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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89화 (486/1,590)

# 489

회귀자 사용설명서 489화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1)

-구역질 나는 놈.

27군단의 암 덩어리 도노반. 전형적인 무신이며 타협을 모르는 전사.

현재는 27군단이라고 불리는 벨리알 군단의 초기 멤버.

개인적으로는 가장 내가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리무르아나 로노베, 발리토스 같은 이들과는 달리 성향 자체가 벨리알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녀석을 봤다면 녀석이 27군단의 멤버라는 것 자체에 의문을 느꼈을 것이다.

이 도노반이라는 희생양은 그만큼 이 군단과 동떨어진 녀석이었다.

하지만.

‘다 과거의 업이지. 과거의 업이야.’

이건 모두 과거의 업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27군단이 떡상하기 전에 벨리알이 68군단의 수장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72군단의 끝자락, 강등권에 걸쳐져 있는 프로축구팀마냥 필사적일 필요가 있었을 거다.

72군단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마 더 했을 거고.

아마 물불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성향에 맞지 않은 이들을 영입하며 덩치를 키웠을 것이 분명했다.

군단이 아직 어수선한 것은 분명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얘가 이래서 쓰레기야….’

벨리알의 인성이 분리수거 안 되는 폐기물 수준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 당연했다.

‘이제 덩치는 커질 만큼 커졌다, 이거지.’

강등권에서 벗어나 27군단으로 날아올랐으니 덩치보다는 퀄리티에 집중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이제 좀 자기 색깔을 군단에 물들이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지금껏 고생해 준 부하들을 팽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쓰레기 같지 않은가.

뭔가 나름의 이유가 있기야 하겠지만, 지 손으로 팽하는 그림은 조금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이쪽을 이용하려고 하는 심보마저 완벽한 쓰레기 그 자체.

아직 나는 멀었다는 생각에 힘껏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넓고 쓰레기는 많다.

빛기영이 아직 완벽하게 어둠에 휩싸이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나야 뭐, 꿩도 먹고 알도 먹고 개이득이기는 한데. 솔직히 조금 불쌍했는데 이제는 불쌍하지도 않다, 야.’

챙길 것도 다 챙겼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형식적인 자리를 빠르게 해결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슬그머니 입을 털 준비를 마치자 여전히 짜증 난다는 듯한 도노반의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쉬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천천히 가봐야지, 뭐.’

이 적폐 오디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주연급 배우, 도노반.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갈 생각이니 내 앞에서 그 더러운 입을 놀리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인간.

“…….”

-솔직히 너 같은 쓰레기가 벨리알 님의 옆에 있는 것도 편치 않아. 지금 당장에라도 그 여리디여린 목을 비틀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

최대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응대를 하려고 했지만, 이쪽의 미소가 무색해질 정도로 적의를 보내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녀석의 몸에서 삐져나오기 시작한 살기에 솔직히 방을 박차고 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미 예상했던 바다.

솔루션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나가자 조금은 의외라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설문지는 작성해 주셔야 합니다, 도노반 님. 벨리알 님께 도노반 님이 이곳에 왔다는 증거를 만들어놔야 하니. 애초에 도노반 님께서 이번 프로젝트를 반기지 않을 거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요.”

-네가 나를 우습게 본 모양이군. 내가 분명히 그 더러운 입을 놀리지 말라고!

“합격입니다.”

-뭐?

“합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도노반 님.”

-아무래도 네가 정말 주제 파악을 못 하는 모양이군. 벨리알 님을 믿고 있는 거라면 오산이다, 인간.

“아니요. 아닙니다. 도노반 님. 저는 항상 위대하신 만인장분들의 말씀을 가슴속에 새기고 또 새기고 있습니다요. 제 주제 역시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가 방금 도노반 님께 합격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제 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벨리알 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주시옵소서.”

-그게… 무슨 소리지?

“도노반 님께서는 현재의 27군단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멍청한 새끼 하나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죠.’

-그러니까 지금 무슨 개 같은 소리를 하는 건지 묻지 않았나.

“제가 드린 질문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도노반 님 흥분하지 마시고 잠깐만 이 필멸자와의 대화에 호응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도노반 만인장님께서는 현재의 27군단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

“아마 정답을 알고 계실 겁니다. 현재의 27군단은….”

-…….

“유약하지요.”

-유약하지 않다. 감히 네가! 27군단의 강함을 네 잣대로 평가해?

“무력을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정신적인 부분입니다. 아주 예전, 벨리알 님께서 이제 막 72군단의 좌에 오르실 때의 27군단은 분명히 이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투지 넘치고 용기 있는 전사들과 함께 싸우고 피와 살육이 끊이지 않던 과거의 27군단은 지금보다 덩치가 작을지언정 강하며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가 무얼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쓰레기 같은 인간이….

“하지만 요즘 젊은 악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광스럽고 피와 내장이 난무하는 전쟁보다 계약과 실적에만 집중하는 영업사원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항상 트랜드라는 건 변하는 법이니까요. 무엇이 더 쉽고 안전한 방법인지 깨달은 것뿐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과거 영광의 살아 있는 주역이신 도노반 님 같은 진짜 전사분들의 성에는 차지 않으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벨리알 님은 중도의 길을 걷자고 하십니다.”

-뭐?

“강경파와 온건파의 조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으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

“벨리알 님 역시 그때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도노반 님.”

슬그머니 녀석의 얼굴을 확인한 것은 당연했다.

악마답지 않게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자세히 뭘 느끼는 건지는 내 알 바가 아니지만 무언가 감정이 북받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악마도 눈물이 나오는구나.’

‘울어서 네 순수를 증명해 봐!’라는 어딘가의 명대사를 써먹을 수 없어 약간 가슴 아프기는 했지만,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대화에는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27군단은 어떻게 봐도 온건파가 우세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벨리알 님께서는 육체적 능력이 미약한 악마들을 가엾게 여겨 그들을 들이시고 키워주셨지만 그다지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젊은 악마들이 현재의 27군단을 이끄는 주축세력이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그들로 인해 영광과 명예를 잃어가는 군단에 대해 고민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물론 최근 도노반 님의 심정도 이해합니다.”

-…….

“불만이 많으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정점에 올라서면 여러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27군단이 현재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분을 너무 원망하지 마십시오.”

-나는 단 한 번도 벨리알 님을 원망한 적이 없다.

“벨리알 님이 도노반 님을 이번 계획의 핵심으로 삼으신 것과 비밀리에 이걸 전하라고 하신 것은 모두 이러한 연유입니다.”

-…….

“도노반 님을 비롯한 군단 내 강경파들에게 힘을 실어 리무르아나 로노베, 발리토스 같은 악마들과의 균형을 맞추고 싶으신 겁니다. 벨리알님께서는 이후 자신을 보좌할 사천왕에 도노반 님을 들이고 싶어 하고 계시며 이번 계획이 바로 중도의 길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제 말이 거짓 같으시다면 직접 벨리알 님께 확인과정을 거치셔도 됩니다. 도노반 님.”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그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벨리알 님의 모습이었으니. 중도의 길…. 중도의 길이라.

“이번 발걸음은 개인에게는 아주 작은 발걸음이지만 27군단이 한 계단 올라가게 될 의미 있는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도노반 님. 부디, 제 제의를 받아들이신 이후, 27군단에는 도노반이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시지요. 도노반 님이야말로 이번 작전의 핵심이며 모든 것입니다.”

-…….

“벨리알 님의 뜻입니다. 도노반 님.”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녀석이 시야에 비친다.

‘걸렸나.’

라는 생각을 아주 잠시 해봤지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갈 리 만무하다.

무려 벨리알을 팔아먹었으니 의심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너.

“예.”

-생각했던 것보다 썩은 인간은 아니로군.

“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대 역시 같은 생각인가.

“어딜 제가 뜻이 있겠습니까. 벨리알 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필멸자에….”

-나는 너 역시 같은 생각이냐고 물었다, 인간.

“물론입니다.”

-…….

“벨리알 님이 걸으려고 하시는 중도의 길은 절대 쉽지 않겠지만, 만약 27군단이 중도를 걷는 군단으로서 자리매김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하는 것은 물론, 정체된 지옥에 새로운 활력과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강경파와 온건파 그리고 중도. 지금껏 둘로 분류되어 있던 지옥의 세력 구도를 단숨에 세 개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하삼분지계입니다.”

-천하… 삼분… 지계….

“27군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옥의 중심이 돌 것입니다. 도노반 님의 그 검.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기영 코인 떡상하나요!’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내부 평가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것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한다.

우물쭈물 무언가를 말하는 모습은 귀엽기보다는 무섭다.

녀석이 갑작스레 주먹을 뻗어온 것은 바로 그때.

‘이 개새끼 미쳤나.’

순간적으로 무척이나 놀랐다.

하지만 그 주먹이 무척이나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는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게다가 식은땀까지 흘리며 힘 조절을 하는 모습.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으로 개미를 눌러 죽이지 않고 터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라 조심스레 팔을 드니 아주 약간의 충격이 느껴졌다.

‘뭐 하자는 거야. 이 미친놈이.’

쑥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주먹을 나누면 친우다.

‘아…. 아직도 이런 쌍팔년도 감성을 못 버리니까 팽 당하지요.’

“영광입니다.”

-2,000년이라. 생각보다 길군, 함께 싸울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인간, 아니, 내 친우여.

미안한 소리지만 그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새끼는 이번 전쟁에서 불행한 사고로 죽을 테니까.

‘못난 친구를 둔 도노반에게 미안하네.’

사과의 의미로 가장 멋지게 산화하는 모습을 그려주리라.

그렇게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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