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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92화 (489/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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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 492화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4)

솔직히 몇 마디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당연했다.

오늘따라 가면쓰레기 진청의 마지막 대사가 뇌리에 강하게 틀어박혔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여기까지 온 이상 칼이라도 뽑아야 한다.

자그마치 벨리알이 이쪽을 배려해서 만들어준 자리다. 영광스럽다는 얼굴로 열정적인 표정을 선보여야 옳다.

거짓과 선동의 악마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쪽을 단상에 세웠을 리 없다. 분명히….

‘원하는 게 있기야 있겠지.’

악마 군단에게 인사를 하고 사기를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벨리알이 가장 가려워할 곳을 긁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다시 한번 조심스레 입을 열자 커다란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총책임자를 맞게 된 여러분의 영원한 우방, 여러분의 영원한 친구,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27군단의 외부고문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이렇게 자리를 꽉 채워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먼저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

다행히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우리는 커다란 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네. 커다랗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앞으로 27군단이 더욱더 성장하게 될 분기점이며 한 단계 더 도약할 커다란 기회입니다. 아마 의문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어째서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면서까지 이번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는 이번 일에 어째서 이렇게까지 심력을 쏟는가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아무 생각 없이 함성을 지르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긍정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녀석도 있다.

벨리알이 이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여 이쪽의 말에 호응했을 것이다.

당장 도노반만 하더라도 박수를 보내고 있을 뿐 표정 자체는 무표정.

녀석이 보기엔 이 모든 게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맞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법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있어야 조금 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임할 수 있는 법입니다. 물론 우매하고 또 우매한 이 필멸자가 지옥을 드높이시는 악마분들께 이런 설명을 드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시각도 분명히 존재할 거로 생각합니다. 때로는 저 아래에서 보는 관점 역시 가치가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옳다! 옳소!

-최근 27군단은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무려 41계단이나 상승해 72군단 중에서도 27의 좌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인지하고 계시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앞으로 27군단이 어떤 행보를 걷느냐에 따라 27군단이 더 발전할 수도, 더 퇴화할 수도 있습니다. 만마의 지배자이신 지고의 벨리알 님 역시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우매한 필멸자에게 이번 일을 맡기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이 자리에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 하나입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

-네. 그렇습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입니다. 여러분들은 악마답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무엇이 악마다운 것인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들을 학살하며 개돼지처럼 도살하는 것이 악마다운 것이 아닙니다. 커다란 천재지변을 뿌리고 마냥 고통을 주는 것만이 악마다운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파괴와 폭력을 일삼는 것이 악마라면 악마와 몬스터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

-방금 말씀드린 행동은! 지능이 없는 몬스터들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단순한 파괴와 폭력과 학살은 무능한 인간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그들에게 공포심을 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짐승들의 방법이지, 우리 영광스러운 악마들이 지향해야 할 방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성숙한 악마로서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덜 진화된 것들과의 차별점을 둘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는 녀석은 없었다. 입술을 달짝이고 있기는 했지만 아마 입을 열 수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답은 뻔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개체 수가 줄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합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

-대륙에는 이런 격언이 있었습니다. 부랑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금화를 주는 방법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금화를 벌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번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이 우매한 필멸자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공포를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포심을 느끼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

-격변하는 인간 사회에서 27군단 여러분이 한 단계 더 발돋움할 방법은 오롯이 그것뿐입니다. 무리하게 공포를 새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27군단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인간들을 몰살시키는 것보다 여러분들의 신화와 이야기를 그들의 자손의 자손이, 그 자손의 자손이 대를 이어 입으로, 입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하셔야 합니다.

-…….

-죽음으로 얻는 공포는 한순간이지만, 이야기로써 전해지는 공포는 몇 세대를 걸쳐 유지됩니다. 대륙에서 부당한 일에 휘말려 개인적인 복수를 염원하는 몇몇 이들은 여러분들의 신화를 기억하며 여러분들을 소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여러분들이 두려워 제대로 잠이 들지 못할 것입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평생 악몽에서 살게 될 것이고 인간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여러분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

-그들의 공포를 관리하십시오. 스스로 격을 낮추지 말고 진정으로 그들의 위에 서야만 합니다. 균형을 맞추며 그들의 발전에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만들어낼 인간 군상을 위에서 바라보며 비웃어줘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걸 자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여러분은 대륙의 상처이며 영원한 악몽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 대륙이, 이곳에서 살고 있는 모든 지적 생명체들이, 심지어 멍청한 베니고어와 비정한 엘룬 쓰레기마저, 여러분을 기억할 것입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 여러분은 몬스터가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일부 멍청한 강경파 악마들과도 다릅니다. 거짓과 선동으로 인간들을 속이고 기만하며 그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그들을 관리하는 악마입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입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

‘어우야. 이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좋아.’

온건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조금 질릴 정도였다.

처음처럼 형식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일부 뒈질 악마들을 제외한 모두가 목이 터지라 환호성을 보내고 있었다.

‘히야….’

교국의 강단에 서서 베니고어의 이름을 외칠 때와 비슷한 열기에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

심지어 속으로 강경파라고 분류하던 몇몇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벨리알 역시 마찬가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박수를 보내고 있는 모습에는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히야. 이거 실수 한 번 정도는 눈감아주겠네.’

27군단을 하나로 묶는 위대한 과업. 아주 조금이지만 그 과업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쯤 되니 이쪽도 점점 더 힘이 나기 시작한다.

-이기영은 27군단을 불어온 변혁의 바람이다!

-이기영 님을 위하여!

-저 역겨운 영혼을 보라!! 어찌 저것이 인간의 영혼이란 말인가!!!

-지옥에 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외부고문!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데 힘이 나지 않을 리 없다.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자 마치 쥐 죽은 것처럼 보이는 장내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들 아시고 계실 겁니다. 불과 몇 시간 전 멍청한 인간 놈들이 스스로 벨리알 님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41, 42, 43거점을 차지한 벌레 같은 인간들은 벨리알 님의 영역이었던 곳에 장벽을 세우며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아 이곳을, 아메라를 공략하려 합니다. 더러운 베니고어의 빛을 뿌리며 다가오고 있습니다. 네. 이제 시작입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현재까지 저는 여러분들이 쉬거나 다른 일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

-바람 소리와 스산한 빗소리가 항상 제가 자리해 있던 집무실을 때렸었지요. 폭풍전야. 지옥에서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일부 악마들은 쓸데없는 일이라 이번 프로젝트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

-우리가 옳은지 저들이 옳은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입니다.

-…….

-우리가 허접한지, 그들이 허접한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입니다!

-…….

-보여줍시다. 지난 시간이 쓸데없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걸 우리가 직접 증명합시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출진. 출진입니다!!

귀를 찢을 것 같이 들리는 거대한 함성.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군단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도노반 역시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있는 모습.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리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는 법이다. 슬쩍 벨리알을 바라보자 녀석이 군단을 향해 입을 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사천왕 도노반은 지금 당장 병력을 이끌고 공포가 무엇인지 그들의 뼈에 새기고 오라.

-명령을 받듭니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이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니 벨리알 역시 기분 좋다는 듯 어깨를 두드려왔다.

‘나쁘지 않아. 상황은 진짜 괜찮아.’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어떻게든 수습한 것 같은 느낌.

도노반 녀석이 적당히 어그로를 끌어주며 실적을 올려주다 적당한 시점에 리타이어하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상황이다.

워낙 거친 녀석이니 사상자야 조금 생길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쓸모없는 연방 놈들이 이번 작전의 표적인 만큼….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지친 녀석을 상대로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막타를 먹으면 끝.

적당히 시간도 벌고, 벨리알도 좋고, 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게 되는 아름다운 상황에 기분 좋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일이 조금 꼬였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정확히 8시간 후였다.

‘현성이랑 니네가 왜 거기 있어? 도노반 안 잡고 뭐 해?’

도노반이 27군단과 함께 대륙 연합의 거점을 타격한 이후, 파란을 포함한 4국 연합이 거점을 빠져나온 게 보였던 것.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도노반 패싱.

‘김현성 너 이 새끼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정확하게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정황은 이랬다.

김현성이 연방을 버렸다.

‘너 원래 안 이러잖아….’

지옥불의 게르한과 자밀라를 미끼로 내던진 이후 곧바로 아메라로 진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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