위기를 흐리기도 했고요.”
“거. 사과할 정도는 아니요. 어째서 그렇게 날이 섰는지도 잘 이해하고 있고. 그보다 이렇게 모인 건 원정이 앞당겨지기라도 한 거요?”
“그건 아닙니다. 연방 탈환은 예정대로 일주일 이후에나 시작될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더 늦게 시작될 수도 있고요.”
“뭘 그렇게 꾸물거리고 있는 거요?”
“그래도 본래 예정된 시간보다는 많이 줄어들긴 했군요. 사전 조사에만 9일을 소비한다는 말에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만약 정말로 그렇게 일이 진행됐다면 나 혼자라도 연방으로 향했을 거요, 기모 형님.”
“최대한 당길 수 있는 만큼 당겨보도록 타국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있을 전투와 작전에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모이게 한 이유는 연방 쪽에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마력 홀로그램으로 보이며 기영 씨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본래는 보여드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최소한 여러분에게는 공유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고, 혹시라도 기영 씨가 뭔가 메시지를 숨겨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정말이요?”
“네, 그렇습니다.”
“아. 형, 형님이라면 분명히 뭔가 숨겨놨을 거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까. 우리 형님이야 항상 정신 차리고 있는 사람 아니요. 분명히 무슨 수를 강구했을 거라니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럼 마법 홀로그램을 재생하는 게…. 그나저나 그거 악마들이 보낸 건 확실한 거요? 혹시 형님이 이쪽에 보내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니까. 탈출에 성공해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장소에서 이쪽에 도와 달라는 종류의 메시지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빠, 빨리 틀어보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대충 알고 있다.
하지만 그나마 희망찬 생각에 조금은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한다.
정말로 저 말대로라면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마력 홀로그램이 켜지자 곧바로 침묵이 장내에 가라앉는다.
“아…. 아아….”
비틀거리던 엘레나 님이 다시 한번 혼절했을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
모두 말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마력 홀로그램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으로 끝.
“뭐, 뭐야. 저게.”
“…….”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두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 머릿속으로는 다들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가슴이 묘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으로 유추해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살아 있다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외관이었다.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뭐, 뭔,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
“아무나 뭐라 말 좀 해보쇼. 지금 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이 형님이 맞는 거요?”
“…….”
“저, 저게 우리 형님이라고? 정, 정말로 저게 우리 형님이라는 거요?”
“…….”
“형님일 리가 없다니까. 분명히…. 뭐, 분명히 형님은 아닐 거요. 더러운 악마 놈들이 조작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니까.”
[…….]
[반갑습니다. 여러분. 27군단의 만인장 중 하나이자 벨리알 님의 충실한 사도. 로노베라고 합니다.]
“…….”
[깜작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형태로 인사를 드리게 될 줄은 저 역시 상상하지 못했으니…. 사실 제가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된 까닭은 위대한 만마의 지배자 벨리알 님께서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전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
[쓰레기 같은 베니고어에게 선택받은 이 인간이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 하시기도 하고요. 당신들이 믿는 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능력한지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어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신과 가까워지는 게 얼마나 우매한 행동이며 위대한 벨리알 님의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주고 싶어 하신다는 겁니다.]
[으, 으윽….]
[이 멍청한 인간이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지 보일 거로 생각합니다. 이게 그 결과예요. 베니고어의 재림이라고 평가받는 이 멍청한 인간이 벨리알 님이 내민 손을 거절한 결과입니다.]
[아아악, 아, 기… 잇.]
[끝까지 신을 놓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는 이자를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얼마만큼의 쾌락에 허덕이고 있는지, 끝까지 타락을 거부하는 이 모습을 그 더러운 눈으로 직접 확인하셔야 합니다. 하핫.]
[아, 으… 아….]
[발버둥 치시고, 괴로워하고, 죽어 가라. 우매하고 더럽고 무능력한 인간들아.]
“…….”
[이 대륙의 빛이 꺼지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
[너희가 얼마나 무기력한지 몸으로 직접 깨닫거라.]
[대륙 위에 살아가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여. 우리는 너희의 공포이며.]
[적이며.]
[악몽이니라.]
“…….”
“…….”
“…….”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