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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87화 (484/1,590)

# 487

회귀자 사용설명서 487화

클리셰(1)

“고생하셨습니다. 로노베 님. 기가 막힌 연기였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의 공포이며 적이며 악몽이니라.’ 키야. 100점 만점에 110점을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부, 부끄럽네요. 제가 뭘 고생했나요. 모두 이기영 님 덕분인데요. 만들어주신 그림에 숟가락만 살짝 얹었을 뿐이에요. 대본도 전부 다 작성해 주셨고.

“대본이야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걸 잘 소화해내신 게 로노베 님의 능력입니다. 함께 일할 수 있어 얼마나 영광인지 제 가슴을 열어 보여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니요. 오히려 저 같은 악마에게 이렇게 커다란 배역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후훗. 그보다 한 잔 더 드세요. 안주도 같이 드시고요. 아~ 하시죠.

“하핫. 그렇게 챙겨주시지 않더라도 제가 알아서 잘 먹고 있습니다. 로노베 님.”

-호, 혹시 부담스러우신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자꾸 제게 감사하다고 하시니 여러모로 민망합니다. 물론 제가 배역을 드린 것은 맞지만 로노베 님께서 가장 어울리실 거로 생각했을 뿐,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쓰레기 같은 베니고어라고 발언하셨을 때는 어찌나 제 속이 통쾌하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지 뭡니까.”

-후후훗. 저에게 대륙인들 앞에서 베니고어를 모욕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뿐인걸요. 아시다시피 제 생김새가 악마답지 않아서 현 차원에는 인지도가 거의 없다시피 했었는데 이걸로 조금이나마 이름이 알려질 것 같아 기쁘답니다. 베니고어의 재림이라고 불리는 이기영 님을 고문하는 척하는 것도 짜릿했고요. 대륙의 버러지 같은 인간들의 머릿속에 틀림없이 제 이름이 각인됐을 거예요.

“하하하.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로노베 님은 언젠가 대륙에 공포심을 심어주는 훌륭한 악마가 되셨을 겁니다. 그동안 기회가 적었을 뿐입니다. 최근에 악마들을 소환할 구역질 나는 인재들이 줄기도 했고요. 이번 일만 잘 끝난다면 제가 전문적으로 흑마법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으세요. 물론 저희한테 감사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이기영 님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무리한 부탁을 드릴 수는 없죠. 후훗. 다시 생각해도 너무 기분 좋네요.

“저 역시 기분 좋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림이 완벽한 것 같습니다.”

-저보다는 뒤에서 괴로워하시는 이기영 님의 연기력이 발군이신걸요. 역시나 벨리알 님도 감탄할 만큼 구역질 나는 영혼을 가지고 계신 분다워요. 그, 그보다 이기영 님께서는 언제쯤 언제쯤 올라오시나요?

“아, 아직 계획은 없습니다. 벨리알 님께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주신다고 하셨지만, 아무리 빨라도 약 2,000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로노베가 명예추기경님께 관심 있는 모양입니다.

“발리토스 님. 농이 지나치십니다. 하찮은 필멸자에 불과한 인간에게 27군단의 만인장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니. 저야 감사한 일이지만 로노베 님께서 불편해하시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하하핫. 어찌 이기영 님을 하찮은 필멸자라고 칭하겠습니까. 지금이야 그 보잘것없는 육신을 걸치고 계시지만 어차피 이후에는 함께 움직일 동료가 아닙니까. 어쩌면 제가 이기영 님을 모시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륙에서 쌓아온 이기영 님의 업적이라면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500위권에도 진입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조금 더 업을 쌓으신다면 100위권에 진입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왜 자꾸 동료 취급하고 그래. 니네….’

“크흠.”

-혹시라도 나중에 잘 올라오시면 저 발리토스의 이름을 절대로….

“아이고 제가 어찌 발리토스 님의 이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약소합니다만 선물입니다. 마음이라고 생각하시고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뭐 이런 걸 또….”

-취향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천천히 확인해 보시지요. 아마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저도 약소합니다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아 리무르아 님. 리무르아 님까지 이러시면 제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부디 받아주세요. 제가 너무 감사해서 드리는 선물이니까요.

“자꾸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저도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조금 좋으련만. 아쉽게도 생활 기반이 전부 다른 곳에 가 있어서….”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기영 님이 저희 27군단과 함께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희에게는 커다란 선물이니까요.

-리무르아의 말이 맞습니다. 하하핫.

“이렇게 저를 치켜세워 주시니 정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하.”

‘여기가 천국이네. 여기가 천국이야.’

한창 정신없을 파란의 멤버들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확실히 천국이라고 할 만했다.

눈앞에 있는 온갖 산해진미와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술이 마치 산처럼 쌓인 모습을 보니 이곳이 주지육림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겉모습은 조금 흉측하지만 앉아 있는 의자 역시 무척 푹신푹신했고,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주는 시녀들의 솜씨는 전문 마사지 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대접받는 것은 이미 예상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대접받고 있는 상황.

괜찮은 배역을 받아 기분이 좋았는지 로노베가 연신 음식을 떠먹여 주는 호사까지 누리고 있었다.

뒤쪽에서 대기 중인 선물은 또 어떠한가. 대륙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진귀한 보물의 가치는 값을 따질 수도 없다.

‘이건 나중에 성과라고 구라 치고 가져가면 되는 거고….’

나중에 정말로 지옥에 올라가도 크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베니고어와 엘룬 쪽에서 뭘 제시할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하게 금욕적인 생활을 즐기는 것보다는 스펙타클한 악마의 생을 즐기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베니고어는 내게 책임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벨리알 님께서는 달콤한 술과 금은보화를 내려주신다.

뭐가 더 끌리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위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아직은 설레발이기는 하다.

하지만 베니고어가 이쪽을 서방님으로 모시며 평생을 종처럼 살아가겠다 다짐하지 않는다면.

아니,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벨리알의 진영으로 가는 게 더욱더 이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중 일을 고민해 봤자 뭐 하겠어.’

일단은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옳다.

첫 번째 인트로 영상을 아름답게 마무리한 회식 자리에서 조금 신경 쓰였던 것은 아무래도 리무르아의 표정이다.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로노베를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로노베가 괜찮은 배역을 맡은 것을 약간 질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혹여나 이대로 자신이 팽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직 배역이 전부 나오지는 않았으니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너는 벨리알 픽이니까 믿고 가도 된다, 리무르아야. 말을 해도 믿지를 못해.’

기본적으로 불신과 의심이 장착된 훈훈한 모습.

마치 여배우들이 기 싸움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옆에서 로노베가 먹을 걸 떠먹여 주면 바로 반대쪽에서 리무르아가 비워진 잔에 술을 채운다.

그녀들 뿐만이 아니다.

남자 놈들의 상황도 그다지 다르지는 않다.

얘네 둘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기는 했지만, 선물을 빙자한 뇌물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이번 기회를 얼마나 황금 같은 기회로 여기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이미 대충 정하기는 정했는데.’

살 놈과 죽을 놈. 팽할 놈과 위로 올라갈 놈을 대충 분류해 놨다.

벨리알의 입김이 살짝 들어갔지만, 나로서도 굳이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나마 온건파라고 분류할 수 있는 27군단의 썩은 달걀을 제거하는 작업이었으니까.

‘벨리알이 확실히 합리적이기는 해.’

황금알을 낳는 닭을 키우는 쪽과 배를 가르는 쪽. 둘 중 어느 쪽의 이득이 더 클지는 불 보듯 뻔하다.

어떻게 생각해도 강경파는 한탕 치고 빠지자는 한탕주의다.

대륙을 관리해야 하는 나로서도 후자보다는 전자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은 거지, 뭐.’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다짐했던 게 불과 몇 분전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2,000년 후에 벨리알과 함께 활동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미리미리 잘 보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슬쩍 반대편 끝쪽을 바라보자 현재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홀로 술을 홀짝이고 있는 녀석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27군단에 어울리는 녀석은 아니다.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 녀석.

머리 위로는 여섯 개의 커다란 뿔이 자라 있었고 눈동자는 네 개.

커다란 도끼를 애인처럼 옆자리에 두고 있는 모습은 문신보다는 무신으로 보인다.

살랑거리는 얇은 꼬리와 작은 날개를 머리 위에 달고 있는 음마 로노베.

얼굴만큼은 여신처럼 아름다운 촉수녀 리무르아.

후덕해 보이는 발리토스 같은 악마들과는 분위기부터 다르다.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악마 서열 1,256위 도노반.’

소중한 파란 파티원들의 경험치 공급원.

‘준 신화급의 강자이기는 해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리무르아나 로노베 같은 이들이 조금 더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힘으로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것보다 머리를 쓰는 쪽이 더 까다롭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정하얀과 김현성, 차희라와 엘레나가 동시에 등판한다면 어렵기는 해도 이겨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 너네들 생각해 주는 건 나밖에 없다, 야.’

간혹가다가 가슴 아프게 만들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모든 게 길드를 위한 커다란 그림이 아닌가.

너무나 커다란 그림에 도화지가 찢어질까 걱정이 되지만, 일단은 모든 게 생각대로 진행 중이다.

‘연방 탈환작전까지는 한 일주일 걸릴 거고.’

아마 마력홀로그램을 보고 애가 탔을 테니 이틀 정도 단축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방 놈들 하는 걸 생각해 보면 일주일이 더 걸릴 수도 있고.

극단적인 수단이라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아니,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해도 이 정도 기간을 단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헛기침을 한 번 하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이 나올 거라는 걸 눈치챈 것이리라.

“큼, 큼….”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딱히 할 말이라기보다는 전달해 드려야 할 사항이 있어서…. 아마 내일부터는 간단한 개별 인터뷰가 진행될 것 같습니다.”

-아….

“본격적으로 배역 배정에 들어가야 할 시기라…. 사실은 조금 더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 게 맞지만 벨리알 님께서는 모든 분께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 주고 싶으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벨리알은 나한테 밥 한 번 사야 한다. 진짜.’

“역할마다 비중은 다르지만 그래도 모든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죠. 중요하지 않은 역할이 어디 있나요. 그, 그래서 지원할 수 있는 배역은 뭐가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여기에서 전부 다 말씀드리기에는 조금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가장 비중 있는 자리만 먼저 공개하자면 아마 사천왕이 될 것 같습니다. 악마 4대 장군으로서 가장 가까이에서 벨리알 님을 보필하는 무게감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사천왕….

-사, 사천왕….

‘얘네들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조금 클래식하지만 마왕 강림에 사천왕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클리셰가 잘 먹히는 건 이유가 있다.

“아, 그전에 로노베 님 오늘도 영상 하나만 더 찍고 가시죠. 이번에는 조금 더 지독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핫!”

-저야 영광이죠!

물론 마왕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는 클리셰 역시 정석 중의 정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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