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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98화 (495/1,590)

# 498

회귀자 사용설명서 498화

주저앉기는 했지만 이내 성장하게 되는 클리셰(1)

잠깐이었지만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순간, 물론 모든 상황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퇴각작전으로 인해 둥지의 안을 벗어나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정하얀의 마력이 아직 회복되기 전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동 마법 같은 걸 사용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박연주가 사전에 확보해놓은 퇴로를 통해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차피 그것 역시 곧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벨리알의 지배하에 놓인 지역에는 사방에 사역마들이 깔려 있었으니까.

그나마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장소는 공화국에서 공략을 시도하고 있는 17거점.

이곳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일단은 그쪽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추후 방향을 결정할 것 같았다.

계속해서 공략을 진행할지, 아니면 다른 병력과 합류해 전체적인 상황을 다시 한번 조율할지, 그것도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하고 걸어 잠글지.

사실 어느 쪽이 되든 별로 상관없기는 하다. 현재 흘러가는 정황은 거의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조금 급한 감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은 꼬였던 상황을 바로 잡았다는 게 무척 중요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악마들이 현재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증거나 다름없다.

우렁찬 함성과 박수 소리. 드라마 마지막 화 촬영을 끝낸 배우들에게 손뼉을 쳐주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지만, 그것과 이건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룩할 수 있었던 결과 아니겠어.’

무척 능수능란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르륵 하는 소리로 일관했던 악마 호베르트.

작은 배역이었음에도 최선을 다해준 만인장 마루앙.

그 외 이 판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움직여 줬던 위기대책반과 상황실 스탭들까지.

현 상황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건 너무나도 쓰레기 같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미소가 지어진다.

교국의 사제들을 상회하는 환호를 보내는 이들.

심지어는 정체불명의 꽃목걸이까지 내 목에 걸어주는 녀석들까지 있었다.

‘이 맛에 감독 합니다.’

나야 정확히 어느 정도의 실적이 쌓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리해 있는 모두의 입이 귀까지 찢어진 것을 보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일 것 같았다.

-대단한 연기였습니다. 외부고문!

-이야!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정말로요!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지? 전부 성공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이, 이기영 외부고문을 지옥으로!!

-이기영 님을 지옥으로!!

-이기영 님을 지옥으로오!!!

“하하하하. 모두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하하하.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샴폐인까지 터뜨리실 필요는 없다니까요.”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중간까지는 조금 걱정했었는데. 이것도 전부 머릿속에 있으셨던 건가요? 미리 좀 말씀해 주셨다면 더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잘 해주셨으면서 뭘 아쉬워하고 그러십니까. 리무르아 님. 갑작스러운 부군 설정에는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패닉에 빠지지 않고 따라와 주신 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합을 맞춰주실 줄이야. 정말 깜짝 놀랐지 뭡니까.”

-설정 건은… 개인적인 사심이 살짝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꾸 어필하지 마. 부담스러워.’

-저도 깜짝 놀랐어요. 이기영 님.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했었는데 곧바로 달려와 주시다니. 조금 뜬금없지만 이렇게 뵈니 더 매력적으로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그 모습은 벨리알 님과….

“네. 직접 계약을 맺었습니다. 본래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만 현재의 대륙 상태가 조금 불안정한 탓에 이렇게 성은을 입을 수 있었지요. 하하하. 그보다 어떻게. 실적은 많이 쌓으셨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더요. 대륙의 주요 도시에 방금의 장면이 나가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이 자리에 있던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손해를 전부 메우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올라 가봐야 알겠지만, 이 상태가 지속되면 1,000위권 안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1,000위권 안이라니. 이거 조금만 더 하시면 따로 산하 군단을 맡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꼭 이기영 님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물론 아직은 먼 나라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리무르아 님께서 그런 감사한 제안을 해주신다면 오히려 제가 더 고맙지요.”

-이거 외부고문님께서는 리무르아 님 말고 다른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나 봅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디 이게 리무르아 님과 저 둘이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밥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숟가락이라도 들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 있는 악마분들은 모두 한 분도 빠짐없이 나중에라도 꼭 보답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금 그 말 절대로 잊으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지요. 자, 이럴 게 아니라 모두 정리합시다.”

-네.

“일이 괜찮게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바로잡은 것에 불과합니다. 저도 깜짝 놀랄 정도의 변수가 있기도 했고요. 지금 일이 잘 풀렸다고 해서 마지막까지 잘 풀린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첫 번째 승리에 축배를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일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것입니다. 많은 걸 해냈다고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하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과연….

“일단 포로로 사로잡은 인간들은 동력실로 데리고 가 마력을 뽑아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동력실이 총….”

-다섯 개 있습니다.

“그렇군요. 주기적으로 인간들이 머무르는 장소를 교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방을 옮길 뿐이지만 혹시나 식량 창고나 위험한 장소로 가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지속해서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실적이 크게 쌓일 겁니다. 마력을 다 뽑아낸 인간들은 회복실로 옮기되 절대로 치료 과정이라는 걸 티를 내시면 안 되고요.”

-아마 모인 인간들끼리 꽤 공포에 떨겠군요. 혹시나 폐기 처분 당하는 것은 아닐지 따위의 생각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외부고문이십니다. 역시나 악마보다 더 악마 같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것 같습니다.

‘그건 아니지, 이 새끼들아.’

“큼, 아무튼 간에 그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크게 반항할 경우는 제외하면 될 수 있는 대로 몸에 손을 대는 건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물론입니다. 물론이고 말고요.

“이해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각 대륙의 상황이 어떤지 보고 싶은데….”

-곧바로 준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상황실에 부탁드립니다.”

-네.

방금의 상황을 본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했다.

또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감독도 좋지만, 정확히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다음 계획을 짤 수 있을 것 아닌가.

무슨 일이든 간에 시장 조사는 언제나 중요한 법이다.

다시 한번 안쪽에 있는 상황실로 복귀한 이후에는 승리자처럼 자리에 앉았다.

책상에 다리를 걸치고 즐겨 마시던 와인병을 집어 드니 마치 천국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손가락을 튕기자 전체적인 상황이 한눈에 들어온다. 역시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교국이다.

‘여기는 너무 뻔하지, 뭐.’

예상했던 대로 광장에 모여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다.

한 나라의 왕이라도 죽은 것처럼 울부짖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친다.

얼굴에는 다들 불안감과 공포심이 물들어 있다.

이미 자신들의 눈으로 모든 정황을 확인했음에도 현실을 부정하는 이들도 몇몇 보이기는 한다.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방금 눈앞에 보인 것은 여신의 거울이 아닙니다. 악마가 우리를 현혹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 정말로 타락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명예추기경님께서 정말로 악마에게 마음을 빼앗기실 리가 없습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교국민 여러분. 베니고어 여신님께서는 반드시 이번 시련을 이겨낼 힘을 줄 것입니다. 여신님께서 명예추기경님을 돌보실 겁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라고 외치는 녀석의 얼굴이 가장 두려워 보이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지 않다.

절대로 명예추기경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외치고는 있었지만, 녀석 역시 그 말에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충 봐도 눈에 보이는 게 있는 법이다. 끊임없이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고, 전투 물자들을 챙기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병사들과 사제들의 표정만 봐도 일이 꼬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파산 복귀는 더 빨라지겠네.’

안 그래도 열성적이었던 기도가 더욱더 열성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열성적이라는 표현을 현재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건 발버둥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사고 직전 저도 모르게 신의 이름을 외치게 되는 처절한 기도나 다름없다.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이쪽에서 절박함을 주면 저쪽에서 찰떡같이 받아먹는다.

애초에 왜 베니고어 측과 벨리알 측이 서로 연합하지 않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처음부터 서로 힘을 합치고 영차영차 했더라면 가만히 있어도 실적이 90년대 은행 이자처럼 불어나지 않겠는가.

대충 판만 깔아줘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나 다름없다.

‘상부상조를 몰라요. 상부상조를 몰라.’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 시야에 비친 것은 피난을 떠나고 있는 이들이다.

“연방 근처인가 보네.”

연방 주변의 왕국에서 더 이상 버티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왕국민들을 대피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 안에 있는 재산들을 다 챙기지도 못했는지 무척 가벼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의 모습에 조금은 가슴이 짠해진다.

한 손에는 아들의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딸을 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여성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먼 길을 떠나다 지친 노인이 걷다 쓰러지는 장면은 그중에서도 백미중의 백미.

때마침 달려온 사제 한 명과 화려한 복장을 한 여자 한 명이 노인에게 포션을 먹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간단한 활력 주문을 외울 신성력도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아 괜스레 찜찜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도시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베릴 대신관.

-아마 한참은 더 걸어야 할 겁니다. 여왕님. 주변에 다른 몬스터들이 없는 건 다행이지만 먼 행군길을 왕국민들이 버틸 수 있을지….

-버텨줄 겁니다. 저희 왕국민들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선대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왕국은….

-아버님을 뵐 면목이 없기는 합니다만, 아마 아버님께서도 같은 선택을 하셨을 겁니다. 그보다 그건 정말일까요? 교국의 명예추기경님이….

-아직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한 신성력을 가지신 분이 타락했다는 건 지금까지 전례가 없던 이야기라. 하지만 저희가 본 것이 진실이라면 현재의 대륙은 유례없는 위기를 맞았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일 겁니다.

-그건….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여왕님.

이쪽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가는 이들이 셀 수가 없을 정도다.

도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마을은 마적 떼라도 만난 것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고 소도시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돌아다니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더 벨리알의 영역에서 멀어지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기나긴 길을 떠나는 난민들의 모습은 마치 현재 상황을 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듯했다.

먼 곳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일부 지역은 정체불명의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생산 시설의 마비로 인해 기능을 정지한 국가들도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전통 시장으로 유명한 대도시의 시장에서는 강아지 새끼 한 마리 찾을 수 없었고, 이곳저곳에서 절망에 가득 찬 울음소리와 비명이 끊이질 않는다.

대륙 전체가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

내 입장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쓰러진 대륙이 도통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뭐야, 얘들 왜 이래….’

시나리오상 인류의 반격이 시작될 타이밍이었음에도 녹다운당한 놈들은 도무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두드려 맞은 복싱 선수처럼 완전히 뻗어 있는 모습은 가관이다.

‘일어서야지. 이 새끼들아.’

심지어 일부 국가에서는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자는 여론이 들끓고 있단다.

대륙에 커다란 상처가 날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커다란 상처를 쑤셔 박아준 모양이다.

둥지를 빠져나간 본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대로 그로기 상태에 빠지면 안 되지, 얘들아. 시바, 희망을 품고 일어서야지. 일어서, 이 새끼들아. 희망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구. 씨바….’

인류의 마지막 희망들을 주의 깊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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