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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88화 (485/1,590)

# 488

회귀자 사용설명서 488화

클리셰(2)

‘왕도는 무너지는 일이 없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 후보 중에서도 굳이 이번 클리셰를 선택한 이유였다. 왕도는 무너지는 일이 없다.

괜스레 상황을 꼬이게 하느니 이미 검증된 시나리오를 밀어붙이는 편이 더 안전하다.

27군단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번 일은 나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

걸린 게 커다란 만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대충 정리해도 이번 프로젝트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다.

현 상황에서 가장 급한 일 중 하나인 베니고어의 파산 문제만 봐도 그렇다.

‘이건 벌써 효과를 보고 있으니까. 내 생각이 틀리지는 않은 거지, 뭐.’

대륙에 악마 군단의 일부분이 소환된 전대미문의 상황이다.

몇 차례 보냈던 영상은 어느새 대륙 전체에 뻗어나갔고 그에 호응하듯 이미 여러 기사가 대륙 전역에 나돌기 시작했다.

[명예추기경 납치사건의 전말. 바젤 교황, 그 어느 때보다도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한 때.-린델 일보 김성경 기자.]

[광장에서 열리는 기도회. 바젤 교황의 눈물.-교황청 소식]

[교국의 지도자 오스칼, 대륙의 악마가 사라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교국일보]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골든타임은 길어야 10일로 추정. 파란의 김현성 길드마스터, 절대로 구해내겠다는 뜨거운 다짐.-대륙신문]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지난 생애 재조명. 연방민들을 돕기 위해 내려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실리아 주간일보]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 악마 소환사 진청. 두 명의 대륙 공적이 원하던 결과.-교국신문]

[대주교 제이나, 베니고어 님이 도움을 주실 거라 믿어. 현 시간부터 작전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대륙 전역에서 기도회를 열 예정.-교국신문]

두말할 필요도 없이 훈훈한 소식이었다.

사실 교국에서 기도회야 매일 열리기는 하지만, 침공 전과 침공 후의 퀄리티가 같을 리 만무하다.

일반 교국민들부터 사제들까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릴 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베니고어가 그 영향을 받게 될 거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고.

자그마치 대륙 전체에서 한꺼번에 시작되는 기도회란다. 효과가 없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라는 거다.

파산상태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얼마만큼의 신성이 필요할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회복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상황.

겨우 이것뿐만이 아니다.

정하얀의 목줄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소소하게 느껴질 지경.

김현성의 의심을 완벽하게 벗겨내는 것은 물론 일이 끝난 이후에는 회귀자라는 고백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혹시나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밝혔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따위의 뜨거운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번에야말로 서로 밀려 있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이 된 것은 당연하다.

‘얘들 레벨업 시키는 건 덤이고….’

적폐 청산도 하고 군단 내 강경파들을 모조기 제거해 안정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도 있다.

이번 일에 사활을 걸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와는 조금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27군단 내에 있는 만인장들도 필사적이다 보니 서로가 시너지 효과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천왕이 그리 좋더냐….’

목숨 걸고 이쪽에 달라붙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

얼굴에 알 수 없는 비장미까지 서린 만인장들과 함께한 어젯밤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였다.

갈 땐 가더라도 사천왕 한 번은 하고 가고 싶다는 열망들이 가득했던 얼굴들.

물론 멍청한 도노반 새끼는 빼고. 사실 욕심이 아예 없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인간 놈의 장단에 맞춰주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강했다.

‘멍청해 가지고….’

시대에 흐름에 탑승하지 못한 꼰대의 마지막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으니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녀석은 사천왕으로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현재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머리에 근육만 찬 멍청한 새끼 꼬드기는 건 일도 아니지.’

벨리알이 도움을 준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일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녀석의 프로필을 바라보며 괜스레 입꼬리를 올리던 그때였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익숙한 인형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바야흐로 배역 결정전이 시작된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중요한 프로젝트의 첫 번째 단추인 만큼 진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참가번호 1번.”

-네. 참가번호 1번 리무르아입니다.

조금은 불안한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의 그 촉수녀였다.

너무 긴장한 것 같은 모습에 제 실력을 보이지 못할까 걱정됐다.

적절한 말을 건네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리무르아 님. 말씀드렸다시피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형식적인 절차일 뿐입니다. 편하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아. 그 전에 여기 설문지도 좀 작성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애초에 성향 따위는 전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확인과정은 거쳐야 한다.

잘 만들어진 설문지에 올바른 답을 적는 리무르아를 보니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어디 보자. 역시나 사천왕에 지원해 주셨군요. 그것도….”

-제가 소화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첫 등장의 임팩트를 생각해 보면 다른 배역들은 충분히 소화하실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다만 이 역할은 다른 역할들보다 조금 더 연기력이 있어야 하는 편입니다. 이런 역할을 맡기에는 리무르아 님이 너무 아름다우시기도 하고….”

-칭찬 감사드립니다. 이기영 님. 너무 기쁘네요.

“끄응. 차라리 다른 쪽으로 지원해 주셨다면 오히려 쉽게 통과하실 수 있으실 텐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자, 그럼 한번 봅시다.”

벨리알 픽으로 분류할 수 있는 내정자, 리무르아.

거짓과 선동의 군주인 녀석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믿음이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중요 배역에 박을 수는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까.

‘정 안 되면 비중 없는 사천왕에라도 박아놔야지 어쩌겠어.’

특혜 논란이 일기야 있겠지만 그래도 벨리알 픽이 아닌가.

모 방송국에서 방영된 아이돌 데뷔 프로그램처럼 어느 정도의 억지는 부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커다란 기대감은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뒤바뀐 분위기에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흡입력 하나는 이제 프로 배우로 발돋움하고 있는 안기모와 김예리에 감히 비견될 만했다.

진짜 연기자가 연기를 시작할 때는 공기 자체가 뒤바뀐다고 하던가. 딱 그 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흡입력 있네. 리 배우. 아주 훌륭해. 훌륭해. 키야. 이런 보물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거야.’

마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마력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아우라다.

-내, 내가, 내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내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호흡 좋고, 발성 좋고.’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벌레 같은 인간 놈들! 우리 27군단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언젠가 이 대륙에 다시 돌아와 너희 미개한 인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통에 허우적거리게 할 것이다. 너희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평생 영겁의 불구덩이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내 말을 잊지 마라. 벌레 같은 인간들아. 우리는.

‘어우, 눈빛 봐. 왜 이렇게 섬뜩해?’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목소리도 듣기 꺼림칙하고.’

-벌레 같은 인간 놈들을 모두 밟아 죽일 때까지 27군단의 리무르아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야!!! 네놈들을 전부 다 찢어 죽일 것이야!!!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어어어어!!!

마치 가시를 한껏 세운 고슴도치처럼 촉수를 세우고 있는 모습.

눈에서는 핏물이 흘러나오고 분노로 인해 온몸이 파르르 떨린다.

입술을 꽉 깨물었는지 입가에서도 피가 나온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모습이다. 이거 조금….

‘정하얀 같은데.’

극대노를 맞이했을 때의 정하얀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전에 그녀와 부딪쳤던 게 확실히 도움이 된 모양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하얀의 모습을 벤치마킹한 것처럼 느껴졌다.

원정대에게 질릴 정도의 공포를 전해야 하는 배역이니만큼 리무르아의 외관으로는 무리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쪽의 예상을 완벽하게 뒤엎어 버렸다.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킨 것은 물론 곧바로 손뼉을 치기 위해 손을 움직인다.

“완, 완벽했습니다. 와…. 살기와 마력을 뿌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니. 솔직히 리무르아 님의 외관으로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정말로요.”

-그… 게 정말입니까?

“네.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어째서 벨리알 님께서 리무르아 님을 그렇게 신임하시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인제 보니 이거 27군단의 보물이셨군요.”

-부, 부끄럽습니다. 이기영 님. 사실 그때 봤던 미친 여자에게 조금 힌트를 얻었을 뿐이라.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그걸 소화해낸 리무르아 님의 연기력 아니겠습니까. 이건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딱히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네?

“하하하. 조금 이른 것 같은 타이밍이지만, 이 배역은 리무르아 님을 위해 준비된 배역인 것 같습니다. 사실은 다른 분들과도 면담을 진행해야 하지만, 더 이상 두고 볼 필요도 없어 보여서…. 네. 캐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갑시다.”

-꺄악! 감사합니다!

평소답지 않게 짧게 비명을 질리는 모습에는 괜스레 내가 더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조금씩 조금씩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하는 프로젝트에 괜스레 훈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에 불과했다.

‘하….’

-뭐, 뭐, 뭐, 뭐라고?

정하얀처럼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녀석부터.

-녀석은 사천왕 중에 최약체였을 뿐이다. 겨우 녀석을 처리하고서 너무나도 기고만장한 것이 아닌가?

딱딱한 발음으로 국어책을 읽는 녀석까지.

주연급 배우들의 연기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조연이 없으면 주연도 살 수 없는 법이다.

안기모와 김예리, 박덕구라도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현재의 심정이 어떨지 다른 표현이 필요 없었다.

“참가번호 34번.”

‘지뢰!’

“참가번호 49번.”

‘넌 안 되겠다.’

결국에는 나머지 사천왕의 비율을 줄이는 것까지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사천왕 내정자 중 하나인 도노반이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묵직하기로 소문난 녀석이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일을 반길 리 없었으니까.

‘어디 보자….’

“참가번호 56번. 아… 이거 도노반 님이셨군요. 어서 들어오시죠. 도노반 님. 이렇게 참가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 또 영광입니다요. 오늘도 역시나.”

-그만. 그 더러운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그만 놀리는 게 좋을 거다. 벌레 같은 인간.

“…….”

-나는 네놈의 그런 어린애 같은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다. 벨리알 님께서 네놈과 개인 면담을 진행해 보라고 말씀하셨기에 들어왔을 뿐이다. 면담이나 오디션 같이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를 할 생각도 없고, 네놈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 생각도 없다.

‘이… 개 같은 새끼.’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 더 비협조적인 모습. 주먹이 꽉 쥐어졌지만, 일단은 기분 좋은 척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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