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6
회귀자 사용설명서 496화
흐콰한다!(2)
효과는 굉장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 표현보다 현재 상황을 더 잘 표현해 주는 말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혹시나 다른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에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진입했건만 그 마음의 준비가 무색해질 정도로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리무르아 역시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만큼 곧바로 얼굴이 환해지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어째서 내가 이런 모습으로 이 장소에 자리해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미리 언질을 받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한참이나 둥지 안에서 치고받던 양측의 병력 역시 잠깐 소강 상태를 맞이한 상황이다.
멀뚱멀뚱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가장 먼저 시야에 비쳤다.
“형님인거요?”
“오, 오, 오빠. 흐어어어어엉. 오빠아….”
“자기?”
“이기영 님….”
순서대로 박덕구, 정하얀, 차희라, 엘레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현재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들이 대다수였다.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한 것 같은 엘레나와 차희라, 카스가노 유노 같은 이들은 방금의 김현성처럼 하늘이 무너지진 것마냥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 파악이 느린 박덕구는 커다랗게 입을 열며 이쪽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기쁘다는 얼굴이다.
“사, 살아 있었구만. 형님이 살아 있었다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형님. 어서 빨리 이쪽으로 달려오쇼. 아니 지금 거기서 기다리쇼. 내가 직접 갈 테니까. 내가 직접 간다니까!”
“…….”
“내가 우리 형님한테는 아무 일 없을 줄 알았지. 우리 형님이 누구요. 끈질기게 버티고 버틸 줄 알았다니까.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금, 금방 구해주겠다니까.”
‘박덕구,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현실을 부정하는 건지 정말로 눈치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한바탕 눈물을 뽑아내며 목이 터지라고 외치고 있다.
“형님, 동생이 왔소. 형님이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 왔단 말이요! 들리는 거요? 아이고. 우리 형님, 안색 창백한 것 좀 보라니까. 머리카락은 또 왜….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요? 빨리 이 악마 새끼들을 몰아내고 형님을 구해야 하는데. 아니,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요! 진짜!”
“…….”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거요? 무기를 들어야지! 뭐 하고 있는지 묻잖아! 현성이 형씨는 괜찮은 거요? 마법사들은 빨리 주문 외우고 전사들은 방패 들어! 방패 들으라니까! 형님이 바로 눈앞에 있잖아!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저렇게 있는데!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요!”
‘아, 이 새끼 짠해지게 하네. 진짜. 그리고 이 새끼야. 이 거리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는 아니지.’
“늦었어.”
“늦긴 뭐가 늦었다고! 개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전투 준비하라고 이 개새끼들아!”
“…….”
“전투 준비해! 전투 준비하라고 이 머저리 같은 새끼들!”
침묵 마법이라도 맞은 것 마냥 조용해진 장내에 들려오는 소리는 박덕구의 커다란 목소리가 전부.
주변을 둘러보며 어서 빨리 구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호응해 주는 목소리는 없었다.
녀석을 제외한 전부가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심지어 흐느끼는 소리마저 들려오는 상태. 누구인지는 뻔했다.
“흐어어어엉. 오빠아…. 흐어어어어어어엉….”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굳이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인 정하얀의 목소리는 서럽다 못해 눈물이 찔끔 튀어나올 정도.
여기서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할지 잠깐 고민해 봤지만, 계획의 수정은 없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촉수로 가득 찬 이 역겨운 공간이 너무나도 상쾌하다는 듯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는 와중에도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지지 않는다.
천천히 내 몸을 바라보는 액션 역시 나쁘지 않다.
새로운 힘을 얻었다는 듯이 몸 전체를 둘러보고 괜스레 천장을 바라보며 정체 모를 충족감을 느끼는 연기는 1,000만 관객을 이끌 조연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애드립 이었다.
벌써 울먹거리고 있는 이들부터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는 이들까지.
물론 아직도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무르아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형님! 피하쇼! 제기랄! 뭐 하고 있는 거야!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진정하세요!”
“그냥 저렇게 두고 볼 거요? 저 몬스터가 형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니까! 빨리 이거 놓으라고!!!”
“그러니까 진정하라고요!”
“형님! 내 목소리 들리긴 들리는 거요? 빨리 피해! 피하라고! 제기랄! 피해!! 피하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진심으로 이쪽을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는 그녀가 점점 내게 다가올수록 커져만 갔다.
하지만 리무르아가 내게 별다른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녀석 역시 입을 다물고 있는 녀석들과 같은 얼굴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이쪽에 살짝 안기기까지 하는 모습을 본 이후에는 무서울 정도로 표정을 구기기 시작.
항상 웃고 있었던 박덕구의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입술을 살짝 움직인 것은 당연하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한 것은 모두가 똑같았는지 침을 삼켜 넘기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아직도 이기영 흑화설을 믿지 않는 관객들에게 보내는 묵직한 목소리.
마치 얼음장처럼 싸늘한 목소리였다.
“시끄럽군.”
“어?”
“…….”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시끄러워. 무척이나 상쾌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그리 편하지가 않아.”
“정신이 든 거요? 형님! 정신이 든다면 여기 좀 봐보쇼. 박덕구요. 형님 동생 박덕구요.”
“오빠…. 오빠아!!”
“명예추기경님. 들리세요? 들, 들리시나요?”
“저들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리무르아?”
-신경 쓰실 필요 없으십니다. 부군이시여.
‘누가 네 부군이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설정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지만 정말로 죽을 뻔했던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이 정도는 받아들여 줘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으로 잠정 채택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리무르아에게 조종당하는 것이었지만 27군단의 일원이 된 듯한 모습이 더 극적으로 비칠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다.
기껏 흑화했는데 남 밑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그래도 카리스마가 없지 않은가.
끈적끈적하게 얽혀오는 촉수녀의 촉수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기야 했지만 보이는 그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이 판의 최종 보스라고 잠정 확정된 캐릭터와 얽히고 있는 장면은 아직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솔직히 조금 중2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원래 타락이니 흑화니 뭐니 하는 것들은 중2 감성이 중요한 법 아닌가.
‘요런 게 먹힌다니까 그러네.’
“오빠…. 흐어어엉어엉. 오빠아….”
“…….”
“오빠아…. 히끅. 히끅.”
“…….”
“오빠아….”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정하얀은 계속해서 울부짖으며 이쪽을 부르고 있다. 아직 바뀐 직업이 익숙하지가 않았지만….
“시끄럽다고 말하지 않았나.”
손에서 뭉치기 시작한 칙칙한 기운이 정하얀에게 쏘아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
‘뭐야.’
겁만 줄 요량이었지만, 벨리알의 특전 때문인지 꽤 위협적인 기운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앞을 막은 건 조혜진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정하얀.
그 앞을 막아선 조혜진 역시 침통해 보이기는 마찬가지.
“물러서세요. 하얀 씨. 위험합니다.”
“…….”
“거짓말이야. 히끅.”
“…….”
“흐어어어어엉. 히끅. 오빠아….”
“그 입 다물어라, 멍청한 인간.”
“…….”
‘말 잘 듣네, 하얀이.’
-노여워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나의 부군이시여. 부군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저 하등한 것들은 곧 깡그리 없어질 테니.
“부길드마스터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이고, 혜진이도 열 내줘서 고맙다.’
-설명이 필요합니까? 보이는 그대로인데 말입니다. 저희와 함께하시기로 했을 뿐이랍니다. 당신들이 알 던 그 투명한 인간은 지금은 이 자리에 없어요. 지금 당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추악한 베니고어의 개가 아닌 벨리알 님에게 성은을 얻으신 27군단의 부단장님이십니다. 또 매일 밤 저를 즐겁게 해주시는 제 부군이기도 하시지요. 후훗.
‘쓸데없는 설정을 굳이 넣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한데. 얘는 진짜 벨리알 1픽이라고 할 만하네’
확실히 순발력 하나는 기가 막혀.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는 겁니다. 푸핫. 그런 줄도 모르고 이리도 급하게 뛰어오는 꼴이라니 너무나 우스워 배가 아플 지경이랍니다. 잠깐 동안 즐거우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그동안 즐거우셨습니까?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아직은 늦지 않았을 거라고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 정말 볼만했는데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달라졌군요.
“…….”
-그래요. 바로 그런 표정입니다. 하등한 인간들, 당신 같은 인간들에게 딱 어울리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야 당신들다워요.
오선생이라도 만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건 연기인지 진짜인지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말로 표정이 좋아 보였다는 것.
‘지금 실적 쌓이고 있는 건가 몰라.’
아마 꽤 쌓이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대다수의 인간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듯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으니까.
느끼고 있는 절망감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3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아이고, 현성아아.’
아직도 바닥에 처박힌 채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내가 다 속이 쓰릴 지경이다.
딱 멘탈이 나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설마 전투 의지를 상실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
본래 김현성의 멘탈이 약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마치 산송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살아 있는 거 맞아?’
리무르아의 일격에 눈을 뜬 채로 기절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정도.
계속되는 중얼거림을 통해 살아 있다는 것만 유추할 수 있었다.
누구와 계약을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했으니 누구에게 마이너스 감정을 뽑아내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현재 김현성과 교국의 본대가 쌓아주고 있는 실적은 지금까지 벨리알이 투자한 손익분기점을 이미 넘어섰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관심이 없다는 듯 천천히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자 딱히 저항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 보이질 않는다.
정말로 여기서 다 죽을 것처럼 포기하고 있는 인간들이 대다수.
엘레나와 카스가노 유노 역시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비틀거리고 있었고 정하얀은 뭐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파란 길드원들이나 교국의 사제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베니고어의 이름만 부르고 있다.
‘얘네 탈출해야 하는데…. 이거 어쩌냐.’
지금 상태로는 탈출이고 뭐고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나마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건 의외로….
차희라.
성격상 당장 미쳐 날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경력 빵빵한 모험가답게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전열을 정비하고 있는 모습은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한다.”
‘옳은 판단.’
대부분이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팀의 메인 딜러라고 할 수 있는 김현성이 저 모양 저 꼴인 만큼 다시금 총력전을 벌인다는 것부터가 무리수라 할 수 있으리라.
이쪽은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기만 하면 끝.
싸늘한 눈빛으로 입을 열자 멈춰 있던 장내에서 커다란 소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부 죽여.”
-뜻대로 하겠습니다.
‘X나 카리스마 있었어. 씨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