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0
회귀자 사용설명서 500화
주저앉기는 했지만 이내 성장하게 되는 클리셰(3)
‘어우야. 고맙기는 하다, 희영아.’
저도 모르게 울컥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다.
처절해 보이는 얼굴로 눈물을 쏟으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선희영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
쟤도 조금 이상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평소에 보여주는 모습은 조신 그 자체였던 만큼 아무래도 이런 모습이 적응되지 않는다.
‘1회차 성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네. 그래도 그렇게 섭섭하지는 않으니까 이제 그만해도 돼. 희라 누나 폭발하겠다, 야.’
사실 이성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차희라가 옳아도 백번 옳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감정에 휩쓸려 병력을 밀어버렸더라면 전멸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테니까.
일단을 몸을 뒤로 빼더라도 후일을 도모하는 게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이었다는 거다.
내가 원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차희라는 실행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딱히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다.
감정이 이성을 앞서는 종류의 인간으로는 손가락에 꼽힐 수도 있을 정도의 성격을 가진 차희라다.
그런 차희라가 저런 이성적인 방법을 선택했으니 어떻게 생각하면 그녀 역시 필사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 있는 죄책감을 이겨내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아무튼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사건 현장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내가 다 쫄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선희영이 막말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증스러운 년들! 가증스러운 년! 퉷!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선희영 덕분에 사태는 점점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
붉은 용병의 길드원들에게 포박당한 채로 버둥거리고 있는 모습은 가관이라 할 수 있으리라.
‘막장이네, 막장이야.’
결국에는 차희라까지 등판하고 나서야 정리된 장내.
무척이나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는 붉은머리의 여자는 지금껏 본 적 없이 침울한 얼굴로 선희영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얘들 다 상태가 왜 이래….’
단 한 명도 멀쩡한 꼴을 한 애들이 없다.
잠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선희영은 곧바로 손을 들어 차희라의 뺨을 냅다 후려버렸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차희라의 뺨이 돌아갔고 다시 한번 주변이 조용해지는 게 느껴졌다.
홧김에 그녀가 그대로 주먹을 휘두른다면 그 자리에서 선희영은 즉사.
혹시나 화를 주체하지 못해 폭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했지만 붉은머리 여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담담하게 그녀를 마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은 한 대 맞은 짐승 같지가 않다.
애초에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걸 그대로 받아준 걸 보면 딱히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가 폭발하지 않았다는 건 여러 가지로 신기하기는 했다.
며칠 동안 밤이라도 샌 것 같은 몰골을 한 차희라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역마가 일정 거리를 두고 치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만족해?
-…….
-이제 만족하냐고.
-끄윽.
-지금 당장 병력을 돌려서 돌아간다고 해서 뭘 어쩔 건데?
-당신, 당시인….
-마력이 떨어져 기본 주문도 외우기 벅차하는 마법사들과 병신이 된 그쪽 길드마스터 데리고 방금 장소로 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야. 난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뒈질 생각도 없고 우리 자기 그딴 식으로 포기할 생각도 없어. 화풀이할 거면 딴 데 가서 알아봐. 아니면 혼자 가서 뒈지던가. 그것도 아니면 닥치고 명령에 따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지금 당장 병력을 돌리면 그 새끼가 좋아할 것 같아? 원래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걸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현 상황에서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게 그런 판단이야. 까놓고 말해서 지금 당장 병력을 꼬라박는 것보다 병력을 재정비해서 들어가는 게 더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야.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어?
-누, 누가, 누가 그걸 몰라서….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 흐윽,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아아!!!
다시 한번 손을 번쩍 들고 뺨을 후려치는 선희영.
차희라는 또 그걸 가만히 맞아주고 있다.
어딘가에서 난입한 황정연 역시 즙을 뽑아내며 최대한 선희영을 말리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신체 능력이 좋지 않으니 전부 막아낼 수 있을 리 없다.
당연하지만 먼저 지쳐 나간 것은 선희영 쪽이다.
실제로 피투성이가 된 것은 그녀의 손바닥이지 차희라의 뺨이 아니다.
-화풀이 끝났으면 돌아가서 본인 몸이나 회복시켜. 이런 식으로 떼를 쓰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도움될 테니까. 그리고 당신은….
-파란 길드 황정연입니다. 17거점의 공략이 완료된 것 같다는 디아루기아 님의 전언이 있어서…. 최대한 빨리 이동하시라고…. 그, 그걸 말씀드리려고 왔는데 정말로 죄송합니다.
-확인했어. 그리고 죄송할 것도 없고.
-아니요.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
-아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
-당신…. 후우, 후우, 만약에 이기영 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정말로 죽여 버릴 거야. 정말로 정말로 죽여 버릴 거야.
-희영 씨. 이제, 이제 그만 해요.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원래 이런 분이 아닌데….
-네 마음대로 해. 그 꼴 나면 어차피 나도 오래 살 생각 없어. 그리고 방금 말 들었지? 행군 방해하지 말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징계 건은 없던 걸로 할 테니까.
-빠, 빨리 가요. 희영 씨. 이러지 말고.
-정말로 죽여 버릴 거라고 내 말 알아들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 버릴 테니까. 찢어 죽여 버릴 테니까. 내 말 똑똑히 기억해. 이기영 님이 살아 계시는 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기도하는 게 좋을 거라고!
-…….
김창렬까지 와서야 힘으로 선희영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사역마를 다시 파란 쪽으로 돌려볼까 하고 생각했었지만 붉은 용병의 단원들 사이에 휩싸여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차희라를 보고서는 화면을 돌릴 수가 없었다.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지만, 간헐적으로 어깨가 떨려오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서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 전 소란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변을 가려줬던 용병의 단원들은 더욱더 외부와 그녀를 차단해 주고 있다.
현재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의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등을 돌리고 있는 그들 역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리라.
-역시 방금은 따로 징계하거나 처벌을….
-성녀급 사제를 징계 처벌해서 득이 될게 뭐가 있겠어. 이후에 전투에 가장 필요한 사람 중 한 명이야. 소문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만 신경 써. 분위기 흐려지니까.
-네, 알겠습니다.
-…….
-무사하실 겁니다.
-고맙다.
잠깐 멈춰 있던 차희라가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에 들어선 감정은 역시나 불안과 수심. 솔직히 많이 힘들 거로 생각했다.
현 상황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 부담감과 싸워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상상을 다 하고 있을 것이고 정말로 자신의 선택이 맞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게 의아하게 느껴진다.
적어도 그녀의 부담을 덜어줄 사람이 있으면 조금 좋으련만 다들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까 길드를 한 번 둘러 봤을 때도 느꼈던 감정.
정하얀은 자해하고 기절하고 소리를 지르고의 반복.
청승맞은 여주인공이 된 엘레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된 업무도 보지 못하고 있는 중.
같은 길드원은 아니지만 카스가노 유노 얘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멘탈을 챙기고 있는 건 박덕구와 차희라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것마저도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무엇보다 가장 걱정됐던 것은 역시나 김현성의 상태였다.
‘얘도 진짜 봐야 하는데….’
지금 당장 달려가 내 님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건만 주변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
황정연과 김예리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보면 녀석이 아직 정신을 놓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확인하는 건 당연한 절차가 아닌가.
‘지금 이 상태대로면 진짜 꿈도, 희망도 없는 거다. 야, 너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 현성아, 진짜.’
계획이 성공해도 너무 성공해서 문제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야 여파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무너질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병력은 죽어가기 일보 직전이었고 분위기도 개판.
멀리 볼 필요도 없이 방금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는 수준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건 방금 한 번 이었지만, 몇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면 걸리는 것이 꽤 많다.
벌써 후유증을 보이는 애들도 있었고….
‘조금 무리해서라도 보는 게 좋을까.’
괜스레 정하얀이 사용할 수 있는 아네모네의 눈이 그리워지는 시점.
아쉬운 대로 상황실의 동료에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기….”
-네.
“저기 17거점 있잖습니까.”
-아… 네. 외부고문님.
“혹시 거기도 사역마가 배치되어 있습니까? 조금 더 은밀한 놈들로….”
-물론 배치시켜 놓았습니다.
“다행이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외부고문님이야말로 모니터링 하느라 아주 고생 많으십니다. 곧바로 이렇게 일에 집중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아직 일이 끝난 게 아니니까 그렇지, 이 새끼야. 지금부터가 중요한 건데….’
중요한 게 시작하기도 전에 무너져 내리게 생겼다.
그래도 본대가 17거점에 들어간다면 조금 더 상황을 면밀히, 아니, 김현성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디아루기아의 활약 때문인지, 본대가 17거점에 들어선 것은 이후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사역마들이 보내고 있는 마력 홀로그램이 무더기로 시야에 비쳐온다.
17거점을 미리 점령하고 있었던 공화국의 군대가 차희라와 손을 맞잡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전체적인 전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의 새로운 이슈들이 생기기는 했지만 적어도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상태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
역전의 발판.
‘메인 스토리의 핵심 인물’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완벽한 배우.
‘이 게임의 주인공이자 이번 시나리오의 마무리를 책임질 종결자.’
여러 가지로 기대를 하며 17거점의 김현성을 찾아다녔건만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작은 방 안.
조혜진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녀석의 얼굴을 본 순간 괜스레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그럼 길드마스터,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쟤, 얼굴 왜 저래.’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별 차이가 없다.
리무르아의 촉수질에 뇌에 강한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닌지 떠올렸을 정도. 그만큼 녀석은 혼이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인, 인류의 마지막 희망….’
그 마지막 희망은 작은 방 안에 있는 사역마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채 초점이 나간 눈으로 허공을 응시 하고 있다.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온 순간 어쩌면 이쪽이 너무 심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됐어.”
‘되긴 뭐가 돼, 이 새끼야. 너 왜 그래, 현성아. 진짜.’
“이제는… 지쳤어….”
‘지… 지치지 마, 이 새끼야. 지치면 끝이야.’
예상하던 것보다 더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치지 말라고… 씨바….’
모든 걸 포기하고 놓아버린 사람의 얼굴이었다.