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7
회귀자 사용설명서 497화
흐콰한다!(3)
‘싸움이 쉬워질 것 같아서 다행이네.’
혹시나 다른 변수가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한 것이 사실이다.
아직 새로 얻은 직업의 정보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준 신화 등급에 벨리알이 특전으로 내려준 직업인 만큼 빛의 연금술사를 상회할 힘이 있는 거로 파악했지만 숙련도가 낮으니 무언가를 하기는 어렵다.
솔직히 어떤 종류의 주문을 외울 수 있는지도 전부 확인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로 교국의 본대와 붙기에는 확실히 리스크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조금은 불안했었지만, 생각보다 크게 호응해 주는 관객들 덕분에 조금 더 일이 쉽게 돌아갈 것 같았다.
정하얀은 전의 이동마법으로 전투능력을 상실한 상황이었고, 전투 의지를 상실한 김현성은 조혜진에게 부축을 받으며 끌려가듯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쓸어버릴 수도 있겠는데….’
만약 이게 실제 상황이었다면 둥지 안에 있는 병력 전체가 전멸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가 없다.
‘차희라까지 정신 안 차리고 있었으면 정말로 큰일 날 뻔했네.’
격전을 펼쳐야 조금 더 리얼리티가 살지 않겠는가.
어설프게 풀어주는 그림을 보여주는 건 아무래도 긴장감이 살지 않는다.
전방을 바라보자 본대의 전위들이 방패를 들고 길을 막는 게 시야에 비쳤다.
‘매뉴얼대로.’
후방에 있는 사제와 마법사들부터 대피하는 퇴각 매뉴얼의 정석이다.
단단한 전위에 집중적으로 사제들과 마법사들의 버프가 떨어지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보여주는 전위들은 군단의 폭격도 버틸 정도였다.
박덕구 역시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전열을 정비하며 다른 이들이 빠져나갈 자리를 만든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입과 다리가 덜덜덜 떨리는 중이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악마들을 방패로 쳐내며 어떻게든 근접 딜러들을 본대의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지만 그게 생각처럼 잘 풀릴 리가 없었다.
“버, 버텨! 빨리 안쪽으로, 안쪽으로 들어간다. 매뉴얼대로 진행해! 매뉴얼대로!”
-크르르르륵!
“신성력! 신성력!”
-크워어어어어어어!!
“병력에 파묻히지 않게 조심. 휩쓸리지 않게 조심해! 검은 백조의 레인저들을 따라간다! 네임드 몬스터들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견제하고 후방부터 빠르게 빠져나간다! 사제들을 최우선으로 지켜!”
당연히 모두가 퇴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기를 놓친 근접 딜러들과 전위의 일부, 또 조심성 없는 후방 부대 몇몇은 악마들에게 휩쓸리는 것으로 이미 계획되어 있다.
연방 놈들이면 뚝배기를 부셔 버렸겠지만, 상대가 교국의 본대이니만큼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
이곳에서 마력을 공급해 주는 과업에 동참하게 되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는 멀쩡히 살아 돌아가게 될 거다.
이형의 괴물들에게 빨려 들어가는 병력들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린 병사들.
친우와 동료를 버리고 퇴각할 수밖에 없는 처절함.
‘실적 쌓이는 소리 들린다요.’
“예진아! 예진아!!!”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아아아아악! 오빠아! 살려줘! 꺄아아아악!”
‘니네 안 죽는다니까 그러네. 마력 좀 뽑아내고 끝이라니까. 의도치 않게 다칠 수 있기는 한데 절대로 죽지는 않을 거야, 애들아.’
“길드 마스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꼭 안부 전해주십시오.”
“제기랄! 현우야…. 현우야!”
‘그러니까 니네 안 죽는다고.’
“이 개새끼들아!! 이 악마 새끼들! 흐윽.”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제이슨…. 이렇게….”
“카트리나….”
떠나는 자가 있다면 남는 자도 있기 마련이다.
여기저기에서 이산가족이 헤어지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저런 종류의 신파가 아니다.
물론 쌓일 실적을 생각하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는 게 맞지만, 이번 한 번만 빨아먹고 끝을 볼 수는 없지 않은가.
퇴각한 이후 다시금 나를 찾아올 수 있게 어느 정도의 설계를 하는 게 맞다.
무엇보다.
‘오해하면 안 되니까.’
완전히 타락한 거로 생각해 공적으로라도 몰리면 큰일 중의 큰일.
겉모습 자체는 완전히 악마들의 손에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무의식 속 깊은 곳에는 빛기영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는 복선 정도는 뿌려줘야 아군의 망치에 뚝배기가 깨지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보잘것없는 마력이기는 하지만 최대한 마력을 모으자 제법 그럴듯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도 너무 부족한데….’
시선을 집중시키기에는 부족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겨우 이 정도로는 영 체면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부분은 도와주도록 하지.]
‘아이고, 감사드립니다. 벨리알 님.’
[그렇게 저자세로 나올 필요가 없다. 이런 도움을 주기 위해 너에게 특전을 내린 것 아닌가.]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무궁한 영광이옵니다. 감사. 또 압도적 감사를 드리겠습니다요.’
[하핫. 매번 하는 말이지만 네가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가 네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함이 옳다. 믿을 수 있겠나. 지옥에서 상황을 지켜본 몇몇 군단장들이 기립 박수를 하고 있더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쳐대는 그 72군단장 들이 말이야. 심지어 사탄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고 있었고. 양심이 찔리지도 않는 건가. 정말로 구역질 나는 인간이 아닌가.]
‘…….’
[욕이 아니라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함이 옳다. 내가 지금까지 많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봐 왔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을 본 적은 처음이야. 과연 나의 계약자답다. 아암, 내 계약자라면 이래야지.]
‘조금 흥분한 것 같은데….’
평소답지 않게 약간 하이톤이 된 것 같은 목소리다.
실적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현 상황이 즐겁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라고 생각했다.
악마 중에서도 탑을 찍어 먹는 악마다운 모습이다.
그래도 구겨진 파티원들의 표정의 아주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이쪽과 달리 아주 신명 나게 즐기시고 계시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내 인간성을 성찰했지만, 아직은 그 정도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무튼, 흥분한 벨리알 덕에 점점 더 주변에는 꺼림칙한 마력이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잠깐 이쪽을 벗어났던 시선이 다시금 쏠리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
마치 정하얀이 대단위 공격 마법을 외웠을 때와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의 마력량이다.
물론 대부분이 블러핑이고 내가 컨트롤하기에는 너무 많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걸로 주문을 완성할 생각은 없다.
적당히 겁만 주는 것으로 끝이라는 거다.
“방어 마법 외워. 방어 마법!”
“아티펙트 전부 발동시켜 떨어질 마법에 대응한다.”
“어, 어떤 종류인지 확인되지 않습니다. 처음 보는 흑 마법이라고 판단되며… 명, 명예추기경님께서 주문을 외우고 계신 것으로…. 화, 확인됩니다.”
“대응 주문 외워! 대응 주문을….”
예상대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 하지만 활로를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신이시여….”
“말도 안 돼.”
“신이시여어…. 제발….”
기분 나쁘고 칙칙한 마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몇몇 이들의 얼굴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친다.
처음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몇몇 이들은 아예 포기한 듯 이쪽으로 마력이 모이는 것을 바라보는 중이다.
기본적으로 기분 나쁜 마력이 넘실거리는 만큼 뻥튀기 효과를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아마 소수의 네임드들을 제외한 모두가 이렇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다.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떨어지면 죽는다.’
떨어지게 해서는 안 돼.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이쪽을 견제하는 마법을 쏘아 보내려고 하는 이들까지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본 정하얀이 지랄 발광을 하며 단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언뜻 시야에 비치기는 했지만….
‘어이구, 막장이네, 막장이야. 하얀아. 왜 그러니, 하얀아아…. 떽! 단검 휘두르면 안 되지! 아이고오…. 기어코 한 놈 찔렀네.’
견제를 위해 쏘아 보낸 마법이 이쪽까지 닿을 리가 없었다.
“버러지 같은 인간 놈들.”
마무리 대사 한 번 날리며 손을 위로 뻗자 여기저기에서 들려온 목소리들.
“끝났어…. 끝났다고, 모든 게.”
“제기랄.”
“베니고어시여, 베니고어시여. 기적을. 기적을….”
모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고 그 절망에 보답하듯 손을 내리려던 찰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죽어라. 벌레 같은…. 큭….”
“어?”
“뭐, 뭐야. 어째서….”
의문을 느끼는 이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모습도 빠져서는 안 된다.
“크….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영혼이 몸을 거부하고 있는 처절한 연기에는 혼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장면보다 중요한 장면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도… 망…. 쿨럭. 쳐…. 빨리….”
“…….”
“빠… 빨리…. 더 이상 시간이….”
눈에 한껏 눈물을 머금고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라는 듯한 눈빛으로 전방을 바라본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았던 커다란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진 상황에 둥지 안에 있던 이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내면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빛기영과 둠기영의 처절한 싸움에 일말의 희망을 품기 시작한 이들이 눈에 띈다.
“제길… 제기일!! 아아아아아아악! 기이이잇….”
전선에서 마력 빵빵하고 토실토실한 인간을 납치하던 리무르아도 시작된 발광에 복귀하여 내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 인간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질 것이다.
갑작스럽게 다시 한번 장내가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있으니까.
주요 악마 간부들은 전부 다 이쪽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모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빠진 구멍을 메워줄 스쿼드는 없다.
-리무르아입니다. 정신을 차리셔야지요.
“내… 눈앞에서… 사라… 나는….”
-부군이시여. 리무르아입니다. 기억이 안 나시는 겁니까?
“큭….”
-조금 피곤하신 것 같은데 들어가서 쉬시지요.
“…….”
-그렇게 얌전히 있으시면 고통이 사라질 겁니다. 편안히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괴롭지 않을 겁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예요. 머릿속에 있는 복잡한 기억들을 그렇게 날려 버리시는 겁니다. 천천히…. 천천히….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겁니다. 네, 그렇게 제 품에 안기시면 됩니다.
‘어우야. 얘는 진짜 영입하고 싶네.’
따로 설명을 해주지 않았는데도 곧바로 애드립을 치는 능력이 발군이다.
심지어 스토리까지 부여해 주는 모습.
천천히 이쪽을 촉수로 감싸고 있는 연출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본대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까지 생각이 닿자 괜스레 온몸이 찌릿찌릿거린다.
이제야 막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빛기영이 다시금 기분 나쁜 촉수에 휘감기는 장면.
희미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이 흉물들에 휩싸여 빛을 잃어가는 것이다.
‘과연 벨리알 고정픽답다. 고정픽다워.’
얘는 감독에게 사랑받는 여배우 일 수밖에 없다. 촉수가 징그러운 것도 마음에 들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힐끔 본대 쪽을 바라보자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재빠르게 몸을 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내가 잠깐 정신을 차린 영향 때문인지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박덕구 같은 놈들도 보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데리러 올 거요.”
“…….”
“내 눈 똑똑히 바라보쇼. 형님. 내가 반드시 데리러 올 거니까 그때까지만 버티쇼. 반드시 형님을 구해낼 거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래대로 정신을 차리게… 만들 거요. 끄윽….”
녀석 역시 병력의 안으로 끌려 들어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반드시 구해낼 거요! 조금만 더 버티쇼. 반드시, 꼭 기다려…. 꼭 기다리라니까!!”
처절함이 담긴 목소리는 점점 더 멀어졌고, 동공의 문은 닫힌다.
쾅.
이윽고 시야에서 모든 이들이 벗어났다고 느껴지는 상황.
손뼉을 치고 있는 악마들 사이에서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1,000만 달성이야, 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