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4
회귀자 사용설명서 494화
반전의 반전의 반전(2)
‘제기랄….’
표정이 구겨지는 게 당연했다. 너무 예상 밖의 상황이었으니까.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하지만 속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척해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고는 있었지만 이미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하얀이 새로운 마법을 선보였고 그게 유효타로 박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로 설명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새로운 마법에 대해 떠올리자 어처구니가 없어 자꾸만 실소가 튀어나왔다.
‘공간이동?’
이 대륙에서 별별 마법을 다 봐왔지만 저런 종류의 마법은 본 적이 없다.
애초에 공간을 도약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온갖 과학기술로 별 짓거리를 다 할 수 있는 현대에서조차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였고 이 대륙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아직은 닿지 못하는 꿈의 영역이라는 소리다.
이쪽 역시 마법사 관련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만큼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굳이 이쪽의 직업으로 예를 들자면 현자의 돌을 완성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천재, 천재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레벨이 다른 천재.
천천히 떡락하고 있었던 정하얀 코인이 다시 한번 용솟음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존버하길 잘했지….’
물론 이 정체불명의 마법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완벽하다고 볼 수 없다. 정황은 무려 두 가지.
저런 마법이 있음에도 굳이 아메라 근처까지 와서 마법을 발동시켰다는 것이 첫 번째.
‘아직은 거리 제한이 있는 모양인 것 같고.’
부대 전체가 목숨을 건 듯한 표정을 지은 것도 신경 쓰인다. 이게 두 번째다.
‘실패했을 때에 차원의 미아가 되거나 몸이 찢어지는 그런 페널티가 있었던 건가? 이론으로만 가능했던 걸 테스트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용한 거라고 보면 되겠는데….’
잘못했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물론 김현성이야 정하얀에 대해 알고 있었던 만큼 그녀가 이런 종류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머지 파티원들의 입장에서는 실험용 쥐마냥 실험에 자원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마법을 발동하는 데 사용한 마력량을 생각하면 연습 삼아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이 아니다.
내가 이쪽에 잡혀 있던 시간 동안 모으고 모은 마력으로 딱 한 번 발동하는 것이 한계. 물론….
‘돌아가는 데 사용할 마력도 없을 거고.’
그제야 전체적인 전황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리무르아의 둥지에 침입해 있는 본대를 제외한 병력 중 일부 병력은 미끼. 또 일부 병력은….
‘퇴로 확보네.’
도노반에게 털리고 있는 41, 42, 43거점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들이 공략하고 있는 거점들은 유사시 퇴로가 되어줄 것이다.
심지어 이후 복귀할 도노반 병력의 견제까지 가능한 포인트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마구잡이로 들이대는 것 같지만, 거미줄처럼 치밀하게 짜인 전술은 감탄을 불러일으킬 지경이다.
대담하고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확실히 뒤까지 생각하고 있는 병력의 운용은….
‘지혜 누나 작품이겠고.’
사실 이지혜였다면 더욱더 안전한 방법을 생각했겠지만 차희라의 입김이 많이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
사방팔방에서 포텐을 터뜨리고 있는 이들을 떠올리자 놀랍기보다는 무섭다.
물론 이쪽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데 감사한 마음이 들기야 했다.
그러나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그다지 반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상황실에서도 싸늘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악마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참을 수가 없다.
-이건….
“완벽하지는 않지만 모두 계산 안에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여러분. 동요하면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지만, 계산 안에 있던 변수입니다. 충분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해결 방법 역시 가지고 있고요.”
-그렇군요. 역시나 이기영 외부고문이십니다. 정말 인간이라는 종족은 언제나 저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 같습니다. 벨리알 님을 이곳에 소환한 인간이니만큼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동 마법이라니…. 타 차원에서 사용하는 인간이 몇몇 있다고 들은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제 눈으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들도 저들이지만 외부고문께서도 정말로 대단하시군요. 이런 변수까지 이미 계산해 두고 계셨다는 겁니까?
‘계산 안에 두긴 뭘 계산 안에 둬, 이 새끼들아.’
아무리 세기의 천재로 지략가라도 이딴 상황을 예상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슨 전조나 복선이 있어야 예상하고 말고 할 것 아닌가.
비교적 평범한 측에 속하는 내가 이런 미친 상황을 예상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김현성이 이런 식으로 무대포로 달려들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연방을 버릴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정하얀이 시험용 이동 마법을 들고 와 성공시킬 거라는 건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좌표에 오류가 있어 다른 곳에 떨구어놓은 게 아닌가 하는 행복 회로를 돌리기도 했지만, 녀석들이 자리한 것은 완벽히 둥지의 안이었다.
목표 설정을 위해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린 게 뼈아프게 느껴졌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나한테 묻지 마. 이 새끼야. 나도 몰라.’
-뭔가 현묘한 수가 있겠지요. 외부고문이 아니십니까. 하하.
‘그딴 거 없어. 없다고. 씨발.’
지금으로써는 기본적인 대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 병력을 불러 최대한 진군을 늦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리무르아 님에게 닿기 전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으니, 일단 가까운 곳에 있는 병력부터 불러 모아주세요. 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게….”
‘발리토스.’
“발리토스 님도 둥지로 오라고 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식량 저장고는 이후에 따로 활용한다고 꼭 말씀해 주시고요.”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 그리고 사역마들 숫자들 조금 늘릴 수는 없습니까?”
-네. 아마 가능할 겁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원정대는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한 상황이다
정석대로 레인저들을 보내고 간단한 정비를 하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당연하지만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조금 눈에 띄고 있는 것은 모두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기저기서 아직도 구역질하는 이들도 보인다.
아직 완벽하지 않았던 마법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는 후유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하얀.
얘는 다시 한번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었는데,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 보이는 지경이었다.
‘아이고오….’
폐인이 된 것 같은 겉모습에 가슴이 조금은 아파진다.
특히나 박덕구가 정하얀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더욱더 그랬다.
성공했다는 듯 주먹을 꽉 쥐고 잠깐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가 이렇게 짠해 보이기는 또 처음.
다들 그녀에게 다가가 잠깐 격려의 인사를 하고 있었지만, 유독 선희영만은 정하얀에게 다가가지 않는 모습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벌써 원정대는 진입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정비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놀랍지도 않아.’
-곧바로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말입니까?
-네. 도착했다고는 하지만 여유 있게 캠프를 차리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저희가 이쪽으로 왔다는 걸 적들이 알아차렸을 확률이 큽니다. 소환 유지에 사용되고 있는 이들과 어딘가에 있을 이기영 파란 부 길드 마스터님을 구출한 이후 바로 이곳을 빠져나갈 겁니다.
-정확한 위치는 파악 불가능한 겁니까? 아니, 그 이전에 이기영 님께서 정말 이곳에 계실지….
-현재 레인저들이 물어온 정보로는 물론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후… 이 둥지의 주인이 더 잘 알고 있겠지요. 리무르아라는 악마가 머무르는 방의 뒤쪽이나 아래쪽에 있을 거로 생각하지만, 전혀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도 있는 만큼 일부 병력으로 수색대를 꾸려 근처부터 조사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사이에 본대는 둥지의 공략에 집중합니다. 전에 브리핑 드렸던 대로 움직이면 될 겁니다.
-네.
-브리핑대로입니다.
-네.
짧은 대화를 마친 후 병력이 안으로 돌진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시바. 이거 진짜 어떻게 해야 돼. 리무르아가 버틸 수는 있나? 이거 진짜 가능한 건가?’
솔직히 뭐라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본대가 지쳐 있는 상황이었고 리무르아의 둥지에 있는 것은 리무르아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객관적인 전력을 분석해 보면 당연히 둥지 쪽의 전력이 더 위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얀이도 리타이어 상태니까.’
그런 방향에서 생각해 보면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본래의 계획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차피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인류의 처절한 승리로 기억되어야 할 리무르아 둥지 전투.
온갖 고생과 시련을 겪으며 천천히 성장한 대륙 연합이 수많은 상처를 안으며 격전 끝에 도착해야 했던 장소가 바로 이 장소였다.
본래 그리고 있던 건 대륙 연합이 이 둥지를 가까스로 공략하는 그림이었지만, 그런 방식을 강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약 본래의 계획대로 둥지가 공략되어 마무리되는 그림으로 이번 이벤트가 끝나게 된다면….
‘완전 망한 거나 다름없는 거지.’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해 손익분기점이 1,000만인 영화를 50만도 채우지 못한 것과 같은 꼴이 된다.
대륙연합이 느껴야 할 커다란 절망감과 악마에 대한 공포심 같은 마이너스 감정들은 기대 물량의 반의 반의 반도 채우지 못하게 된다는 거다.
지금으로서는 둥지 공략을 방해한 이후 본대가 작전에 실패해 탈출하는 그림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후 일어날 세세한 변수는 급한 불을 끈 이후에 천천히 진화하면 되니까.
‘절대로 이대로 끝나면 안 되지.’
그 50만 관객 수도 도노반이 채우고 있는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이번 프로젝트가 망하면 최악의 경우 27군단에 강경파 여론이 힘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벨리알의 입장에서도 이기영 책임론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오게 될 거고.
대륙의 입장에서 그것보다 악몽인 상황은 쉽게 찾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일단은 믿는 거야.’
어느 정도는 생각이 정리됐다. 확실히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만, 회생은 가능하다.
그렇게 행복 회로를 돌리며,
리무르아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전달한 이후에는 턱을 쓰다듬으며 상황을 바라봤지만.
-제기랄! 제길. 네놈이 감히! 내게 상처를 입혀? 그분이 칭찬해 주신 내 머리카락을!
-어디에 있지.
-아아아아악! 죽어!!! 죽어어어어!!!
퍼스트 블러드, 더블 킬, 펜타 킬, 전장의 지배자가 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완전 각성한 김현성이 리무르아를 관광시키고 있는 걸 바라본 이후에는 상황실을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니네 뭔 도핑이라도 했어? 걔 죽으면 나도 죽어, 이 새끼들아.’
그 말 그대로.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달아가는 상황에 발버둥이라도 쳐봐야 했으니까.
‘제기랄. 어떻게 해, 이거. 씨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해결책을 떠올린다.
현재로서는 저 본대를 후퇴시키는 게 유일한 답이다.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발리토스를 비롯한 타 병력이 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질극이라도 벌여? 이걸로 될까?’
꽤 적절한 방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그때.
“어?”
정신없이 달리던 몸을 잠깐 멈출 정도로 쓸 만한 생각이 뇌 속에 번개처럼 떨어진다.
“푸흐헤헤흐하하핫.”
조금 억지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복선은 이미 뿌릴 만큼 뿌렸다.
“이야. 왜 이걸 생각 못 했을까. 처음부터 이걸로 갈걸.”
어째서 피해자가 되려고만 생각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너무 흔한 클리셰인 것 같아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왕도는 왕도.
영화의 스토리를 대폭 수정하기야 하겠지만, 소년 만화에서 이것보다 잘 먹히는 클리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로 요거지….’
조금 갑작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본래 주인공의 라이벌이나 친구 놈들은.
…….
….
….
“한 번씩 타락하거나 흑화하기 마련이지, 뭐.”
그 말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