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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95화 (492/1,590)

# 495

회귀자 사용설명서 495화

흐콰한다!(1)

조금 가슴 아프기도 했다. 정신없이 뛰어가는 와중에도 정말로 이게 맞을지 고민했을 정도.

나야 대충 연기 몇 번 뿌려주면 되지만 지인들이 느낄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닐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골든타임 내에 들어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의 심장부로 진입한 상황.

둥지에 들어온 이후 시작된 리무르아 레이드가 어쩌면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절박해 보이던 애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혹시나 이번 일로 인해 충격을 받고 재기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그 정도는 아니겠지, 뭐.’

특히나 정하얀이 조금 걱정됐지만, 김현성이 옆에서 멘탈을 잘 잡아 줄 거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박덕구 이 새끼도 마찬가지일 거고….’

여러모로 괜찮을 거라 자기 최면을 걸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잠깐 보였던 희망이 순식간에 사라질 때의 절망감이 어떨지 알기에 흑화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만 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방법이 이것밖에 없는데.’

애초 이 계획이 잘 풀릴 거라는 보장도 없다.

지금 당장 내가 간다고 해서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발리토스가 올 때까지 버틴다는 위대한 과업은 성난 김현성을 상대로는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저기에 김현성만 있는 것도 아니고….’

붉은 용병의 차희라와 실리아의 카스가노 유노.

다행히 박연주의 경우에는 주변 수색을 위해 잠깐 빠진 것 같았지만, 그 외에도 강자들이 즐비해 있다.

교황청에 이름난 사제들은 물론이거니와 성녀급의 신성력을 뿌려대는 선희영과 엘레나도 있다.

조금이라도 교국에서 이름을 날렸다고 하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다.

27군단의 주축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리무르아와 그녀의 하수인들을 상대로 대등하다 못해 압도하는 싸움을 보여줬으니 이렇게 똥줄이 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당연하지만 리무르아가 죽는다면 그 시점에서 상황은 아웃.

도노반은 몰라도 벨리알의 고정 1픽이 여기서 리타이어 한다는 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잠깐 행복 회로를 돌리기는 했지만, 이 와중에도 리무르아가 털리고 있다는 걸 떠올리자 다시금 발걸음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만마의 지배자이신 벨리알 님의 소중한 1픽이 죽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렇지.]

씨바.

[일이 꼬인 것 같더군.]

제기랄.

‘그렇지 않습니다요. 벨리알 님. 이것도 전부 계획의 일부이니 안심하시고 지켜보고 계시면 됩니다.’

[역겹고 구역질 나는 거짓말은 되었다. 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대충 파악하고 있으니.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요. 그래서 이렇게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뛰는 게 아니겠습니까. 굳이 벨리알 님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전부 다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생각은 나쁘지 않을 것 같다만, 이 건 역시 망칠까 두고 볼 수가 있나. 본래 신뢰를 잃은 이라는 건 그런 법이다.]

‘그 말씀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번 같은 돌발 행동을 하지는 않을 테니. 구역질 나는 역겨운 인간. 네가 현세에서 이뤄놓은 것들을 망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네가 아끼는 인간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도 없고. 너에게 해를 끼칠 생각도 없다. 이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너를 아끼고 있고 네가 나와 함께 일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다만 어느 정도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럼… 어떤 도움을 주신다는 것인지….’

[계약.]

‘네?’

[계약이다.]

‘어떤 계약을 말씀하시는 건지 이 우둔한 필멸자는 도저히… 애초에 저는 계약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방법을 찾아보니 꼭 그렇지도 않아. 현재 베니고어를 비롯한 대륙의 신들이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있을 것 같더군. 지난번처럼 가계약이 아닌 직접 계약이다.]

‘그건….’

[네가 베니고어에게 받은 것들을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네?’

[공유하자는 거지.]

‘…….’

[물론 베니고어를 비롯한 대륙의 주신들이 너를 공유하는 걸 두고 볼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만, 계약 과정에는 문제는 없다.]

얘 봐라.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모르게 벨리알도 이런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원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정도.

그동안 조용했던 게 이 타이밍을 기다린 건지 아니면 정말로 이쪽과 직접 계약을 할 방법을 알아본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둘 다겠지.

그게 아니고서는 이런 타이밍에 이런 말을 건넬 필요가 없을 테니까.

베니고어한테 빛의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부여받은 것도 종류는 다르지만, 계약의 일부다.

그녀는 나에게 직업을 내리는 대신 빛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을 종용했고 이쪽은 그걸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벨리알과 이중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

흑마법과 신성력이 상충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좋게 말하면 공유하고 깔끔하게 이중 계약을 하자는 소리이기는 했지만, 베니고어가 어떤 액션을 취할지 모르는 만큼 녀석들과 계약 파기까지 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파산에서 복귀한 베니고어가 스스로 내게 준 힘을 거둘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선 것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의심스러웠던 건 왜 이중 계약이냐는 것. 벨리알의 입장에서는….

‘그냥 베니고어를 쳐내고 계약하는 게 더 유리한 거 아닌가?’

[불가능하다.]

‘…….’

[네가 생각한 방법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어째서 이렇게 좋게 이야기하는지 의심스럽기도 하겠지. 현재, 네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협박하거나 강제하는 계약은 우리 측에서도 불공정한 계약으로 추후 문제에 휘말릴 확률이 높아. 마음 같아선 이번 일을 빌미로 네게 불리한 계약을 체결하고 싶지만 애초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다.]

이게 사실이라면 지옥에서의 계약 절차가 현세보다 훨씬 더 좋다는 소리가 된다.

[믿을지 말지는 네 자유다. 하지만 현세로 소환된 악마들이 어째서 금화나 제물과 같이 쓸데없는 소원을 말하는 인간들의 계약까지 들어주는지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계약은 어디까지나 협상이지 강제가 아니야. 물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속임수를 쓰는 것은 존재하다만 적어도 이번 계약은 그런 종류의 계약은 아니다. 말하지 않았나.]

‘그럼.’

[더불어, 애초에 그녀가 네게 걸어놓은 금제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소리다. 먼저 침을 발라놨더군. 무능력한 년이 남자 무는 솜씨 하나는 기가 막혀. 그런다고 내가 손대지 않을 거로 생각한 것도 우습고.]

‘…….’

[아무튼, 내 조건은 이렇다. 본래 양보하는 성격은 아니다만 나로서도 크게 양보해 줬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네가 떠올린 구역질 나는 계획의 성공은 내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주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한 명의 악마로서 보고 싶은 모습이 아니겠나. 뭐,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의심스럽다면….]

‘아닙니다. 아닙니다. 벨리알 님. 이 미천한 종이 잠시나마 벨리알 님의 크나큰 뜻을 의심했었습니다요.’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인 바로 그때였다.

[벨리알의 개입으로 새로운 특전 직업을 생성합니다.]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빛의 연금술사 직업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준 신화 등급의 직업, 어둠의 역병군주를 서브 클래스로 얻으셨습니다.]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준 신화 등급의 직업 어둠의 역병군주가 삭제….]

[벨리알의 개입으로 인해 준 신화 등급의 직업 역병군주가 삭제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직업을 동시에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벨리알의 개입으로 인해 준 신화 등급의 특성 직업 전환이 생성됩니다.]

[빛의 연금술사를 서브 클래스로 전환합니다.]

[어둠의 역병군주를 메인 클래스로 전환합니다.]

‘어? 어어어?’

[만족스러운가?]

‘빛은 날 배신했다!’

[만족스러운가 보군.]

‘아이고… 벨리알 님께 무한한 영광을 드리겠습니다요. 벨리알 님 만만세!’

[나도 투자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두 번 언급할 필요도 없다.

벨리알이 모아놓은 실적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외부 시스템에 개입해 일을 치를 정도라면 꽤나 많은 걸 투자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잠깐이나마 녀석을 의심한 내가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위대한 만마의 지배자이신 벨리알 님께서는 베니고어나 엘룬 같은 저속한 술수는 부리지 않는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함께 달리는 든든한 동료.

괜스레 훈훈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목숨을 걸고 성공시키겠습니다.’

무조건 성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가 없다.

곧바로 빛날배를 시전하며 뛰쳐나가는 내 모습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정체불명의 비정함마저 감돈다.

벨리알 님의 성소를 침입한 교국의 본대를 막아야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

빛의 연금술사로 저들을 막아야 했다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벨리알 님의 성은을 입어 다시 태어난 둠기영은 다르다.

마력이 부족한 게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대충 파악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 포텐셜.

온몸에 힘이 넘치는 듯한 느낌은 팔굽혀 펴기 100회를 쉬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느껴질 정도.

어떤 특수 능력이 있는지는 조금 더 알아봐야겠지만 적어도 부족함이 없다.

리무르아가 격전을 치르고 있는 장소에 다다르자 몸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깥에서부터 벌써 거대한 굉음과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쩍 거울을 꺼내 모습을 바라보자 확실히 나쁘지 않은 것 같은 모양새.

‘와, 이거 진짜 타락한 것 같이 생겼다.’

역병군주의 특수 효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치 시체라도 된 듯한 창백한 얼굴이 눈에 띈다.

눈동자 색깔도 소름 돋을 정도로 투명한 푸른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마력탈진 현상이라도 겪은 것처럼 새하얀 색의 머리카락도 시야에 비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얀색이라고 볼 수 없다.

눈동자 색처럼 약간의 푸른 기가 감돌고 있었으니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부족한 중2 감성을 충족시켜주는 완벽한 모습이다.

누가 봐도 한눈에 타락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반쪽짜리 가면만 있으면 딱일 것 같은데.’

[전설 등급의 아이템 ‘타락한 왕자의 반쪽 가면’을 획득합니다.]

‘아이고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아!’

얼굴의 반쪽만 가려주는 가면은 상징성이다.

김현성에게는 가면쓰레기를 떠올리게 만들 수도 있는 장치이기도 했고.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줬는데도 실패할 정도로 이쪽은 베니고어스럽지 않다.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괜스레 헛기침을 한 번 한 이후 안쪽으로 진입한 순간 눈에 보인 것은 리무르아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김현성.

‘오랜만이다. 현성아… 어휴, 반가운 것아….’

하지만 촉수 몇 가닥이 잘린 채로 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리무르아를 바라보니 다시금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시바… 너무 여유 부렸나.’

김현성이 마격을 날리기 전에 개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들어 올렸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천천히 전방을 바라보기 시작한 녀석과 눈이 마주친 것.

처음 반가웠던 얼굴이 천천히 구겨지는 것은 물론, 이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손에 들고 있는 검을 힘없이 떨어뜨리는 모습은 가관.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고 내 눈으로 보기에도 빈틈투성이로 보일 정도로 무방비한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전투 중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

‘뭐야, 이거… 뭐야. 그 정도로 충격받을 일이야?’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시야에 비치는 것은 전투 의지를 상실한 것 같이 보이는 김현성의 얼굴.

천천히 입을 열고 있었지만 뭐라고 말하는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어… 어째서….”

‘뭐야. 왜 이래…. 뭐가 이렇게 쉬워?’

“어째서어어어어!!!”

그와 동시에 리무르아가 휘두른 촉수에 형편없이 나가떨어지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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